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심연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초고층 빌딩의 펜트하우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깔끔하고 정제된 공간의 중심에 '아키텍츠'의 집단 지도체제인 시노드(The Synod) 소속 아르콘(리더)인 권석열이 서 있었다. 그는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었다. 잘 짜인 거대한 회로 기판의 데이터 흐름을 확인하는 엔지니어처럼, 혹은 수술을 앞둔 외과 의사가 환부를 살피듯, 그는 자신이 설계한 시스템의 완벽한 작동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의 뒤로 소리 없이 다가온 남자가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를 띄웠다. '리스크 관리 총괄'이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그의 표정에는 미세한 균열이 일고 있었다.
"보고드립니다. 지하철 8호선 붕괴 현장에서 발견된 '변수'가 사라졌습니다."
권석열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도시의 야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라진 게 아니라, 스스로 경로를 이탈한 것이겠지. 과정은?"
"병원 통제 시스템의 기록입니다."
홀로그램 화면에는 병원의 설계도와 김서연의 탈출 경로가 붉은 선으로 그려졌다. 심장 제세동기의 전자기 펄스를 이용해 디지털 도어록을 무력화시키고 , 화재감지기를 작동시켜 혼란을 유발한 뒤 환풍구를 통해 탈출하는 , 상식을 벗어난 시뮬레이션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든 것이 그녀가 병실 안에서 허공에 그리던 설계 그대로였다.
"보안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었군. 우리의 예측 실패다."
권석열의 목소리에는 분노나 당혹감이 없었다. 오히려 지적 호기심마저 느껴졌다. 그는 마치 흥미로운 버그 리포트를 읽는 개발자 같았다.
"18미터 지하에서 23일간 생존. 오프라인 상태의 AI 태블릿을 이용한 생존 시스템 구축. 그리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현장의 폐기물만을 이용한 탈출. 데이터상으로 그녀는 사고 직후 사망 처리된 엔지니어 김서연이 맞지만 , 그녀가 보여준 능력은 기존의 데이터를 완전히 벗어납니다. 이건… 기존의 인류에게서는 관측된 적 없는 수준의 응용 능력입니다."
권석열이 마침내 몸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차가운 금속성을 띠고 있었다.
"죽은 조직에서 예측 불가능한 바이러스가 살아남아 뛰쳐나갔다."
그는 허공에 손짓했다. 새로운 홀로그램 창에 체스와 컴퍼스가 조합된 기이한 문양 , '아키텍츠'의 인장이 떠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야.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드는 새로운 종(種)의 엔지니어다. 우리가 통제해야 할 세상에 나타나서는 안 될, 가장 위험한 변수지."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사냥개가 아니라 외과 의사가 필요하다. '새니테이션(Sanitation)' 팀을 투입해. 목표는 파괴가 아니다. 첫째, 생포 후 분석. 저 능력의 근원을 알아내야 한다. 둘째, 분석이 불가능할 경우, 모든 흔적을 포함하여 완벽하게 '소독'할 것. 우리가 만드는 영원한 안정의 시대(Aetās Stabilis)에 예측 불가능한 버그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권석열의 명령은 최종적이었다. 도시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예측 불가능한 변수 '김서연'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정교하고 무자비한 수술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아키텍츠'의 펜트하우스와는 다른 차원의 시간이 흐르는 곳. 수 세기의 역사를 간직한 어느 고서점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비밀 서고. 최첨단 기술의 냉기 대신, 오래된 종이와 잉크의 냄새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곳은 인류의 '자유의지'와 '영성'을 수호하는 비밀 조직, '커스토디안'의 수많은 성소 중 하나였다.
'기록관(The Archivist)'이라 불리는 노인이 낡은 가죽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선 그림자가 나지막이 보고를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데이터가 아닌, '소문'과 '분위기'를 전달하는 음유시인에 가까웠다.
"서울에서 '그들'의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은밀하게 움직이는 '새니테이션' 팀이 소집되었습니다."
기록관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기가 미묘합니다. 얼마 전, 서울 지하철 8호선 붕괴 사고가 있었습니다. '아키텍츠'의 컨소시엄이 주도한 공사였죠. 너무나 깔끔하게, 시공사의 부실로 결론 났습니다. 마치 서둘러 봉합한 상처처럼요."
기록관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아키텍츠'는 비합리성을 '버그'로 보고 제거하려 하지. 그들의 일 처리는 언제나 차갑고 완벽해. 하지만 완벽함은 부자연스러운 법. 그 부자연스러움 뒤에는 언제나 감춰진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새니테이션' 팀은 그들이 만든 완벽한 시나리오에서 빠져나온 '유령'을 잡기 위한 사냥개들이다. 이번에도 유령이 나타난 게로군."
"저희가 확보한 비공식 정보망에 따르면, 사고 현장에서 공식 사망자 외에 신원 불명의 생존자가 있었다는 '속삭임'이 있습니다.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그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기록관이 마침내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수많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지켜본 자의 깊이를 담고 있었다.
"그들은 인류를 거대한 재앙에서 구원한다는 명분 아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질서의 낙원을 꿈꾸지.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네. 예측 불가능성, 심지어 고통과 갈등마저도 인류를 위대하게 만드는 신성한 가치라는 것을. 그들이 만드는 세상은 영혼 없는 기계의 낙원일 뿐이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로 향했다. 수많은 고서들 사이에서 유독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들의 예측 AI '오라클'은 수많은 변수를 계산해 미래를 예측하겠지. 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마지막 변수 앞에서는 언제나 길을 잃을 것이다. 어쩌면 그 유령은, 그들의 완벽한 방정식에 균열을 낼 최초의 변수일지도 모르겠군."
그림자가 물었다.
"어떻게 움직이겠습니까?"
"우리의 눈과 귀를 깨울 시간이다. 과거 '아키텍츠'를 취재하다 모든 것을 잃은 기자가 하나 있었지. 최진아. 그녀는 아직 진실의 냄새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작은 바람을 불어넣어 주게. 저울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심연에서 돌아온 엔지니어는 보호할 가치가 있는 변수라고. 그 엔지니어가 그들의 대의를 위한 도구가 될지, 혹은 우리조차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길을 열지는 알 수 없지만 , 이야기가 시작되도록 멍석을 깔어주는 것이 우리의 일이지."
기록관의 손가락이 텅 빈 책의 첫 장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아키텍츠'가 또 하나의 '버그'를 수정하려 할 때, '커스토디안'은 새로운 이야기의 첫 문장이 쓰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의 가장 높은 곳과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의 존재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