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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탈출 시도와 위기

by 닥터 F

Day 12

그녀는 지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로 결심했다. 침묵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것은 느린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물과 식량, 최소한의 안식처를 확보한 지금, 그녀는 수동적인 생존을 넘어 능동적인 탈출을 시도해야 했다. 미약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쏘아 올려야 했다.


그녀는 지난 며칠 간 정성 들여 풀어낸 구리선을 길게 이어 임시 안테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가장 길고 곧은 철근 끝에 안테나를 묶어, 벽의 높은 균열에 비스듬히 세웠다. 문제는 신호를 만들고, 그 신호를 증폭시켜 이 깊은 지하 감옥을 뚫고 나갈 힘이었다.


[그녀] 저전력으로 고전압 발생 방법. 라디오 주파수 송출 가능성.

[AI] 보유 자원 중 전자레인지의 변압기(Microwave Oven Transformer, MOT)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MOT는 저전압 교류를 수천 볼트의 고전압으로 변환 가능합니다. 이를 이용해 스파크 갭 송신기(Spark-gap transmitter)의 원리를 응용한 원시적 전파 발생이 가능합니다.


[그녀] 스파크 갭 송신기?

[AI] 스파크갭 송신기는 전기 스파크 를 통해 전파를 생성하는 폐기된 무선 송신기 유형입니다. 스파크갭 송신기는 최초의 무선 송신기 유형이었으며 1887년부터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무선 전신 또는 "스파크" 시대, 즉 무선 의 첫 30년 동안 사용된 주요 유형이었습니다.


[경고] 극도로 위험합니다. 변환된 고전압은 치명적이며, 회로 구성 오류 또는 신체 접촉 시 감전으로 인한 즉각적인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절연 처리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또한, 연속적인 신호를 보내기 위한 발진 회로 구성이 필요합니다. 기본 회로도를 제공합니다.


AI의 화면이 섬뜩한 붉은색 경고 메시지로 번쩍였다. ‘즉각적인 사망’. 그 단어가 그녀의 심장을 차갑게 옥죄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엔지니어의 지적 호기심과 생존자의 절박함이 공포를 밀어내고 그녀를 움직였다. 허공에 스케치하듯이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만드는 것 같았다. 전력 흐름, 취약한 연결부위 등 시스템의 '속살'이 그녀에게는 보이는 듯 했고, 그녀의 손은 차가운 공기와 긴장감으로 미세하게 떠는 듯 했다.


한참이 허공을 매만지던 그녀는 전자레인지의 묵직한 변압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리고 AI가 제공하는 가장 기초적인 발진 회로도를 보며, 컴퓨터 부품에서 떼어낸 저항과 콘덴서, 그리고 폐기물 더미에서 찾아낸 작은 스위치를 조합했다. 전원은 얼마 남지 않은 건전지들을 직렬로 연결해 만들었다. 허공에서 손짓할 때와는 다르게 그녀의 손은 일말은 떨림도 없었다. 그녀는 전기가 통할 만한 모든 연결 부위를, 다른 전선에서 벗겨낸 고무 피복 조각으로 여러 겹 꼼꼼하게 감싸 절연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녀는 스위치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심호흡과 함께, 길게 만든 절연 막대로 스위치를 눌렀다.


‘위이이잉-’

변압기에서 날카로운 고주파음이 발생했다. 공기 중에 오존 냄새가 희미하게 퍼졌다. 성공이었다. 그녀는 모스 부호로 국제적인 조난 신호, SOS를 만들어 송출하기 시작했다. 톡, 톡, 톡. 투둑, 투둑, 투둑. 톡, 톡, 톡. · · · — — — · · ·


과연 이 미약한 신호가 18미터의 두꺼운 지층과 암반을 뚫고, 이 혼란한 도시의 수많은 전파 속에서 누군가의 라디오에 닿을 수 있을까. 희망은 먼지처럼 희박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건전지 잔량이 아슬아슬해 질 때까지, 그녀는 몇 시간이고 같은 신호를 반복해서 보냈다. 침묵 속에 잠식당하느니, 소리 내어 절규하는 쪽을 택했다. 이것은 구조 요청인 동시에, 아직 내가 여기에 살아있다는 그녀 자신의 의지 표명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절박한 외침에 답하는 것은 차가운 정적 뿐이었다.


Day 14

전파가 닿지 않는다면, 직접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18미터의 수직 벽을 올려다보았다. 절망적인 높이.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새로운 계산이 시작되고 있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힘의 원리를 이용해야 한다.


그녀는 도르래 시스템을 구상했다.

AI는 도르래의 개수와 줄의 연결 방식에 따라 힘이 어떻게 분산되는지, 기계적 이득(Mechanical Advantage)의 원리를 복잡한 다이어그램으로 설명해주었다. 고정 도르래는 힘의 방향만 바꿀 뿐이지만, 움직도르래는 힘을 절반으로 줄여 준다. 이론상, 네 개의 도르래를 최적으로 조합하면 그녀의 체중을 4분의 1로 줄여 등반이 가능했다.


그녀는 이제 숙련된 장인이었다. 그녀는 철근 몇 개를 벽의 단단한 균열에 쐐기처럼 박아 흔들리지 않는 고정점을 만들었다. 구리선을 여러 겹 꼬아 만든 로프는 제법 튼튼했다. 버려진 플라스틱 파이프 조각들을 매끄럽게 다듬어 만든 도르래는 제법 부드럽게 돌아갔다.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로프에 몸을 실었다. 몸이 스르르 떠 올랐다.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 성공의 예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녀는 한 뼘 한 뼘, 벽면의 작은 돌기를 밟으며 상승했다. 1미터, 3미터, 5미터… 지하의 풍경이 발아래로 멀어졌다. 희망이 손에 잡힐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끼이이이익-’


그녀의 무게와 마찰력을 온전히 견디고 있던 최상단의 철근 고정점이, 금속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내며 휘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스템 전체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녀의 몸이 허공에 내동댕이쳐졌다. 짧은 비명과 함께 시야가 빙글 뒤집혔다.

쿵.


다행히 추락 지점은 모래와 흙이 쌓여 있던 곳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왼쪽 발목에서 뇌까지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뼈가 부러진 것은 아니었지만, 인대가 심하게 손상된 것이 분명했다.


고통 속에서 그녀는 AI에게 응급처치 방법을 물었다. 화면에는 RICE(Rest, Ice, Compression, Elevation) 요법이 떠올랐다. 그녀는 차가운 지하수를 천에 적셔 발목을 감쌌다. 얼음은 없었지만, 지하의 냉기가 붓기를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곧은 철근과 천 조각으로 발목을 단단히 고정했다.


물리적 탈출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그녀의 몸과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다. 이제 그녀는 부상당한 짐승처럼, 이 지하 동굴 속에서 꼼짝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희망의 정점에서 추락한 절망은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웠다.


Day 16

실패는 육체의 고통보다 더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왼쪽 발목에서 시작된 통증은 뇌까지 비집고 올라와 그녀의 이성을 좀먹었다. 한때 생명의 소리였던 물방울 소리는 이제 관 뚜껑에 못을 박는 소리처럼 들렸고, 어둠은 포근한 장막이 아니라 살아있는 포식자처럼 그녀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녀는 휘어진 철근을 보았다. 그녀의 계산, 그녀의 논리, 그녀의 자부심이 저렇게 흉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철근을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멍청한 자신을 향한 혐오였다. 그녀는 손에 잡히는 흙덩이를 벽에 집어 던졌다. '퍽' 하는 무기력한 소리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텅 빈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북동쪽 벽의 균열에 꽂혔다. 물이 스며 나오던 바로 그곳. 어쩌면 저 너머에 다른 공간이, 다른 세상이 있을지도 모른다.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뚫고 나간다.

새로운 가능성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는 다시 태블릿을 켰다.


[그녀] 소규모 폭발로 암석 균열 확장 방법. 제어 가능한 방식.

[AI] [경고] 폭발물 제조는 극히 위험하며, 밀폐된 공간에서의 실행은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제어 불가능한 폭발, 유독가스 발생, 구조물 붕괴의 위험이 있습니다.

원론적인 화학 반응을 안내합니다. 특정 건전지의 전해질(염화암모늄 등)과 세제에 포함된 산화제를 혼합하면 급격한 가스 발생 반응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밀폐된 용기 내에서 반응시킬 경우, 압력 상승을 이용한 소규모 파열이 가능합니다.


폭발. 그 단어가 주는 파괴적인 힘. 그녀는 망설였다. 하지만 대안이 없었다. 그녀는 AI의 경고를 상기하며, 가장 안전한 방법을 강구했다.

그녀는 가장 단단한 철근의 끝을 콘크리트 바닥에 몇 시간 동안 갈아 날카로운 쐐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긴 철근 지렛대를 이용해 균열의 가장 약한 부분에 쐐기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건전지를 분해해 얻은 전해질과 세제 가루를 작은 플라스틱 통에 넣고, 그 틈새에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고 약간의 물을 부어 반응을 시작 시킨 뒤, 재빨리 동굴 반대편으로 몸을 피했다.


‘피식-’ 하는 소리와 함께 통이 부풀어 오르더니, ‘펑!’ 하는 작은 파열음이 울렸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소리였다. 실패인가.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그녀의 머리 위 천장에서 미세한 진동과 함께 흙먼지가 후드득 떨어졌다. 소규모 폭발의 진동이 이 싱크홀 전체의 취약한 구조를 뒤흔든 것이다. 새로운 위험. 이 방법은 너무 위험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더 정밀하고, 더 안전한 방법이 필요했다. 파괴가 아닌, 창조적인 해체. 기계공학적인 혁신이.


며칠 간의 고된 망치질 끝에, 마침내 쐐기가 균열의 반대편을 관통했다. 그녀는 틈새로 손전등을 비췄다. 어둠 너머, 매끄러운 곡면을 가진 인공 구조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외부로 연결된 하수관. 마침내 탈출구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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