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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상황 파악과 초기 적응

by 닥터 F

Day 1

차가운 감각이 모든 생각의 흔적을 지우며 그녀를 깨웠다.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뺨에 맞닿은 콘크리트의 거칠고 단단한 질감, 그 표면을 타고 흐르는 축축한 습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 뼛속까지 스며드는 생명력 없는 냉기. 마치 포식자처럼, 냉기는 잠들어 있던 그녀의 온몸을 감싸고 천천히 마비시켰다.

그녀는 끙, 하는 낮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시야는 온통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머리는 수십 개의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산산조각 난 듯, 숨을 쉴 때마다 지독한 통증을 쏟아냈다. 그 통증의 파편 사이로 텅 빈 공허함이 소용돌이쳤다. 뇌의 모든 서랍이 텅 비어버린 느낌. 텅, 텅, 텅.


여기가 어디지?

나는… 누구지?

질문은 소리가 되지 못했다. 입안에 가득 찬 흙먼지의 텁텁함이 목소리를 앗아갔다. 공기 중에는 묵은 곰팡이와 흙, 그리고 희미하게 오존이 타는 듯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마치 낡고 거대한 기계의 숨구멍 속에 갇힌 듯한 냄새였다.


패닉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뛰고, 호흡이 가빠졌다. 이대로 질식할 것만 같은 공포 속에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갈망했다. 기억. 단 하나의 기억이라도 좋았다. 엄마의 얼굴, 내 이름 석 자, 어제저녁 메뉴. 하지만 머릿속을 아무리 헤집어도 돌아오는 것은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고통스러운 공백뿐이었다. 이름 없는 존재. 과거 없는 인간. 그것은 살아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그때였다.

째깍, 째깍.

왼쪽 손목에서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혼돈에 빠진 그녀의 의식에 작은 닻을 내리는 소리. 그녀는 고통을 무릅쓰고 상체를 일으켜 손목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낡았지만 여전히 시간을 새기고 있는 아날로그 시계.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야광 시곗바늘이 보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 작은 문자판 한구석에 달린 나침반 바늘이 미세하게 떨며, 그러나 흔들림 없는 의지로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름도 과거도 잃었지만, 방향을 아는 것이 생존의 첫걸음이라는 사실 만큼은 지워지지 않은 채 각인되어 있었다.


그녀는 생존자처럼, 혹은 사고 현장을 조사하는 탐험가처럼, 벽을 짚고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감옥을 체계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벽을 따라 걸으며 걸음 수를 셌다. 스물다섯 걸음. 대략적인 원의 둘레. 그녀는 자신의 보폭을 어림잡아 직경을 계산했다. 7미터 남짓.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득했다. 검은 벨벳 같은 어둠이 천장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누군가 땅속에 거대한 항아리를 묻고, 그 안에 자신을 던져 넣은 것만 같았다.


똑, 똑.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이전에는 공포를 증폭 시키는 소음이었지만, 이제는 중요한 데이터였다. 그녀는 소리가 들려오는 북동쪽 벽면으로 다가가 귀를 가져다 댔다. 차가운 습기가 뺨으로 전해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모든 신경을 청각에 집중했다. 물방울이 바닥에 부딪히는 날카로운 원음(原音). 그리고 그 소리가 반대편 벽을 맞고 아주 미세한 시간 차를 두고 희미하게 되돌아오는 반향음(反響音). 에코.

그녀는 손뼉을 쳤다. ‘짝!’ 하는 파열음이 공간을 가르고, 잠시 후 유령처럼 희미한 소리가 돌아왔다. 그녀는 손목시계의 초침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너무 짧고 부정확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단 한 음절을 외쳤다.

“아!”

돌아오는 소리는 더 선명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반복하며 그 시간 간격을 몸에 새겼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공식이 펼쳐졌다.

‘소리의 속도는 대기 중에서 초당 약 340미터. 현재 공기의 온도와 습도를 감안하면 오차는 ±5% 이내. 왕복 시간을 t라고 가정하면, 이곳의 깊이 D는… D ≈ 1/2 * V_sound * t…’

어떻게 이걸 알고 있지? 질문은 사치였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계산이 이루어졌다.


‘깊이… 약 18미터.’

18미터. 아파트 6층 높이. 절망적인 수치였지만, 미지의 공포보다는 측정된 절망이 차라리 나았다. 이제 이 공간은 그녀에게 더 이상 정체 모를 어둠이 아니었다. 직경 7미터, 깊이 18미터의 원통형 콘크리트 감옥. 그녀가 풀어야 할 거대한 문제였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공간의 다른 구성 요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에는 문명의 잔해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20세기의 유물인 브라운관 TV, 문짝이 흉하게 찌그러진 전자레인지, 케이스가 박살 나 초록색 내부 기판이 드러난 구형 컴퓨터 본체. 마치 누군가 도시의 폐기물을 이곳에 쏟아부은 듯했다. 반대편에는 건설 현장의 잔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뻘겋게 녹슨 철근 몇 가닥, 크고 작은 콘크리트 덩어리, 그리고 정체 모를 흰색 플라스틱 파이프들.


이것들은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자원이었다.

그리고 그 폐기물 더미 위, 기적처럼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반 쯤 흙먼지에 파묻힌 사각형의 물체.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내자, 익숙한 형태가 드러났다. 태블릿. 액정은 거미줄처럼 금이 갔지만, 화면은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AI Lumen v0.9.2]

[오프라인 모드]

[배터리 잔량: 60%]

[네트워크 연결 불가]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었다. 그리고 가장 절박한 질문을 입력했다.

“여긴 어디지?”

[AI] GPS 신호를 찾을 수 없습니다. 현재 위치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지?”

[AI] 개인 식별 정보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AI는 만능이 아니었다. 인터넷이 끊긴 AI는 거대한 도서관일 뿐, 지혜를 가진 현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 암담한 지하 감옥에서, 그녀를 인류의 지성과 연결해 줄 유일한 끈이었다.

탐색을 계속하던 그녀는 작은 행운을 추가로 발견했다. 아마도 추락의 충격으로 고장 난 자판기에서 튕겨 나온 듯한 과자 몇 봉지. 기껏해야 하루를 버틸 양이었다. 위장이 공허한 비명을 질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더 시급한 것이 있었다.

바로 물이었다.


그녀는 다시 북동쪽 벽면으로 향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바로 그곳. 벽면에는 희미하게 녹색을 띤 이끼의 군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끼가 더 무성하게 자란 방향은 미세한 빛이 더 오래 머무는 곳일 터였다. 이끼의 분포는 이곳의 습도와 빛의 경로를 알려주는 완벽한 생물학적 지표였다.

기억은 잃었다. 그러나 현상을 관찰하고, 변수를 분석하고, 원리를 적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그녀의 몸과 뇌에 깊이 새겨진 문신과도 같았다.

그녀는 엔지니어였다. 이제 그녀의 첫 번째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Day 2

밤이 되자 추위와 함께 갈증이 목을 태웠다. 어제 발견한 지하수는 희망이었지만, 동시에 미지의 위협이었다. 중금속, 박테리아, 기생충. 보이지 않는 적들이 물방울 속에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그녀는 태블릿의 차가운 화면을 켰다.


[그녀] 물 정화 방법. 사용 가능 자원: 폐가전제품, 건설 폐기물. 발화 도구 없음.

[AI] 보유 자원을 기반으로 ‘태양열 증류법(Solar Water Distillation)’을 추천합니다.

1. 오염된 물을 투명한 용기에 담습니다.

2. 용기 위를 투명하고 경사진 덮개로 덮어 밀폐된 공간을 만듭니다.

3. 태양광이 용기를 가열하면 내부의 물이 증발하여 수증기가 됩니다. 불순물은 용기 바닥에 남습니다.

4. 수증기는 상대적으로 차가운 덮개 안쪽에 닿아 응축되어 순수한 물방울로 맺힙니다.

5. 경사진 덮개를 따라 흐른 물방울을 별도의 용기에 수집합니다. 효율 증대를 위해 태양광을 한 점으로 모으는 집광 장치(볼록 렌즈 등) 제작이 권장됩니다.


태양광. 그녀는 고개를 들어 구멍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득한 상공. 마치 신의 자비처럼, 하루 중 정오를 전후한 특정 시간에만 한 줄기 빛이 사선으로 이곳을 비추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외부 에너지원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거대한 브라운관 TV에 꽂혔다. 저것이 그녀의 렌즈가 될 터였다.

육중한 TV를 분해하는 것은 사투에 가까웠다. 그녀는 철근을 지렛대 삼아 플라스틱 케이스의 약한 이음새 부분을 공략했다. AI는 지렛대의 원리를 설명하며, 힘을 가할 지점과 받침점의 최적 위치를 제안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케이스가 부서지자, 복잡한 내부 기판과 함께 묵직한 유리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면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완벽한 집광 렌즈의 형태였다. 그녀는 유리를 다룰 때 발생할 수 있는 파편과 부상에 대한 AI의 경고를 상기하며, 천 조각으로 손을 감싼 채 조심스럽게 유리관을 분리해냈다.


저주파 소음이 주변을 맴도는 듯한 느낌과 함께 유리관의 굴절률과 곡률 반경, 그리고 그에 따른 초점 거리 계산 데이터가 복잡한 수식과 함께 떠 올랐다. 그녀는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장 효율적인 각도를 계산해, 콘크리트 덩어리 위에 유리관을 비스듬히 설치했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지 알지 못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인지, 기억상실과 함께 반대급부로 채워진 것인지. 다만 현재의 상황에서 너무나 필요한 능력이었고, 당장 도움되지 않는 의문 때문에 주의력을 흩트릴 그녀가 아닌 것은 확실하였다.


다음은 정수 필터였다. 이것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2차 안전장치였다. 그녀는 플라스틱 파이프를 반으로 잘라 물받이를 만들고, 그 안에 자신이 입고 있던 셔츠의 일부를 찢어 첫 번째 필터로 깔았다. 그리고 폐기물 더미에서 찾아낸 모래를 깨끗한 물에 여러 번 헹궈 불순물을 제거한 뒤 두 번째 필터 층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불에 탄 흔적이 있는 나무에서 긁어낸 숯 조각을 잘게 부수어 세 번째 필터 층을 쌓았다. 원시적이었지만, 모래가 비교적 큰 부유물을 거르고 숯의 활성탄 성분이 미세한 불순물과 냄새를 흡착하는, 과학적인 다단계 여과 시스템이었다.


마침내 빛이 들어오는 시간. 그녀는 계산된 위치에 오염된 지하수를 담은 용기를 놓았다. 브라운관 렌즈를 통과한 빛이 한 점으로 모여들며 용기 표면을 뜨겁게 달궜다. 이내 희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투명한 덮개 안쪽에 작은 물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경사진 덮개를 타고 흐른 순수한 물방울이 정수 필터 시스템으로 떨어졌다. 모래와 숯 층을 통과한 물은 투명한 생명수가 되어 파이프 끝에 고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혀에 대보았다. 흙냄새도, 비린 맛도 없었다. 차갑고 깨끗한 물. 절망의 한가운데서, 그녀는 잊혀진 지식과 버려진 폐품을 조합하여 자신의 생명을 구원했다. 첫 번째 과학적 생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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