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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두 번째 조각, 세상을 뚫는 창

by 닥터 F

폐쇄된 지하철역은 그들의 첫 번째 아지트가 되었다. '아키텍츠'의 눈을 피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이강혁은 주변을 수색해 외부로 통하는 모든 경로를 확인하고, 침입에 대비한 간단한 부비트랩을 설치했다. 그의 움직임은 한 치의 낭비도 없는 전문가의 그것이었다.


김서연은 휴식을 취하는 대신, 곧바로 다음 계획에 착수했다. 그녀는 낡은 역장실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Lumen를 활성화시켰다. 푸른 홀로그램 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추적은 곧 다시 시작될 겁니다. 그들은 이번 습격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더 정교한 방법으로 접근해 올 거예요. 시간이 없습니다."

이강혁은 그녀의 지치지 않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이제 막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좀 쉬는 게 어때?"

"휴식은 비효율적인 시간 낭비입니다. 위협이 제거되지 않는 한, 진정한 휴식은 불가능해요."

그녀는 Lumen의 홀로그램 키보드를 조작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라는 '방패'를 얻었으니, 이제 다음 조각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겐 정보가, 그리고 그 정보로 세상을 뚫을 '창'이 필요해요."


그녀의 논리는 명확했다. 아무리 '아키텍츠'의 시스템을 무너뜨려도, 그들의 범죄를 세상에 폭로하고 공론화하지 않으면, 그들은 또 다른 이름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Lumen, 검색 조건 변경. 지하철 붕괴 사고 이후, '아키텍츠' 혹은 그 유관 기업의 비리를 취재하다가 부당하게 해고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된 언론인을 검색해. 특히, 진실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유형으로."

[알겠습니다. 관련 데이터베이스 교차 검증을 시작합니다.]


이강혁은 불을 피우기 위해 나무 조각을 모으다 말고, 홀로그램에 몰두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자신이 단순한 복수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거대한 비밀 결사에 맞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지휘관은 상처 입은 눈을 한, 차갑고도 뜨거운 천재, 김서연이었다.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자기 일에 집중했다. 그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렸다. 더 이상 어둠 속에 숨어 지내는 유령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심연의 엔지니어가 휘두르는 가장 날카로운 방패였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그의 피를 다시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Lumen의 정보 필터링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 사이, 김서연은 이강혁이 구해온 통조림으로 허기를 채우고, 잠시 눈을 붙였다. 하지만 그녀의 잠은 깊지 않았다. 꿈속에서도 그녀는 무너지는 구조물과 복잡한 수식 사이를 헤맸다.


"김서연. 검색 완료."

Lumen의 호출에 그녀는 기계처럼 벌떡 일어났다. 홀로그램 화면에는 한 여성의 프로필이 떠 있었다.

이름: 최진아 (40대 초반)

경력: 시사 주간지 '진실의 눈' 탐사보도팀 팀장. 다수의 특종 보도로 명성을 얻음.

특이사항: '아키텍츠'의 핵심 계열사인 '태성 건설'의 비자금 의혹을 취재하던 중, 허위 기사 유포 혐의로 고소당함. 언론사의 자체 징계위원회에서 해고 처리. 이후 프리랜서로 활동했으나, 모든 언론사로부터 외면받고 사실상 업계에서 퇴출.

성향 분석: '팩트'와 '진실'에 대한 집착이 강함. 타협을 거부하고, 외압에 굴하지 않는 성격. 현재는 작은 번역 사무소를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음.


"최진아..."

김서연은 이름을 읊조렸다. 프로필 사진 속의 여성은 지적이고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그 눈빛에는 깊은 냉소와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이강혁이 다가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기자라. 이런 사람을 어떻게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지? 이미 모든 걸 잃고 불신만 남았을 텐데."

"그녀는 정보를 원할 겁니다.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팩트'를요."

김서연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최진아 기자는 불신으로 가득 차 있겠지만, 진실에 대한 갈증은 누구보다 강할 겁니다. 우리는 그녀가 목말라하는 바로 그 '진실'이라는 샘물을 가지고 있어요. 그녀가 거부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면 됩니다."


그녀는 Lumen에게 명령했다.

"Lumen, 내가 지하 감옥에서 복원했던 설계도의 일부와, 이번 추격조가 사용한 특수 장비의 분석 데이터를 정리해. 최진아 기자 외에는 누구도 해석할 수 없도록, 암호화된 데이터 패킷으로."

[알겠습니다. 데이터 패키징 및 암호화 작업을 시작합니다.]


김서연은 최진아의 번역 사무소 주소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계획은 이미 다음 단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방패를 얻었으니, 이제 예리한 창을 손에 넣을 차례였다.

다음 날 새벽, 김서연과 이강혁은 폐쇄된 지하철역을 나섰다. 최진아의 사무실은 오래된 오피스텔 건물 7층에 있었다.


"내가 먼저 올라가서 상황을 보지. 당신은 밑에서 대기해."

이강혁이 말했다.

"아니요, 같이 갑니다."

김서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최진아 기자는 전투 인력이 아닙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위압감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제 정체를 밝히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겁니다."

"고집하고는 ..."

이강혁은 투덜거리면서도 그녀의 판단을 따랐다.


최진아는 곰팡내와 묵은 담배 연기가 뒤섞인 낡은 사무실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한때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탐사보도 전문 기자의 현재는 초라했다. 거대 기업 '태성 건설'의 비리를 파헤치던 그녀의 펜은 부러졌고, 진실을 외치던 목소리는 세상의 외면 속에 잠겼다. 이제 그녀는 흥신소나 다름없는 작은 인터넷 언론사에서 근근이 연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낡은 철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림자처럼 나타난 한 여자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잿빛 후드티를 뒤집어쓴 채, 감정이 지워진 무표정한 얼굴. 김서연이었다.


"의뢰는 받지 않습니다."

최진아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김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책상 위로 작은 USB 저장 장치 하나를 던졌다.

"의뢰가 아닙니다. 테스트입니다."

"테스트?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최진아의 미간에 짜증이 서렸다. 김서연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직도 '진실'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지. 부러진 펜을 다시 고쳐 잡을 용기가 있는지에 대한."

최진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지만, 김서연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USB를 집어 들었다. 노트북에 꽂자, 화면에는 암호 입력 창이 나타났다.

"암호는?"

"당신이 세상에 내놓지 못했던 마지막 기사의 제목."

최진아의 손가락이 순간 멈칫했다. 5년 전, '태성 건설'의 내부 고발자와 접선했을 때 그가 자신을 지칭했던 코드네임. 온몸을 던져 진실을 알리려 했지만, 거대한 힘에 의해 짓밟히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남자. 그녀의 기억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이름.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타자를 쳤다.

[ I C A R U S ]


암호가 풀리자, 세 개의 파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친절한 설명 따위는 없었다. 그저 무미건조한 데이터 조각들뿐이었다.

첫 번째 파일은 **자재_성분_보고서_final.pdf**였다. 8호선 붕괴 현장에서 수거된 콘크리트 잔해의 성분 분석표. 정상 기준치에 한참 미달하는 저급 자재 목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문서의 배경에는, 그녀의 인생을 망가뜨린 **'태성 건설'**의 워터마크가 유령처럼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두 번째 파일은 **Equipment_List_7.txt**였다. 'XM-25C 소음기', 'K-14 개량형 야간 조준경'… 민간에서는 절대 구할 수 없는 군용 특수 장비의 목록만 의미 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마지막 파일 **symbol.png**를 열자, 화면에는 아무런 설명 없이 자(尺)와 컴퍼스가 조합된 기이한 문양 이미지만 덩그러니 나타났다.


최진아는 말없이 세 개의 창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정보의 파편들이 거대한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보고서) '태성 건설'의 부실시공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이건… 의도적인 학살에 가깝다. 그리고 이 데이터를 가진 여자는 사건의 가장 깊은 곳에 닿아있다.

(장비 목록) 이 장비들은 경찰이나 조폭 수준이 아니다. 국가기관, 혹은 그 이상의 힘을 가진 군사 조직이다. '태성 건설'은 그저 실행 부대에 불과하다. 그 뒤에 진짜 '몸통'이 있다.

(문양)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상징… 이 기이한 문양. 이게 바로 그들의 '이름'이겠군.


최진아는 떨리는 손으로 낡은 서랍을 열어 구겨진 담뱃갑을 꺼냈다. 불을 붙여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연기가 폐부를 찌르듯 파고들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뇌세포가 깨어나는 감각. 진실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탁한 연기 너머로 김서연의 얼굴이 보였다. 최진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태성 건설'이 아니었군. 그건 꼬리일 뿐이야."

그녀는 노트북 화면의 문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서, 이 '아키텍츠'라는 놈들은… 대체 정체가 뭐지?"


김서연의 설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최진아는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그 한마디가 그녀의 실력을, 그녀가 왜 김서연에게 필요한 '창'인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김서연은 처음으로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심연 속에서, 두 번째 동료를 찾은 순간이었다.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김서연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시스템에 대항할 '방패'를 가졌습니다. 이제 그들의 거짓을 깨뜨릴 창이 필요합니다. 그 창이 되어주십시오."

"내가 왜 당신들을 믿어야 하지?"

최진아가 마지막 남은 의심의 조각을 꺼내 보였다.

"이 자료들이 진짜라는 보장도 없잖아. 당신들이 '아키텍츠'의 또 다른 파벌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이 자료를 가지고 지금 당장 경찰서로 가보시죠."

김서연의 대답은 간단했다.

"만약 당신이 경찰서를 나서기도 전에 제거된다면, 이 자료는 진짜일 겁니다. 물론, 살아남을 확률은 1% 미만이겠지만. 그게 가장 확실하게 '팩트'를 검증하는 방법이겠죠."


그녀의 말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누구보다 최진아의 성향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최진아는 입을 다물었다. 김서연의 말이 맞았다. 이 정도의 정보를 손에 쥔 순간, 자신은 이미 안전지대를 벗어난 것이다. 돌아갈 다리는 불타 없어졌다.

최진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주 성격 나쁜 방식이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대한 도시가 발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저 도시의 기반을 떠받치고 있는 시스템이, 거대한 거짓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제 '알아버렸다'. 기자로서, 진실을 아는 자로서, 침묵은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었다.

"좋아."

그녀가 돌아보며 말했다.

"이 미친 싸움에 동참하지. 하지만 분명히 해두는데, 난 동정이나 연민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야. 오직 진실을 위해서야."

김서연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원했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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