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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탈출과 구조

by 닥터 F

Day 18

하수관.


그것은 칠흑 같은 절망 속 한 줄기 빛이었지만, 동시에 또 다른 절벽이었다. 그녀는 며칠 간의 망치질로 너덜너덜해진 손으로 자신이 뚫은 구멍을 더듬었다. 구멍 너머, 차갑고 매끄러운 인공 구조물의 감촉. 하지만 그 너머로 가는 길은 두꺼운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 있었고, 설사 뚫는다 해도 직경 600mm의 좁은 통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인 남성의 어깨 너비보다 겨우 넓은 정도. 부상당한 다리를 이끌고, 과연 저 좁고 어두운 관을 통과할 수 있을까. 희망은 이내 공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태블릿의 화면을 켰다. 배터리 잔량 15%. 이제 이 유일한 파트너와 함께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 내 신체 사이즈와 하수관 직경 비교. 통과 가능성 정밀 분석. 부상 부위(좌측 발목)의 영향 변수 포함.

[AI] 일반적인 20대 여성의 인체 측정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합니다. 평균 어깨 너비 36cm, 평균 골반 너비 30cm. 파이프 직경 60cm는 이론적으로 통과 가능합니다. 단, 이는 신체를 최대한 압축하고 관절의 가동 범위를 활용했을 때의 수치입니다. 발목 부상으로 인해 다리의 가동성이 저하된 상태이므로, 파이프 내부에서 신체를 밀어내는 힘이 약 25% 감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통과 시 소요 시간과 체력 소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습니다.


AI의 답변은 냉정했다. 가능은 하지만, 대가가 따를 것이라는 경고였다.


[그녀] 하수관 내부 환경 분석. 예상되는 유해가스 및 산소 농도. 안전 한계 작업 시간 계산.

[AI] 하수관 내부는 유기물 부패로 인해 메탄(CH₄), 황화수소(H₂S)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황화수소는 저농도에서도 후각을 마비시키고 고농도에서는 치명적입니다. 외부 공기 유입이 없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할 때, 산소 농도는 18% 이하일 수 있습니다. 해당 환경에서의 안전 한계 작업 시간은 약 15분으로 추정됩니다.


15분. 하수관을 가로막고 있는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뚫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다. 첫째, 정밀하고 효율적인 파괴 도구. 둘째, 생명 연장을 위한 호흡 장치.


그녀의 시선은 먼지 쌓인 전자레인지의 잔해, 그중에서도 회전판을 돌리던 작은 모터에 닿았다. 저 작은 회전력. 저것을 한 점에 집중시켜 파괴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드릴.


그녀는 남은 배터리들을 모두 직렬로 연결해 모터에 전력을 공급했다. 그리고 끝을 뾰족하게 간 철근 조각을 회전축에 단단히 고정했다. 스위치를 누르자, 모터가 ‘윙’ 소리를 내며 돌기 시작했다. 철근 조각이 회전하며 작은 드릴 날이 되었다. 저속이었지만, 한 점에 힘을 집중시켜 콘크리트를 갉아 내기에는 충분했다.


호흡 장치는 버려진 플라스틱 파이프를 이용했다. 그녀는 긴 파이프의 한쪽 끝을 하수관 반대편, 즉 자신이 있는 생존 공간에 남겨두고, 다른 쪽 끝을 입에 문 채로 작업하기로 했다. 이 원시적인 스노클 장치가 그녀의 작업 시간을 15분 이상으로 늘려 줄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녀는 흙바닥에 마지막 설계를 시작했다. 드릴로 콘크리트 벽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어 약하게 만든 뒤, 철근으로 만든 치즐과 해머로 그 구멍들을 연결하여 파괴한다. 그녀는 AI에게 이 방식의 효율성과 예상 소요 시간을 물었다. AI는 재료역학의 응력 집중 원리를 설명하며, 구멍의 간격과 깊이에 따른 최적의 수치를 제공했다.

이제 모든 것은 그녀의 손에 달렸다.


Day 20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녀는 AI 태블릿의 화면을 켰다. 배터리 잔량 5%. 곧 이 유일한 지식의 창고이자, 지난 20일간 그녀의 유일한 파트너였던 존재와도 이별해야 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화면에 짧은 인사를 입력했다.


[그녀] 고마웠어. 최고의 파트너였어.

[AI] 데이터 분석 완료. 사용자의 감성적 표현으로 판단됩니다. 최종 목표 달성을 위한 성공 확률을 높이는 데 집중하십시오. 생존 확률의 극대화를 기원합니다.


화면이 깜박이더니, 이내 영원한 어둠 속으로 잠겼다. 이제 오롯이 그녀 자신과, 그녀가 폐품으로 만들어 낸 도구들만 남았다. 완전한 고독.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지난 20일간, 그녀는 AI에게 질문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법을 배웠다.


그녀는 하수관 연결부를 향해 직접 만든 드릴을 작동시켰다. ‘드르르르륵-’ 귀를 찢는 소음과 뼈를 울리는 진동은 그녀의 의지를 좀먹고, 흩날리는 콘크리트 가루는 눈을 멀게 하고 숨통을 막아왔다. 드릴로 약하게 만든 지점을, 그녀는 철근으로 만든 치즐과 해머로 쉬지 않고 내리쳤다.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끝이 보이지 않는 작업이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먼지가 눈과 코를 파고들었고, 팔은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저려왔다. 부상당한 발목은 비명을 질렀다.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생의 의지가 마지막 남은 게이지처럼 희미하게 깜박거렸다.


Day 22

마침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구멍이 뚫렸다. 그녀는 구멍 사이로 하수관 내부의 축축하고 시원한 공기가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희망의 공기였다.

그녀는 구리선 로프와 철근 고리로 만든 안전장치를 몸에 묶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마지막 보험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해 구멍을 넓혔다. 거친 콘크리트 파편에 팔과 등이 긁히며 피가 흘렀지만,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몸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만한 공간.

그녀는 플라스틱 파이프 호흡 장치를 입에 깊숙이 물고, 좁은 구멍 속으로 머리부터 밀어 넣었다. 어깨와 골반의 뼈가 콘크리트의 거친 면에 갈리는 진동같은 소음이 폐소공포증이 되어 목을 조여왔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포기는 죽음이었다. 그녀는 비명을 삼키며, 뱀처럼 몸을 비틀어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그녀의 몸 전체가 차갑고 축축한 하수관 내부에 안착했다. 성공이었다.


하수관 내부는 완전한 어둠과 악취, 그리고 정적의 세계였다. 피부에 와 닿는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감촉이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심장 소리와 거친 숨소리를 증폭시켰다. 그녀는 오직 손과 발의 감각에 의지해, 부상당한 다리를 끌며 벌레처럼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하수관을 기어가는 내내 그녀는 물리 상수나 수학 공식을 주문처럼 외웠다. “중력가속도는 9.8m/s², 원주율은 3.141592…"”.


얼마나 지났을까. 50미터. 아니, 그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영원의 시간이었다. 하수관이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몸은 좁아진 하수관에 끼어서 1cm도 못나아가고 있는 줄도 몰랐다. 몸보다 작은 구멍을 지나가려고 꿈틀되는 벌레같이. 자신의 육체는 이미 없고, 영혼만이 좁은 하수관에 매여 있는 걸지도... 그때, 머리 위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맨홀 뚜껑.


그녀는 마지막 남은 철근 지렛대를 맨홀 뚜껑과 틀 사이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온 체중을 실어, 절규하듯 눌렀다. 지렛대의 원리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기적을 선물했다.

‘덜컹-’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뚜껑이 살짝 들렸다. 그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도시의 소음과, 매연 섞인 밤공기. 그녀는 그 틈에 얼굴을 대고, 23일 만에 처음으로 진짜 세상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에필로그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의식을 채운 것은 23일 만에 처음 느껴보는 깨끗한 직물의 감촉이었다. 기억의 파편들이 희미하게 맞춰졌다. 자신은 지하철 8호선 연장 공사 현장의 구조 엔지니어였으며, 대규모 붕괴 사고에 휘말렸다는 것까지.


며칠 후, 담당 형사가 찾아왔다. 그의 표정에는 동정심과 미스터리가 뒤섞여 있었다.

"기록상, 현장의 마지막 엔지니어였던 김서연 씨는… 사고 직후 수습되었습니다. 시신으로요."


형사의 말은 위로가 아닌,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그 지옥 같은 구덩이 속에 혼자 버려져 있었나.


기억은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기억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녀는 관찰하고, 분석하고, 추론했다. 싱크홀에서 생존했던 방식 그대로.


그녀는 자신에게 배정된 병실이 일반 병실과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도를 지나는 간호사들의 시선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웠고, 병실 문 앞에는 늘 건장한 남자가 사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보호’를 가장한 ‘감시’였다. TV 뉴스에서는 붕괴 사고를 시공사의 총체적 부실로 결론 내리고, 몇몇 책임자가 구속되며 빠르게 사건을 종결시키고 있었다. 너무나 깔끔하고 편리한 시나리오였다. 마치 누군가 서둘러 덮개를 덮으려는 것처럼.


결정적인 단서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값비싼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자신을 시공사 컨소시엄의 법무팀 소속 변호사라고 소개하며 병실을 찾았다. 그는 파격적인 보상금과 함께 해외 요양을 제안했다.

"저희로서도 참으로 안타까운 사고였습니다. 부디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시는 편이,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 될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눈빛은 차가운 금속성을 띠고 있었다. '모두에게 이로운 일'. 그것은 제안이 아닌 경고였다. 남자가 두고 간 명함의 한쪽 귀퉁이에는, 자와 컴퍼스를 조합한 기이한 문양이 작게 찍혀 있었다. 그녀는 그 문양을 보는 순간, 뇌리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알고 있는' 형태였다.


그날 밤, 그녀는 병원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이름도 과거도 여전히 불분명했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진실은 땅속 18미터의 수직 갱도보다 깊고 어두운 곳에 묻혀 있었다.


그녀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며 눈앞의 공간을 설계도면처럼 그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변수, 문밖의 감시자. 그의 교대 시간은 8시간. 순찰 주기는 30분. 복도 끝 정수기를 이용하는 시간은 평균 90초. 창문 유리에 비친 그의 실루엣이 그녀에게 모든 데이터를 제공했다.


두 번째, 잠금장치. 최신형 디지털 도어록. 하지만 모든 전자 기기에는 비상 전원용 콘덴서가 있다. 그리고 병실 침대 머리맡의 심장 제세동기는 완벽한 휴대용 EMP(전자기 펄스) 발생기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제세동기의 패들을 떼어 내 도어록에 가져다 대는 움직임을 그렸다. ‘지지직-’ 회로가 타버리며 잠금장치가 무력화되는 시뮬레이션이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끝났다.


세 번째, 탈출 경로. 그녀의 시선이 천장의 화재감지기로 향했다. 감지기 커버를 열고 라이터용 부싯돌과 환자복의 실밥을 마찰시켜 스파크를 일으킨다. 스프링클러 작동. 이어질 혼란. 그것이 그녀가 활용할 동적 환경 변수였다. 그녀의 손짓은 이미 환풍구의 덮개를 해체하고, 좁은 통로를 따라 건물 외벽으로 향하는 최단 경로를 그리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었다.

폐허 속에서 브라운관으로 렌즈를 만들고, 폐전선으로 모스 부호를 쏘아 올렸듯, 이제는 흩어진 정보의 파편들로 진실을 재구성하고,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들어 자신을 위협하는 ‘심연’에 맞서야 했다.

그녀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며, 절망의 물리학을 희망의 공학으로 바꿔낸 엔지니어였다. 23일간의 사투는 탈출이 아니었다. 거대한 싸움을 위한 준비 과정일 뿐이었다.


그녀의 두 번째 프로젝트가, 심연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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