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PART 4. 내맡김. 8장 치유의 길

by 라이프퀘스트 한

8장 치유의 길

학창 시절, 연필을 깎다 손을 베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피가 배어 나오고 따끔했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습니다.


며칠 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상처는 저절로 아물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상처는 낫는 법이지”하고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살아 있게 하는 생명력이 스스로 치유의 길을 따라 움직인 순간이었습니다.


살아있음은 우리를 살리고자 스스로 호흡하며,

맥박을 뛰게 하며,

세포 수준의 손상을 복구하고 조직을 재형성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기에,

살아있음도 이 세상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살아 있게 하는 생명력과 살아 있는 우리는

나눌 수 없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의지를 내세우지 않아도

몸은 살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스로를 다독이고, 살피고, 회복시켜 갑니다.


십여 년 전, 허리 디스크가 파열되었을 때

나는 수술 대신 자연치유를 택했고,

몇 달 동안 걷기와 재활에만 온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통증은 의식을 머리에서 몸으로 되돌려 놓았고,

나는 오직 몸의 느낌과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통증 속에서도 숨을 쉬고,

발바닥이 땅을 딛는 느낌을 확인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걷는 것은 나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통증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몸이 아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사업도, 관계도, 미래의 계획도

하나씩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두려움이 매일같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건 오직 걷는 것뿐이었습니다.


걷는 동안만은 그 두려움이 잠시 잦아들었습니다.

묵묵히 걸었고, 걸을 때마다

몸은 분명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습니다.


그 단순한 반복이 생각을 잔물결처럼

가라앉히며 마음을 비워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깊은 피로 속에서

나도 모르게 되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알아서 하시겠지”

그 한마디가 내맡김의 시작이었습니다.


몸의 회복은 마음의 회복으로 이어졌고,

마음의 회복은 내면의 평온을 열어 주었습니다.


돌아보면 그 모든 시간 동안 몸이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뼈가 부러진 자리가 이전보다 단단해지듯

치유는 ‘되돌림’이 아니라 새롭게 빚어냄입니다.

살아있음은 상처를 메우는 데서 멈추지 않고,

다음 삶을 더 잘 견딜 수 있도록 구조 자체를 다시 만듭니다.


과학은 이를 재형성이라 부르고,

전통의 지혜는 고통을 통해 자비와 통찰이 익어 간다고 말합니다.


언어는 달라도 가리키는 바는 하나입니다.


내맡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있음이 가는 길을 막지 않는 태도입니다.


머리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통제하려는 습관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 몸에 흐르는 생명력을 믿고 맡겨 보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존재하게 했으니, 그가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해야 할 일은 생각과 감정을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있음은 나름의 흐름과 리듬 속에서

우리를 이끌고, 알려주고, 회복시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삶을 통제하려 들지 않고, 결과를 붙잡으려 애쓰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이 이끄는 방향을 바라보며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할 때에도,

살아있음은 당신을 품은 채,

다음 걸음과 섬세한 치유의 길을 미리 열어 두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삶은 더 이상 통제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살아있음은 가장 친절한 동반자,

가장 지혜로운 길잡이가 됩니다.


더 이상 묻지 않아도 괜찮아집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가?”

“이 선택이 맞는가?” 하고 재차 묻던 의문은 잠잠해지고,

대답은 이미 흐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이제 압니다.

통증은 나를 눌러 꺾은 적이 없습니다.

통증은 나를 살아있음의 자각으로 되돌려 놓은 문이었습니다.

그 문을 통과하는 동안 몸은 스스로 치유했고,

나 자신은 내려놓는 법을 배웠으며,

신뢰는 더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맡김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살아있음이 가는 길을 막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