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험설계사 홍창섭 Jun 24. 2020

Part 4 Best Rookie

챔피언이 아니어도 괜찮아

                                                                                                                                                          

대구에서 함께 한 10명의 친구 형 동생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사실 푸르** 내에서도 다른 지점이나 다른 분들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른 채, 그냥 다들 3W 한다고 들었고,

그리고 우리는 특채이기도 하고 겨우 11주 영업을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 설계사보다 훨씬 더 잘해야 한다고 들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정말 서로 믿고 의지하는 동기들임에도 묘한 경쟁 심리 같은 것도 있어서, 정말 엄청난 성과를 냈다.

당시에는 그 성과와 결과들이 대단한 줄 몰랐었다.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돌아보면, 입사할 때부터 어느 정도 보험영업 일을 생각하고 온 사람들과 나처럼 진짜 좋은 일로만 생각하고

관리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로 나뉘었던 거 같다. 결과의 차이는 당연했다. 그렇지만 다들 정말 참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워낙 잘 살아왔던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이 설명도 없이 내미는 청약서에 그들을 믿고 서명을 해주는 사람들이 매주 끊이지가 않았다.


물론 설명도 없이 내미는 청약서라 할지라도, 정말 고객을 위해 우리끼리는 최선의 준비를 하긴 했었다.

어느 누구도 내 개인적 이익을 위한 가입이나 설계를 하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루키 2주 차가 시작되었다.

역시 제대로 과정을 준수해서 계약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절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강매, 부탁은 이미 해버렸고, 벌써 첫날부터 청약을 쉼 없이 하는 특별반(?) 동기들이 사람을 주눅 들게 했다. 이번 주는 어디서 3W를 해야 하나, 죽을 것 같이 힘든 하루하루였다.


그래도 철저히 교육받은 덕분인지 내 지인들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꼭 생명보험의 가치를 전하고, 조금이라도 가입시키겠다는 각오는 있었다. 사실 다른 건 알지도 못했으니까 오직 그 생명보험 말고는 이야기해줄 것이 없었다.


제일 친한, 그래도 가장 만날 수 있고, 왠지 그래도 계약을 해줄 것 같은 고향 친구들을 찾아갔다. 

머릿속에는 내가 감동받았던 거처럼, 눈물을 흘리며 계약을 할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과 달랐다. 아마 서툴고, 준비 부족 탓이었겠지만, 평일 대낮에 뜬금없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나에게, 아무리 친구라도 차디찬 거절만 있었다.


'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남겨진 가족들이 어찌 될지 생각해봤어? 큰일 난다'


'갑자가 보험회사 가더니 와 죽는다는 이야기만 하노? 그런 건 그때 생각하면 되고, 죽는 이야기 할 거면 그냥 가라' '니 와이라고 사노? 무슨 일 있나? 영업 안 한다 해놓고 역시 니도 이리 부탁하러 왔나? '


믿었던 절친들도, 가족들도, 뜬금없는 생명보험이야기에 냉정한 거절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라도 친구를 보험이라는 악의 구렁텅이에게 꺼내고자, 그만하라고 오히려 회유를 하기도 했다.



'죽는 건 됐고, 실손보험이나, 원금 보장되는 저축이나 있으면 하나 갖고 오너라. 그건 넣어줄게'

'종신보험 요새 넣는 사람 어디 있어? 그런 거 말고, 저축이나 재무설계 이런 거 해야 한다'


생명 보험의 가치를 이야기하면, 다들 인정하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라 믿었던 내 순진한 믿음과 달리 아무도 내 말에 동의해주지 않는 고통의 나날의 연속이었다. 

당장 계약은 해야 하는데, 만날 사람도 없고, 만나는 사람은 아무도 그냥 안 해주고.. 너무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 다니던 전 직장은 정말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모두가 말렸음에도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라 해도, 

내 마음속에도, 보험설계사가 주는 불편한 감정, 나를 쳐다볼 차가운 시선을 전 직장 동료한테서 

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 직장을 찾아가지 않으면, 당장 만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대구에서 산 시간도 짧고, 딱히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쌓고 산 것도 아니었기에, 더 이상 만날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에 정말 싫어도 찾아가야 했다. 


또 한편으로는 용기 내서 찾아가기만 하면, 내가 잘 이야기만 하면, 어느 정도는 계약을 쉽게 할 수 있으리란 

기대도 있었다.

그래도 회사가 인원이 적은 회사도 아니고,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서, 보험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더 

잘 알 것만 같은 엘리베이터 점검을 하는 현장직 인원만 해도 수백 명이며, 내가 도움을 많이 주고, 그래서 

나를 항상 반겨주고 고마워하던 협력사 대표님들과 그 직원까지 합치면 엄청나고, 


함께 업무를 봤던 팀원들과 동료 사원들이 있었으니까. 그중에 정말 일부만 해도, 베스트 루키 정도는 금방 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또 나만의 착각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서울 본사 지원팀 소속의 대구에서 근무하는 남부 총괄 팀장이라는 특수성이  딱히 대구지사나 협력사 사람들과 강한 소속감이나 유대감이 높지 않았다.

대구 사람들하고도 안 친하고 서울 본사 사람들하고도 딱히 친하지 않았다. 

같이 어울려 노는 걸 즐겨하지 않는 내 성격의 문제도 컸다. 


전국의 각 본사 지사장님들과 협력사 대표님들과 업무적으로는 수시로 만나고 정말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내가 보험회사 왔다고 해서 그냥 계약을 해줄 만큼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은 없었다.

오 00 엘리베이터에서 유능하고, 나름대로 힘이 있던 나를 좋아했던 거지, 

보험 설계사로서의 나를 기꺼이 받아주는 사람들이 많지가 않았다. 


나는 정말 그런 마음이 아니었는데, 정말 최선을 다해 도왔고, 그 덕분에 너무 업무가 가중되고, 내가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 너무 높아져서 그만둔 이유도 있는데, 그 대가가 이렇게 차가울 줄은 몰랐다. 


'창남 씨는 워낙 일을 잘하니까 거기서도 잘할 거야. 내가 안 해줘도 되잖아?'

'창남 씨 우리 회사 월급 짠 거 알잖아요. 담에 좀 상황 좋아지면 이야기해요'

'창남 씨 내가 지금 너무 바쁘니까, 보험이야기는 담에 해요'


내가 자신이 없고, 부끄러워서도 있지만, 나를 피하기 급급했고, 불과 얼마 전까지 다니던 회사 사무실과 동료들인데도, '보험설계사 함부로 들어오지 마라'는 경비원과 동료들의 농담이 진심으로 아팠다.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사람들이.. 내가 진짜 어떻게 도와줬는데. 하는 억울한 생각이 밀려왔다. 


 그래도 그런 고통의 시간이 지난 후, 불평을 하면서도 결국은 친구들과 가족, 동료들이 하나둘 서명을 해주었다. 정말 웃긴 건 계약은 내가 할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은 안 하는 경우가 많고, 생각도 안 했던 사람들이 계약을  할 때가 많았다. 참 모르는 게 사람 마음이고, 한편으로는 결국은 타이밍인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잘난 척하던 나도 어쩔 수 없이 결국 지인에게 강매하는 나쁘고 무능력한 설계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참 자존심 상하고 힘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믿고, 계약을 해준 고객님들이 더 감사했고, 이분들은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살고 있다. 

그렇게 매일매일 상담을 하고 계약을 하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영업인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푸르**에서 보낸 10년의 시간 중 가장 일에만 집중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거 같다.

아침 7시 미팅에서부터 시작해서 밤에도 새벽에도 항상 사람들이 있었다. 상품도 모르고 설계도 몰랐었기에,


그래도 무작정 팔 수는 없어서 24시간 삼삼오오 모여서 설계하고, 준비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점에 항상 힘이 되어주는 동기들이 있어서 너무 좋았다.


 하루는 정말 3W를 할 곳이 없어서, 고민을 하고 있으니, 함께 일했던 형님이, 자기 아는 편의점이 있는데, 거기라도 가보라고 해서, 새벽 2시에 거기 알바를 붙잡고 AP(어프로치 - 초회 상담)를 했었다.


새벽에 밤샘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을 상대로 보험영업을 하는 용기가 있었던 시절이다.

내가 다짜고짜 막 이야기를 하니, 안돼 보였는지 만 원짜리라도 있음 하겠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내가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세일즈 프로세 서상 아닌 것 같다고, 유지율도 걱정하면서, 내가 결국 실컷 이야기해놓고 내가 계약은 안 했던 거 같다.


또 하루는 소개를 받고 급한 마음에 밤샘 영업을 하는 감자탕집에 새벽 4시에 찾아가서 사장님 일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사장님이 무슨 보험 상담하러 이 시간에 오냐면서, 쫓겨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용감했던 시절이었다.


 나처럼 관리직인 줄만 알고 들어온, 매주 3W가 힘들었던 한 형님과 새벽 밤거리를 무수히 걸어 다니면서,

영업 잘하는 다른 동기들이 참 부럽기도 하고, 더 용기 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믿음은 있었고, 보험을 잘 모르는 신입이지만, 누구보다 가장 양심적인 나한테

하는 게 낫다는 확신도 있어서, 그렇게 한주 한주를 말 그대로 버티면서, 높은 성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간신히 3w를 지속할 수 있었고 11주 3w를 완성 후에 12월 마지막 워킹 날 베스트 루키를 달성하면서 나의 첫 보험영업, 그리고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했던 보험영업을 끝냈다.


 그래도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때 총 48건의 계약을 했는데, 그 뒤에도 못해본 고실적이었고, 돌아보면 결국 대부분 우리 가족과 고향 절친들이 해준 계약이었다. 우리 가족이 많다는 게 정말 큰 다행이었고, 그냥 나니까, 믿고 서명해준 10명의 고향 절친들과 지인들이 있어서 달성한 베스트 루키이지만, 이런 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으면서도, 부끄러운 훈장 같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 같은 사람도 보험회사 베스트 루키를 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참 신기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인 1월에 처음 계획대로 우리 10명은 세일즈 매니저가 되기 위해 세일즈 매니저 합숙 교육에 들어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Part 2 보험회사 입사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