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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드가 Sep 17. 2019

토론토의 여름

Toronto, CA (1)

  여행은 모두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마다 여행의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내 여행의 모토는 이렇다. "남들은 못하는 여행"  둘러보고 끝나는 관광이 아닌 나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좋다. 단순히 유럽을 간다 하더라도 또래들이 이맘때쯤 청춘의 필수 관문처럼 하는 유럽 일주 배낭여행 이런 건 싫다. 네이버에 정보가 검색되지 않는 도시가 좋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좋다.


나는 일 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생활하고 1년 평균 7만 마일, 매년마다 지구 3바퀴씩을 비행한다. 그럼에도 지금껏 단 한 편의 여행기도 브런치에 올리지 못한 건 단순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여행기가 독자들에게 정보(Information)가 아닌 영감(Inspiration)을 주었으면 했다. 그런데 몇몇 사랑하는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보아도 블로그에나 올릴 법한 정보글만 써졌다.


  글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데 굳이 이제 와서 여행기를 올리기로 결심한 이유는, 우선 지난 글이 브런치 에디터 선정이 되면서 메인에 올라갔다. 가장 마음 편히 소소하게 쓴 글이 힘 꽉 주고 쓴 무거운 글들보다 평이 좋았다. 그저 나의 사소한 일상을 담은 것들이 누군가에게 흥미롭게 읽힌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기억이 휘발되어 날아가버릴까 싶어서다. 지난 추억들은 수만 장의 사진과 동영상으로 남아있지만 그것들 만으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완전히 늦어버리기 전에 글로 풀어나가보려 한다. 내 기억의 서랍 속에 몰래 숨겨둔 아름다운 장소들을 소개해볼까 한다.






  서울은 무채색의 불행이고 런던이 비일상적 행복이라면, 토론토는 언제나 나에게 애증이다. 늘 그리운 곳이지만 남긴 상처가 너무 많은 곳이다. 피어슨에서 이륙하는 순간에는 매번 무언가 중요한 것을 두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빼놓고 말하자면 토론토라는 도시는 제법 괜찮은 곳이다. 누군가 토론토에 온다고 한다면 관광보다는 한 달 이상. 조금 오래 시간을 들여 로컬 라이프를 즐겨보기를 권하고 싶다.


온 세상이 붉은 단풍으로 물드는 가을과 허리춤까지 눈이 소복이 쌓이는 겨울. 어느 계절이고 나름의 매력이 담겨있지만 이왕이면 여름, 그중에서도 7월과 8월을 권하고 싶다. 여름의 토론토는 해가 아침 6시에 떠올라 밤 10시까지 온 도시가 밝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 무려 16시간에 달한다. 온종일 하늘이 푸르르고 햇빛이 강하다 보니 시계를 보지 않으면 정말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다.



  햇빛이 뜨거운 날에는 돗자리와 비치볼을 챙기고,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서쪽의 우드바인 비치(Woodbine Beach)로 향한다. 간혹 가다 캐나다 데이 같은 특별한 날에는 다양한 술을 동반하기도 한다. (토론토는 특별한 공휴일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야외 음주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나는 아보카도를 가득 넣은 김밥, 중국 친구는 데리야끼 소스를 부은 오븐 구이 치킨, 이탈리아 친구들은 정말 수제로 만든 나폴리 피자, 남미 지역의 친구들은 과카몰리와 나쵸칩, 그리고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기묘한 당근 요리를 준비했다. (정말이지 매운맛만 가득했다.) 모래사장 한 켠에 돗자리를 넓게 피고 둘러앉아 서로의 요리와 이야기를 나누며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술잔을 기울인다.


물은 발을 담가도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투명하고 맑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바닷물이 아니다. 우드바인 비치를 비롯한 토론토의 모든 해변은 온타리오 '호수' 주변에 위치한다. 다만 호수가 너무 거대해서 그럭저럭 파도도 쳐 오르고 모래사장도 있고 하니 이것이 민물인지 바닷물인지 구분하려면 직접 찍어 먹어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다. (먹어보면 짠맛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물에 빠져 물장구도 치고 비치볼을 튀기기도 하고 오로지 행복으로 가득 찬 시간을 보내다 보면 쉽게 지쳐버린다. 언제고 도무지 남미 친구들의 체력을 따라갈 수가 없다. 


한껏 체력을 다하고 나면 지친 친구와 도망 나와 나란히 앉는다. 적당히 그늘이 있고, 적당히 따스한 햇살이 무릎을 간질이는 곳.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조용히 듣기 좋은 곳. 맥주 한 병씩을 들고 여전히 댄스파티가 한창인 남미 친구들을 지켜보다, 그조차 지치면 돗자리에 반듯하게 누워 아무 일도 없이 먹먹하게 흘러가는 새하얀 구름을 바라본다. 그러다 선글라스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이 부셔 눈을 감으면 잠이 들고 기분 좋은 꿈을 꾼다. 햇살 좋은 여름날 세상 어디건 안 좋겠냐만은 토론토의 여름에는 그 특유의 여유로움과 자연과 친밀한 즐거움이 가득 담겨있다.


땅거미가 지고 해변의 모래가 바람에 흩날릴 때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다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선다. 오늘 저녁 메뉴는 한식이다. (어째서 늘 한식이었을까?) 토론토는 이민자들이 모여 세운 도시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온갖 요리를 모두 찾아볼 수 있다.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한국, 일본, 중국, 태국, 베트남 식 요리부터 레바논, 캐리비언, 아프리카, 할랄 요리 등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음식이 모여있고 대개 맛이 좋은 편이라 자부할 수 있다.


한식 레스토랑이나 주점들은 지하철역 그린라인의 크리스티 (Chrisitie) - 바스러스트 (Bathrust), 옐로라인의 영쉐퍼드(Yonge-Sheppard) - 핀치 (Finch) 지역에 통틀어 분포한다. 지난 몇 년간 정말 새로운 것들이 우후죽순 생겨나서 이제는 정말 토론토에서 못 먹는 한식을 찾는 것이 더 힘들게 되었다. 엽기떡볶이도 있고 북창동 순두부찌개도 있다. 한국식 치킨집은 프랜차이즈만 벌써 세 개째다.


외국 친구들을 한식당에 데려가면 풍경이 꽤나 재밌다. 우선 중국 친구들은 한식이 익숙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대개 감자탕에 미쳐있다. (그놈의 Pork Bone Soup) 비빔밥과 떡갈비는 호불호가 잘 갈리지 않는 인기 메뉴이고, 가끔은 차가운 면 음식이 신기했는지 냉면을 주문하곤 하는데 젓가락 질이 익숙지 않은 친구들은 냉면을 파스타 먹듯이 포크로 돌돌 말아먹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스워져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곤 하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맛있다는 듯 냉면 국물을 떠먹는 친구들을 볼 때면 내심 뿌듯함에 가득 차곤 한다.


식사를 끝마치면 근처의 지하철 역에서 헤어지는데 아주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작별 인사를 한다. 한 명 한 명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감사의 말을 전하고 포옹과 비쥬(Bisou)로 따스함과 여운을 남긴다. 바람에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가까워졌다가 멀어져 가는 플랫폼의 전철 소리. 미소 가득한 친구들의 얼굴과 와글거리는 웃음소리가 한데 모여 토론토의 여름밤을 빛낸다.







  내가 토론토라는 도시에게 배운 가장 귀중한 것은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편견 어린 시선의 축소다. 수백 개의 백그라운드를 지닌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한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배움과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체험. 한국에서 여전히 곱지 못한 시선으로 뒤덮인 LGBT사회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차별의 철폐. 누군가 자녀를 토론토로 어학연수를 보내고 싶다면 영어에 적(的)을 두기보다는 이런 다양성에 대한 배움의 장(場)으로 삼으라 이야기하고 싶다. 언어는 이제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충분히 잘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차별적인 사고의 탈피는 좁디좁은 한국 사회에 갇혀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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