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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험설계사 홍창섭 Jun 24. 2020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김 0 0

챔피언이 아니어도 괜찮아

                                                                                                                            

인터넷 구직 사이트를 통해, 처음으로 김 00 씨를 만났다.


고등학교 때 전교회장 출신이었고, 나름 좋은 대학교 나왔기에, 좀 더 좋은 직장을 다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저 그런 중소기업에서 혹사를 당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고, 본인도 그게 답답해서, 새로운 직장을 찾고 있던 중 나와 인연이 닿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그 친구의 이력서를 봤을 때부터 뭔가 강한 끌림이 있었다.

꼭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고, 보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그 친구에게, 정성스럽게 내 마음을 담은 이메일을 보내고, 수차례 연락 끝에,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나보다 3살이나 어린 동생이었지만, 첫인상은 한참 형 같았고, 이미 피곤에 절어, 생기가 하나도 없는 검은 얼굴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쉴 새 없이 울리는 핸드폰이었다.


자동차 2차 협력업체에서 품질, 자재 등 정말 중요하고 바쁜 일을 전담하던 친구였기에, 게다가 일 욕심도 있고, 능력이 있다 보니, 더 일이 몰렸을 테고, 진지한 이야기를 할 틈도 없이 클레임 및 출하 등을 요청하는 전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래도 하나하나 친절하게 대응을 하고, 아직 살아있는 눈빛을 보면서, 이런 친구가 이런 곳에서 에너지를 쓰지 말고, 함께 일을 하고 싶다는.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그때 나이로는 이제 겨우 30대 초반이었는데, 피로 탓인지, 손이 극심하게 떨렸었고, 이대로 두면 무슨 큰일이 날 것 같아서, 우리 일이 아니더라도, 이 직장에서 구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기도 했다.


본인도, 그래도 예전에 학생회장 출신이고, 능력도 있는데, 아무 희망도 없어, 이렇게 열심히만 사는 것에 대한 불만이 컸고, 나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면서, 정말 힘들게 몇 달에 걸쳐서 CIS1,2,3을 진행할 수 있었다.


잠깐 30분을 만나기 조차 힘들고, 만나는 동안에도 기본 수십 통의 전화를 받는 친구가 주말도 없이 일을 하는데, 2시간이나 되는 설명회를 듣는 게 쉽지 않았고, 당일날 약속이 펑크가 나기도 부지기수였지만, 정말 어떡하든 그 직장에서는 구해주고 싶었고, 꼭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했다.


'부지점장님, 제가 정말 거기 가면 잘할 수 있을까요?'


'저도 정말 이렇게 살기 싫고, 내 능력 맘껏 펼치면서 살고 싶은데,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게 너무 겁이 너무 나요.'


흔들리고 불안해하던 친구에게 나는 솔직히 잘할 수 있다던지, 이렇게 교육하겠다던지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보기엔 워낙 성실하고, 의지도 강하고, 참 잘할 것 같은 좋은 자질이 보이지만, 사실 잘할지 못할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도 경험도 짧고 많이 부족해서, 잘 모르지만, 오기만 하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최선을 다해 지원을 하겠다. 근데 내가 00 씨를 봤을 때, 그냥 이대로 가면, 무슨 일 생길 것 같다고, 이미 수년째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몇 시간 안 자고, 매일 수십, 수백 통의 전화를 받으며, 그렇게 몸과 정신을 혹사시켰고, 일은 더 줄어들 가망도 없고, 이미 지금도 가만히 눈도 못 마주치고, 손을 저렇게 떨 만큼 심신이 망가졌는데, 이건 아니라고, 여기 와서 일을 안 해도 되니까, 회사에는 미안하지만 정착지원금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와서 그냥 쉬라고, 단 한 달 만이라도 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라고 했다.




'아마 00 씨는 지금 너무 지쳐서 여기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와야 하는데, 여기 오면 퍼질 것 같아 걱정도 되는데, 지금 쉴 수가 없으니, 여기서 쉬시라고, 00 씨한테는 전혀 손해가 없으니까, 내가 다 안고 갈 테니까, 나 믿고 그냥 제발 좀 쉬어라고,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라고 했다.



왜 그렇게 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바보같이 일만 하고 착취당하는 그 친구를 볼 때마다 너무 화가 나고 답답했다. 어떡하든 그곳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고, 내 진심을 느꼈던 그 친구도 정말 고마워하며, 입사 결심을 하고, 힘들게 채용과정을 다 통과한 후, 회사에 사표를 내고, 입사를 위해 업무 마무리를 진행했다.



예상대로 회사에서 워낙 큰 비중을 차지하던 친구의 퇴사는 쉽지 않았다.

온갖 협박과 회유가 시작되었고, 파격적인 인사 이동과 월급 인상도 제안받았다.

다른 업체에서 제안이 들어온 것도 많았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와이프의 격렬한 반대였다.

그래도 그 업계에서는 인정받고, 상대적으로 좀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있으며, 이대로 지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굳이 전혀 잘할 것 같지도 않은 일을 하려는 남편을 보내주지 않았다.


사실 그 친구는 모든 결정권이 없는, 하다 못해, 정말 얼마 안 되는 용돈만으로 생활을 하는, 집에서는 아무런 권한이 없는 일만 하는 가장이었고, 처갓집에 얹혀사는 상황에서 처갓집의 극심한 반대를 뚫기에는 너무나 약한 친구였다. 수차례 가정 방문을 시도하고, 와이프에게 편지도 엄청 썼었다.


'남편을 조금만 믿어 달라고, 내가 정말 열심히 도와주겠다고, 한 번만 나를 만나 달라고'


어떤 연락도 거부당했고, 만남을 거절했다. 분명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번 나를 만나면 조금은 이해가 되거나, 남편이 간절히 원하는데, 아직 젊은데, 저렇게 까지 반대를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면서도,

남편을 2-300만 원 버는 돈벌이 기계로 무시하는 모습이 너무 화가 나기도 해서, 더 간절히 이 친구를 데리고 오려고 했었고, 이 친구도, 어떡하든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오겠다고 하면서, 회사도 정리하고, 최종 입사를 결정한 후 회사에서 입사자들에게 개최하는 월컴 파티에 가족들 다 같이 오면, 다른 우리 회사의 문화를 보고 나면, 조금은 누그러 지겠지, 그리고 잘하면 된다면서, 그렇게 입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이 친구 입사만 신경 쓰고 챙겼던 거 같다. 그 고생 끝에 결국 입사가 결정되니 너무 좋았다.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던 웰컴파티 전날, 이 친구와 함께할 미래가 너무나 행복했던 그 전날, 새벽에 00 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와이프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그렇게 심한 건 아니지만, 본래 우울증이 심했는데, 결국 보험일 한다고 하니 못 참고 약을 먹었다고, 이렇게까지 반대를 히나 정말 미안하고 속상하지만 일단 웰컴 파티랑 입사는 못할 것 같다면서 울먹였다.




머리가 아찔해지고, 가습이 너무 답답했지만, 나도, 저렇게 까지 반대하는 가족들을 외면할 수는 없기에,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이 친구가 오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세일즈 매니저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 달에 라이프 플**로 턴을 했고, 그렇게 두어 달의 시간이 지난 후, 이제는 라이프 플**로서, 당시 생명보험이 하나도 없었던 00 씨에게 생명보험을 권하기 위해 회사로 찾아갔다.




다행히 몇 달 만에 만난 00 씨는 너무나 얼굴이 편해 보였다.

사표를 던졌던 덕분에, 이제는 한결 편한 부서로 옮겨졌고, 사장님이 약속대로 월급도 올려주었다고,

못 가서 아쉽지만, 자기는 이게 맞는 거 같다고, 그래도 자기를 인정해주고 이렇게 변할 수 있게 해 줘서 너무

고맙다고 했다.


나도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했다. 이제는 좀 여유가 있으니 좀 더 자주 볼 수 있겠다면서, 좋은 형 동생으로 지내자 했고, 보험은 정말 하고 싶지만, 자기가 관리하는 통장이 하나도 없어서, 와이프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와이프한테 나나 푸르덴셜 보험 이야기하는 건 여전히 조심스러우니 가입이 어렵다고 했고, 대신 다른 회사 동료들을 소개해주었다.


사정을 알았기에, 여전히 걱정은 되었지만, 그래도 좀 편해졌다 하고, 지금 만족해하는 00 씨를 보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저녁 00 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갑자기 내가 너무 보고 싶다고, 맥주 한자 하자고 했다. 언제나 너무 반가운 친구이기에 기꺼이 만났고,

늦은 시간까지 못다 한 이야기도 하고, 정말 이렇게 저녁에 맥주도 마실수 있어서 너무 좋다면서,

00 씨는 얼마 뒤 둘째 돌잔치하니까 그때 오라는 이야기와 앞으로 더 자주 보기를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고 며칠 후, 00 씨가 소개해준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 아침 00 씨가 세상을 떠났다고, 혹시 모르실 거 같아 안내드린다고 이야기했다.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는데, 그냥 저녁에 자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머리가 어질 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현실 앞에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장례식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그렇게 보고 싶던 영정사진 속의 00 씨와 배우자를 만날 수 수 있었고, 어떤 관계인지를 묻는 유가족께, 내 신분을 밝히고는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잠깐의 인사를 하고, 차마 그곳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로 도망치듯 장례식장을 떠났다.



내가 괜히 열심히 잘살고 있는 친구 흔들어서,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더 빨리 떠난 건 아닌지, 이로 인해 남겨진 가족들의 상실감은 얼마나 클지, 아니면 그때 보내주지 못해서 떠난 건 아닌지 후회할 유가족들이 짊어진 마음의 짐에 대한 미 안 함 등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 몰려왔다.


직업이 생명보험을 하는 라이프 플래너 인지라, 그때 어떤 생명보험도 없는 걸 알았는데, 너무나 쉽게 가입을 포기해서, 한 한 푼의 보험금을 줄 수도 없는 게 너무 미안했고, 그때 억지로라도 조금이라도 준비시켰다면, 좀 나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이제 돌잔치를 할 둘째가 떠오르고, 너무 힘든 나날이 시작되었다.



그 친구의 이른 죽음에 어쩌면 조금은 나 때문 일 것 같은 죄책감, 내가 계속 죽는다고 이야기해서 그런가 하는 후회, 또 한편으로는 정말 냉정하지만 어차피 세상을 떠날 거면, 여기 왔다가 지금 세상을 떠났다면, 내가 정말 더 힘들었을 텐데, 하는 안도감도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가 기억이 안 날 만큼 힘든 나날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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