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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서 Nov 24. 2018

엄마는 안 웃겨?

주말 내내 딸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티격태격 하지만 그래도 딸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다. 나는 도서관, 블록방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 딸은 도서관에서는 DVD를 보거나 블럭방에서는 레고를 한다. 딸과 같이 있으면 상쾌한 청량제 같은 웃음소리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

나도 저 나이 때는 저렇게 웃음이 많았지. 어쩌다가 이렇게 웃음이 줄어들었을까? 갑자기  어린 시절 웃다가 부모님한테 쓸데없이 웃는다며 혼난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어렸을 때 꽤나 웃음이 헤펐다. 그때는 그냥 무엇이든지 재미있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한번 터진 웃음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고 부모님은 쓸데없이 웃는다며 싫은 내색을 하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웃을 일이 많지 않다. 그때 다 웃어버린 건 아닌가 싶다.

뭐가 웃기는지 온몸을 흔들며 웃던 딸이 내가 웃지 않는 걸 보며 “엄마는 안 웃겨?”라고 물었다. “어. 안 웃겨”라고 말했더니 딸이 삐친다. “엄마는 딸이 웃을 때 무조건 같이 웃어야 하는 영혼 없는 사람이 아니야. 내가 웃길 때 웃는 거야”라고 반박하려다가 갑자기 예전에 같이 근무한 팀장님에게 들었던 엄마에 대한 정의가 떠올랐다. 그 팀장님은 "엄마란 동네 아줌마랑 욕하고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다가도 자기 자식을 보면 웃을 수 있는 존재야"라고 말했다. 결혼 전에 들은 말이지만 여전히 가슴에 남아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랑하는 자식 앞에서는 분노도 한순간에 웃음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엄마다. 딸에 대한 엄마의 무한한 사랑이 느껴진다.

예전에 회사에서 웃음치료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정말 싫어하는 강의였다. 밑도 끝도 없이 크게 소리쳐 웃으라고 한다. 그룹별로 돌아가며 웃고는 어느 그룹이 더 크게 웃었는지 비교한다. 심지어 누구를 지목해서 앞으로 나오라고 하고는 억지로 웃게 시키기도 했다. ‘억지로 웃어라’고 하는 그 억지 강의에 짜증과 화를 내면서도 강의 장을 박차고 나가지 못했다. 소심하게 강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거짓 웃음을 입가에 피우며 그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나다. 그런데 딸을 위해 웃는 웃음이야말로 진정 내가 의지적으로 웃어야 하는 웃음이다.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딸이 재차 “엄마는 안 웃겨?”라고 묻자 머뭇거리다가 억지로 입 꼬리를 들어 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재미가 없어지는 거다. 익숙하고 판에 박힌 듯 돌아가는 세상은 새롭지 않다. 새롭지 않으면 흥미와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관심이 없으면 재미도 느끼지 못한다. 반면 어린아이에겐 모든 것이 새롭다. 모든 것이 진귀한 구경거리로 비치고 재미있다. 웃음이 없어졌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도 없어졌다는 거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어린아이의 눈을 닮고 싶다. 가족이 마주 앉아 밥한 끼 먹고, 부모님의 의미 없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이와 놀아줄 수 있는 소소한 일상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에 같이 웃을 줄 아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쓸데없이 웃는다고 뭐라고 하던 부모님은 늙었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 어른이 된 형제자매가 부모님 집에 모이면 웃음이 없다. 웃음이 사라진 형제자매가 모이는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에는 TV 소리만 들렸다. 딸이 태어나고 집안 분위기가 달라졌다.


딸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크다. 한 사람이 부리는 마술, 그 마술의 중심에는 딸의 허튼 웃음이 있다. 엉뚱 발랄한 아이의 행동을 보면 헛웃음이 터지곤 한다. 그렇게 웃다 보면 또 웃게 된다. 그러다 보면 웃을 일이 생긴다. 웃다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따라 웃는다. 그렇게 웃는다. 딸이 웃는 실없는 까르르 소리는 전염되고 어느새 어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딸의 쓸데없는 웃음은 쓸데가 있다. 쓸데없이 웃는 그 모습에 주변 사람들도 자신도 모르게 어이없이 웃게 된다.   

  

참 많이 웃는 아이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세상사는 데 뭐 그리 심각하게 사냐고, 너무 진지하지 말라고, 그냥 웃으며 살아도 한평생, 울고 살아도 한평생이거늘 그냥 웃고 살라’고 웃음을 잃어버린 어른들에게 아이들이 알려주는 것 같다.

딸이 자라서도 마음껏 쓸데없이 웃을 수 있도록 지켜주고 싶다. 내 딸이 그렇게 행복하게 자라게 도와주고 싶다. 성공보다는 많이 웃으며 살라고 말해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 그리고 그 마음 흔들리지 말고 변치 않기를 바라본다.

어느 날 딸이 온몸을 흔들며 웃다가 책상에 머리를 찧었다. 그러면서 말한다. “웃을 때 머리 박으면 하나도 안 아픈데, 울 때 머리 박으면 엄청 아파”라고 말하면서 또 웃는다. 이처럼 딸은 아주 작은 일에도 배꼽이 빠질 듯이 온몸으로 웃어댄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까르르 웃는다. 내가 보기엔 웃을 일도 아닌데 말이다. 웃음이 사라진 내가 보기엔 딸이 쓸데없이 웃는 것 같아 보인다. 어린 시절 부모님처럼.

그렇지만 나는 쓸데없이 웃는 딸이 좋아 보인다. ‘쓸데없이 웃는다’는 말은 웃을 타이밍도 아닌데, 웃을 일도 아닌데 그냥 웃겨서 웃는 거다. 그냥 남들이 보기에는 별일도 아니지만 웃는 거다. 이게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작은 일에, 별일도 아닌 일에 크게 웃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톨스토이의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서 인생 10훈 중 하나가 "웃기 위해 시간을 내라.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다"이다. 웃을 수 있을 때 마음껏 웃으련다. 랄프 왈도 에머슨도 성공의 기준을 이야기할 때 ‘많이 그리고 자주 웃는 것’을 가장 먼저라고 이야기했다. 그냥 많이 웃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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