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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 쓰는 은정원 Aug 22. 2024

얼음강물을 건너온 소녀 1부 _08

이 쪼꼬맹이가 소리도 없이



아버지 없이 맞이한 첫 번째 설날은 기억이 선명하다.


추석엔 식당 문을 닫기는커녕 전날부터 손님상에 올라갈 ‘명절 분위기 나는 반찬’을 준비하느라 분주했었는데, 설날은 명절 이틀 전부터 시장의 가게들이 단 한 군데도 남김없이 문을 닫았다.

우리는 미리 반달 치 흰쌀과 배추, 무, 파, 국수 같은 것을 사놓았고 사과와 달걀, 땅콩도 조금 샀다.


주인아주머니와 라오반의 식당도 그로부터 2주 넘게 문을 닫았다.

‘라오반’은 중국어로 사장님이라는 뜻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와 어머니에게 라오반이란 ‘싼웬 조선족 식당 주인아주머니의 중국인 남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


설날을 앞두고 식당 문을 닫기 전에, 주인아주머니가 섣달그믐에는 ‘춘절맞이’ 생방송 쇼인 「CCTV 춘롄」을 꼭 봐야 한다고, 특히 이번엔 새천년 특집이라 볼만할 거라고 기대에 차서 말했다.

어머니는 집에 TV도 없고 제목도 처음 들으면서 “맞슴다, 맞슴다.”라고 맞장구를 쳤다.


라오반은 나에게 ‘야쑤이쳰(새뱃돈)’이라며 10위안짜리 지폐가 들어있는 빨간 봉투를 주었다.

어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두 손을 마구 휘저었다. 왜 이리 큰돈을 주시느냐고 허둥지둥 말했지만 주인아주머니는 ‘일없다’며 어머니 등을 톡톡 두드렸다.

라오반은 동그랗고 커다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린화 사람의 억양으로 큰 소리로 말했다.

“해 넘으면 메이란이 일곱 살이지? 가을에 학교 입학해야겠네.”


그 말만 했을 뿐, 아무도 우리에게 섣달그믐날 밤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선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린 중국인이고, 중국인이라면 그날 밤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두 알고 있으니까.     




어머니는 중국온 이래 처음으로, 해가 뜬 후에 눈을 떴다. 눈을 뜬 후에도 우리는 오래도록 벽장 위 침대에 그대로 누워있다가 간단히 만토를 구워 먹은 후 대청소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물건도 별로 없어 시작하자마자 끝이 났고, 몇 벌 있는 낡은 옷들을 꺼내어 이것저것 겹쳐 보았지만 옷감이 워낙 낡아 다른 옷으로 ‘변신’시키지도 못할 지경이라 그냥 내려놓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해는 기울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드디어 느리게 느리게 농마국수와 달걀부침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여긴’ 재료가 다 있어 설날에 먹는 만두를 빚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내가 만두 말고 농마국수가 먹고 싶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시장에서 산 싸구려 라디오를 틀어놓았다가 이내 꺼버렸다.

식탁 위에 따끈한 농마국수 두 그릇이 놓였다. 

국물은 담백하고 면 가락은 부드러웠다. 폭신폭신한 달걀부침도 따뜻한 국물에 적셔 실컷 먹었다.

그런데 까닭 없이 얼굴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놀랍게도 어머니의 얼굴도 눈물로 젖어있었다.

“이 쪼꼬맹이가 가슴속에 뭐가 들어있어 소리도 없이 눈물…….”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어머니에게 물어보고 싶던 장면들이 눈앞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얼음 강물을 건너기 전 아버지가 어머니의 팔을 붙잡고 뭐라고 말을 하자 어머니가 뿌리치고 아버지의 어깨를 치는 장면.

아버지와 한참 실랑이를 벌인 후, 어느 순간 내 손을 덥석 붙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물 위를 걷는 어머니.

장만승의 식당에 공안이 들이닥쳤던 날,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일어나며 어머니가 떨어뜨렸던 붉은색 비단 지갑, 밖으로 튀어나와 얼핏 보였던 중국글자들이 써진 종이 증서.


내가 드디어 눈물을 닦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그때 아버지……’라고 웅얼거렸을 때, 느닷없이 하늘에서 ‘꽈광!’하는 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멀리 야산에서 들은 적 있는 소리였다.

꽝꽝꽝! 

연이어 큰길 쪽에서 총탄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머니와 나는 일순간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바들바들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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