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 넓은 어떤 분의 조언을 듣고
그렇게 글 쓸 거면 글 쓰지 않는 것이 좋아.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들었던 말이다. 대학 입시 때문에 논술학원에 다닐 때, 자기소개서로 고민하고 끙끙 앓을 때, 내가 대학에 와서 전공 과제로 쓴 글을 보고 누군가는 내가 쓴 글을 자신의 기준대로 재단하고 평가했다.
처음에는 내 글에 정말 무언가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 평소에 글을 쓸 때 도입 전개 마무리와 같은 글의 전개를 정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쓰다 보니, 글에 형식과 체계가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그런 평가를 들은 이후로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스스로를 낮췄던 것 같다. 나는 글을 체계적으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야, 누군가는 내 글을 싫어하고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와 같은 생각들을 수도 없이 거치면서 말이다.
그렇게 글쓰기를 멈추니 한동안은 편했다. 글을 원체 쓰지 않으니 누군가에게 내가 쓴 글을 평가받을 일이 없었다. 어쩌다 어떤 글을 쓰더라도 누군가에게 판단받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생각하고 쓴 글에 대해서 누군가 내릴 좋지 않은 평가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그때의 나는 모든 이를 만족시키는 글을 원했던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의 구미에 맞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글만을 쓰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모든 이를 위한 글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 불필요한 욕심이라는 것을 안다. '나'라는 사람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인 나의 글쓰기를, 모든 이에게 맞춰서 생산할 의무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나니,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 졌다. 누군가는 내 생각에 동의하고 공감할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나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이후였다. 그리고 내가 어떤 글을 썼다고 해서, 누군가 내 글을 판단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 하나하나를 내가 모두 수용할 필요는 없다는 가치관을 가질 수 있었다.
브런치에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도 그런 시기였다. 누군가 내 글을 싫어하고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글 쓰는 것을 잠깐 멈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하듯이, 나도 내 글을 쓸 자유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내가 모두를 만족시키는 글을 쓸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그렇게 글 쓸 작정이면 글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는 오지랖 넓은 어떤 분의 조언을 듣고, 글을 손에서 놓고, 방황하다가 다시 돌아온 곳은 글 쓰는 공간이었다. 역시 글쟁이의 적(蹟)은 내가 나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매개체로서 글쓰기로부터 느끼는 편안함, 그리고 나의 생각에 대한 확신인가 보다. 글 쓰는 것을 이토록 좋아하는 나에게 글 쓰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게 해 준 오지랖 넓은 그분께 감사인사를, 그리고 이 글을 함께 동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