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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하 Sep 18. 2017

떼굴떼굴 돌멩이 정하

굴렀다가, 멈췄다가,

 그동안 어느 하나 쉽게 넘어가는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와 관련된 모든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되어야 그 다음 단계를 밟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거슬릴 수 있겠지만, 나는 '이해가 안된다'는 말을 굉장히 자주 한다. 그것도 내 속이 좁아서, 이해 정도의 폭이 좁아서일 수도 있다.


 가끔은 모든 것을 이해해야 그로써 받아들이는 내 모습에 화가 나기도 했다. 내가 내 모습에 화가 날 지경이니 나의 선에서 이해가 안되면 뭣도 아닌 것인가, 모든 것을 자기 기준에 맞춰야 하나, 라는 생각을 주변 사람들이 한번쯤 했을 법하다.


 나는 이런 내 모습이 굉장한 단점이라고 생각했다. 쉽게 어떤 말이나 현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모습이 답답했던 것이다. 그냥 유연하게 '그건 그렇고, 저건 저렇다' 라고 생각하면 편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쉽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에라 모르겠다. 나는 원래 그런 인간인가보다' 라고 정의하려던 찰나, 누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었다.


정하는 떼굴떼굴 굴러가는 돌멩이 같아.


이끼가 끼지않는 돌멩이를 말한건 아니지만, 그림이 재밌어서 가져왔다


 떼굴떼굴, 자신의 몸에 흠집을 내가며 계속 굴러가는 돌멩이. 어쩌면 그렇게 굴러가지 않아도 다른 방법으로 어딘가로 갈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바닥과 바닥의 모난 부분과 다른 것들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굴러간다. 처음에는 아까도 말했듯이 '나만 그런가' 싶었다. 나만 별 것 아닌일에 발끈하는 것 같았고, 나만 사소한 것에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욱하는 성격을 좀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몇번씩이나 했다.


 하지만 그 돌멩이처럼, 나는 굴러가면서 굴러가지 않으면서 얻을 수 없는 나름의 장점도 많이 갖추게 되었다. 우선, 정말 '아닌 것'에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아졌다. 내 권리가 불합리하게 침해당할 때나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면 가만히 있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 사소한 일로부터 돌멩이에 흠집이 나더라도 계속 굴러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서>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마치 원에서 한 부분이 빠진 돌멩이 같다. 모난 부분 때문에 그냥 구르지 않고 떼굴떼굴 굴러간다.


  그리고 그렇게 굴러가면서, 굴러가지 않았다면 멈추지 않았을 곳에서 많이 멈추게 되었다. 멈추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느리게 갈 수도 있었고, 뒤쳐질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때 잠깐 멈춰서 그동안 굴러온 길을 바라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멈춰서 바라보면서 그동안의 내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굴러가면서 굴러가는데 그치지 않고, 여러 순간에 멈춰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 정말 좋은 것 같다.


 그렇게 돌멩이처럼 굴러가면서 나는 나에게 닥치는 여러 상황에 대한 '나만의 기준'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투쟁하는 삶으로 볼 수도 있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음...대체 왜 저렇게 까지 할까'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이었지만, 그렇지만 이게 내 모습이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계속 굴러가면서 나는 글을 쓰고, 계속 뭔가를 느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굴러가면서 부딪히는 것이 돌멩이의 경험일 것이고, 그 경험들이 모여 작은 역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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