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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 쓰는 은정원 Aug 22. 2024

얼음강물을 건너온 소녀 1부 _07

우리 미란이도 이 어머니를 닮았으니


나는 두꺼운 목도리를 얼굴에 둘둘 감고 아침마다 어머니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식당으로 갔다. 어머니의 일터에 도착하면 테이블 앞에 멍하니 앉아있을 순 없으니 옌지에서처럼 저절로 일을 거들게 되었다.


처음엔 아침 청소와 채소 세척만 도왔는데, 점차 채소를 다듬고 양념을 섞고 여덟 개의 다호에 어머니가 끓인 물을 붓기 전에 일정한 양의 찻잎을 덜어놓았다.

야시장 경험이 생긴 후에는 테이블에 찻잔이 모자라기 전에 찻잔을 채워 놓았고, 가끔 주문을 받을 때도 있었다. 

무겁고 뜨거운 음식은 어머니나 주인아주머니가 날랐고, 식사를 마친 그릇은 대부분 어머니가 치웠다.


손님은 주로 조선족이거나 조선족을 동반한 한족이었다. 한족끼리 오거나 겉으로 구분했을 때 소수민족처럼 보이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손님들과의 대화라야 나에게 음식명을 말하거나 찻물을 더 달라는 게 전부였지만, 간혹 ‘림화’엔 언제 왔고 ‘동북’ 어디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뭐 하는지 묻는 사람도 없진 않았다.


손님들이 나에게 그런 말을 건넬 때면 어머니는 주방에 거들어야 할 일거리가 있는 것처럼 나를 불러들였다. 어머니는 종종 심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의미를 헤아리기에 나는 아직 어렸다.

그렇지만 눈치만은 빨라 손님이 나에게 말을 걸 기미가 보일라치면 찻잔이나 행주 같은 것을 집어 들고 분주한 듯 주방으로 들어서서,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식당 아즈마이에서 나만의 선생님으로 변신하여 한글과 산수는 물론 중국어도 가르쳐주었다.

어머니는 백강에서 ‘외국어 소조’의 중국어를 담당했을 만큼 실력이 있었다. ‘소조’는 한국의 ‘방과후수업’이나 ‘스터디그룹’과 비슷한 교육과정 외 교육을 말하는데, 이런 세련된 단어들은 이로부터 19년 후에 알게 된 것들이다.


어머니는 중국엔 와본 적도 없고 아는 중국인도 없지만, 교원대학에서 책과 테이프만으로 내내 중국어 최고점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아무리 중국어를 잘해도 조국의 언어를 잊어선 안 된다고 늘 강조했다.

당시 우리에겐 한글을 배울 책이 없어서 어머니가 학습장 왼편에 조선어 문장들을 써주면, 나는 그것을 몇 번이나 읽고 거의 다 외운 후에 오른편에 따라 쓰곤 했었다.


그중에서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로 시작하는 「반월가(半月歌)」인데, 아버지와 함께 노래로 불렀던 기억이 있다.

다른 하나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업시 고히 보내 드리우리다. 녕변에 약산 진달내꼿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이다.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음률 따라 읽다가 다 외워버렸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가 써주었던 글자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 ‘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는 진달내꼿’으로.


어머니는 시에 나오는 ‘녕변의 약산’이 평안북도에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가 본 적도 없는 곳이 그리울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다른 문장들도 대부분 어머니가 아는 노랫말이나 시의 구절이 많은데, 군데군데 단어를 바꿔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가 학습장에 뭔가를 적어주는 날이면, 쓰다가 종종 멈춰서는 쩔쩔매면서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기 때문이다.

“어째 노래 가사도 다 혁명, 전진, 투쟁… 이런 것들뿐이네? 여긴 뭐라고 쓸까? 동무? 희망?”


내가 어머니의 문장들을 한 자 한 자 읽고 베껴 쓸 때면, 어머니는 내 옆에서 무명을 잘라 색색의 실로 수를 놓고 가장자리를 감침질하여 베개포를 만들었다.

개어놓은 베개포가 내 무릎 높이로 세 줄이 되자 어머니는 구슬과 리본, 고무줄 등을 사다가 머리장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새로운 것을 만들 때마다 나는 감탄하며 직접 머리에 해보고는 예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나를 보는 어머니의 두 뺨은 발그레해지고 얼굴은 미소로 한껏 차올랐다. 

어머니는 뿌듯해하며, 여기로 오는 동안 버스 타고 돌아다닐 때 큰 도시에서 본 것들을, 기억나는 대로 흉내 내어 만들어 본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색하며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공부면 공부, 음식이면 음식, 바느질이면 바느질. 솜씨가 어찌 이리 다 좋슴까?”


“우리 미란이도 이 어머이를 닮았으이 분명 다 잘 할끼지.”

어머니는 두 눈을 반짝이며 방긋 웃었다.


우리끼리 있을 때도 어머니는 나를 미란이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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