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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첫 번째 조각, 흔들림 없는 방패 1

이강혁

by 닥터 F

도시의 밤은 거대한 회로기판처럼 차가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김서연은 그 회로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한 채, 버려진 부품처럼 그림자 속을 떠돌았다. 그녀의 새로운 거처는 재개발이 멈춘 구도심의 낡은 인쇄 공장 3층이었다. 잉크와 종이, 곰팡이가 뒤섞인 퀴퀴한 냄새가 공간을 채웠지만, 그녀에게는 병원의 소독약 냄새보다 견디기 쉬웠다.


그녀는 생존의 전문가였다. 지하 18미터의 감옥에서 오직 폐품과 지식만으로 생명의 불씨를 지켜낸 경험은, 도시라는 거대한 미궁 속에서 자신을 감추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공장 폐기물 더미에서 찾아낸 구리선과 낡은 납축전지, 깨진 태양광 패널 조각으로 최소한의 전력을 확보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색 무광 금속 케이스, 그녀의 유일한 파트너인 AI 'Lumen'을 위한 생명줄이었다.


"Lumen, 현재 외부 전력망과의 연결 상태는?"

[분석 중... 인근 공공 와이파이 신호 간헐적 포착. 데이터 패킷 손실률 78.4%. 안정적인 연결 불가.]


Lumen의 감정 없는 중성적인 기계음이 허공에 울렸다. 김서연은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생존은 가능하다. 하지만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병원에서 탈출한 직후부터, 보이지 않는 눈들이 자신을 쫓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아키텍츠'라 불리는 자들. 그녀를 공식적으로 '사망' 처리하고, 지하에 매장했던 자들이다. 그들의 추적은 집요하고 체계적이었다. 혼자서는 언젠가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리기 전에, 변수를 추가해야 한다.'

그녀는 생존이라는 문제 앞에 새로운 방정식을 세웠다. 자신은 시스템을 분석하고 해체하는 '창'이다. 그렇다면, 외부의 물리적 충격을 막아줄 '방패'가 필요했다.


"Lumen. 가설을 설정한다."

[명령 대기 중.]

"추적자, '아키텍츠'는 나를 제거하려 한다. 그 원인은 '지하철 8호선 연장 공사'와 관련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그 사건으로 인해 '아키텍츠'에게 적의를 가진 인물이 존재할 것이다. 조건 설정. 첫째, 해당 사건의 피해자 혹은 관계자. 둘째, 공식 발표에 의문을 제기한 인물. 셋째, 물리적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특수 능력을 보유한 인물. 이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을 검색해."

[알겠습니다. 제한된 네트워크를 통해 데이터베이스 검색을 시작합니다.]


푸른빛의 미니멀한 홀로그램 UI가 어둠 속에서 빛나며, 텍스트와 단순한 도표들이 빠르게 스크롤되기 시작했다. 김서연은 이제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반격을 위한 첫 번째 조각을 찾기 시작했다.

시간은 모래처럼 흘러내렸다. Lumen는 불안정한 네트워크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인터넷의 망령처럼 흩어진 정보의 파편들을 집요하게 긁어모았다. 삭제된 뉴스 기사의 캐시 파일, 오래된 블로그 포스트, 익명 게시판의 댓글, 경찰의 내부망에 잠시 올라왔다 사라진 보고서의 흔적까지.


김서연은 그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단순한 텍스트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시스템이 자신의 결점을 숨기기 위해 게워낸 토사물과 같았다. 진실을 덮으려는 힘과, 그 아래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진실의 작은 조각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정보들의 상관관계를 그렸다. 인물과 사건, 시간을 잇는 거대한 설계도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Lumen의 홀로그램에 하나의 이름이 붉은색으로 점멸했다.

[조건 부합 확률 89.3%의 인물 특정. 이름: 이강혁.]

화면에 그의 프로필이 데이터 형태로 펼쳐졌다.


이름: 이강혁 (30대 후반)

경력: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중사 전역. 이후 민간 군사 기업(PMC) '블랙타이거' 소속으로 다수 분쟁 지역 파견. 현장 전술, CQC, 폭발물 처리 전문가.

관련 기록: 지하철 붕괴 사고 당일, 비번이었으나 현장 인근에 있다가 구조 활동에 참여. 이 과정에서 PMC 후배인 '이진우' 사망.

특이사항: 사고 이후, 언론 인터뷰 및 경찰 조사에서 '붕괴 단면이 일반적인 피로 파괴의 형태가 아니다'라며 공식 발표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 이후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습격당한 후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잠적.


"사라졌다고."

김서연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네. 공식적인 거주지, 금융 기록, 통신 기록 모두 6개월 전을 기점으로 소멸. 사회적 유령 상태입니다.]

"아니."

그녀는 화면에 떠 있는 이강혁의 사진을 응시했다.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그 안에 맹수 같은 기운을 품고 있는 눈빛. 왼쪽 눈썹 위의 낡은 흉터가 그의 삶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스스로를 지운 거다. '아키텍츠'의 시스템으로부터."

그는 자신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시스템의 위협을 감지하고, 그 망에서 스스로를 잘라낸 자. 하지만 그 방식은 달랐다. 김서연이 기술과 논리로 자신을 숨겼다면, 이강혁은 그림자와 폭력의 언어로 자신을 감쌌을 터였다.

[그를 어떻게 찾으시겠습니까?]

"그는 유령이 아니야. 단지 다른 주파수에서 살고 있을 뿐."

김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주파수를 찾아내야지. Lumen, 그의 과거 동선과 습관, PMC 시절의 훈련 데이터를 기반으로 현재 예상 활동 반경을 재구성해. 특히,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접근 가능한 장소들을 중심으로."

[알겠습니다. 재탐색을 시작합니다.]

김서연은 낡은 창문 너머로 펼쳐진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유령을 사냥하러 가야 했다. 자신과 같은 또 다른 유령을.


이강혁을 찾는 일은 낡은 지도에서 보물이 숨겨진 위치를 찾는 것과 같았다. Lumen가 제시한 예상 활동 반경은 서울의 낙후된 공업 지대와 뒷골목들을 거미줄처럼 엮고 있었다. CCTV가 없는 곳, 디지털 결제 대신 현금만 통용되는 곳, 타인의 시선을 본능적으로 피하는 자들이 모여드는 곳.


김서연은 며칠 밤낮으로 그 거미줄 위를 걸었다. 후드티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도시의 소음 속으로 자신의 존재를 녹여냈다. 그녀는 마침내 단서를 잡았다. 불법 개조 총기를 거래하는 브로커들이 모이는 한 지하 주차장에서 '미친 멧돼지'라 불리는 남자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이다. 그는 의뢰받은 물건을 회수하는 해결사였고, 절대 뒤를 남기지 않는 실력자였다. 인상착의는 이강혁과 일치했다.


그를 찾은 곳은 철거 직전의 낡은 상가 건물 지하에 위치한, 간판도 없는 파이트 클럽이었다. 녹슨 철문을 열자, 땀과 피, 값싼 술 냄새가 훅 끼쳐왔다. 사방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고, 링 위에서는 두 명의 남자가 짐승처럼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이강혁은 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싸움꾼이 아니라, 이 무법지대의 '질서' 그 자체처럼 보였다. 그는 링 위의 싸움에는 관심 없다는 듯, 낡은 렌치로 오토바이 엔진 부품을 닦고 있었다. 과묵하고 행동이 앞서는 남자. 복잡한 설명보다는 명확한 사실을 선호할 터였다.


김서연은 인파를 헤치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등장은 소란스러운 공간의 모든 소음을 순간적으로 집어삼켰다. 땀과 근육으로 가득한 이곳에, 마르고 하얀 얼굴의 그녀는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였다.

이강혁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낮고 거칠었다.


"볼일 없으면 꺼져. 여긴 네가 올 데가 아니야."

"이강혁 씨.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그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의 눈이 그녀를 훑었다. 경계심과 의심이 가득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누구지?"

"김서연입니다. 지하철 붕괴 사고의 생존자."


그녀는 일부러 자신의 정체를 먼저 밝혔다. 그것이 그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이자,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열쇠였다. 이강혁의 표정에 미미한 변화가 스쳤다. 그는 렌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전으로 다져진 단단한 근육질 체격이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따라와."

그는 클럽 구석의 작은 사무실로 그녀를 이끌었다. 방음 처리된 작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정적 속에서 이강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살아있었다니 용하군. 뭘 원해서 날 찾아왔지? 국가의 위로금이라도 대신 전해주러 왔나?"

목소리에는 세상에 대한 깊은 냉소가 배어 있었다.

"아니요. 거래를 제안하러 왔습니다."

김서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 사고,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아키텍츠'라는 조직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겁니다. 그들은 증거를 인멸하고, 관련된 모두를 제거하고 있어요. 저처럼, 그리고 당신처럼."

이강혁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낡은 책상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김서연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길 잃은 강아지를 보는 듯한 연민과,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를 보는 듯한 경멸이 뒤섞여 있었다.

"아키텍츠? 무슨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름이군."

"소설이 아닙니다. 현실이에요. 당신의 후배, 이진우 씨도 그들이 만든 시스템의 희생자입니다."

이진우의 이름이 나오자, 이강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냉소로 자신을 무장했다.

"그래서? 그 대단한 비밀 조직을 상대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고작 당신 혼자서? 당신 같은 책상물림이 뭘 할 수 있는데?"

그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김서연은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저에겐 그들의 시스템을 분석하고, 약점을 찾아내 무너뜨릴 수 있는 기술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리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어요. 당신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저의 방패가 되고, 저는 당신의 복수를 위한 칼이 될 겁니다. 이것이 제 제안입니다."

"복수?"

이강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 당신은 복수가 뭔지 몰라. 그건 당신처럼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설계해서 되는 게 아니야. 피와 살이 튀는 진짜 싸움이라고. 당신의 그 비현실적인 계획은 책상머리에서나 가능한 소리야."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는 깊은 체념이 서려 있었다. 그는 이미 싸워봤고, 져봤던 것이다.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한 개인의 저항이 얼마나 무력한지 뼈저리게 느껴본 자의 얼굴이었다.


"돌아가. 그리고 다 잊어버려. 유령처럼 조용히 살아. 그게 당신 같은 사람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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