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ce 08. Dancing Raindrops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에는 비 오는 날도 편견 없이 그저 즐거웠었다. 봄비를 맞으며 학교 가던 돌담길을 따라 쏟아지듯 피어있던 개나리를 보던 것도 즐거웠고, 비바람이 치던 날 튼튼한 장우산을 들고나가 우산을 앞으로 들고 바람을 등지고 서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면 꼭 날아다니는 기분이 나서 신났던 기억도 있다. 우산을 챙겨 간 날도 가끔씩은 친구와 재미로 비를 흠뻑 맞으며 돌아오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이다. 이랬던 나도 어른이 되어서는 비가 그리 반갑지 않았는데, 붐비는 출근길 지하철에 젖은 우산까지 더하면 다른 사람에게 닿을까 그렇게 신경 쓰이고 번거로울 수가 없고, 안 그래도 막히는 도로는 비까지 더하면 지각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무사히 출근을 해도 그칠 줄 모르는 비가 계속 내리면 기분이 축 처지게 마련이고,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를 하루 종일 듣고 있으면, 일하는 내내 일 보다는 졸음과 싸우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렇듯, 나에게도 비 내리는 것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로 지금까지 시간이 흘러온 것이다.
비를 싫어하는 어른이 된 지도 이렇게 한참인데, 요새는 비를 대하는 마음이 조금은 달라졌다. 그 계기는 바로 무지개 때문이다. 어느 여름 오후였는데, 한참 내리던 비가 조금씩 그쳐가고 있었다. 우중충했던 기운이 조금씩 걷히고 해가 나오는 것 같더니, 창밖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우중충했던 하늘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손에 닿을 듯 나지막하게 뜬 무지개가 온 동네를 선명한 빛으로 그림같이 물들이고 있었다. 그 장면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답던지, 무지개가 뜬 그 짧은 시간 동안 해가 넘어가며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이 섭섭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해가 넘어가는 시시각각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온통, 조금은 핑크빛이었다가 어느새 황금빛 노란 기운이 들었다가, 이내는 물감을 쏟은 듯 보랏빛이 되고 끝내 선명했던 그 빛이 아스라이 사라지는 그 마법 같은 과정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마음이 들뜨고 행복으로 가득 찬 기분이 들었다. 분명 매해 봄이나 여름, 어느 비가 온 날 한 두 번쯤은 떴을 무지개일 텐데, 지난 몇 해 동안 딱히 기억이 나는 순간이 없던 것을 보면, 아마도 지난 몇 해 동안 나도 재미없는 어른이 될 뻔한 위험에 처해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무지개를 제대로 감상했던 그날 이후로는 비가 오는 날은 어쩌면 무지개를 볼 수 있을지 기대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무지개가 뜰 것 같은 순간을 알아차리는 능력도 조금 발달했다고 자부한다. 그런 날은 특히 더 무지개 촉각을 곤두세우고, 놓치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무지개가 뜨면 반갑게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마음껏 감상한다. 매번 무지개가 뜨는 것은 아니다 보니 늘 즐겁고 반가운 비일 수는 없겠지만, 비 오는 날들 중 며칠 정도는 어린 시절과 다르지 않은 마음으로 무지개를 기다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위에 소개한 그림은 'Dancing Raindrops'라는 그림이다. 인상 깊도록 아름다웠던 무지개를 보고 난 그날 오후, 해가 넘어가며 시시각각 변화하던 무지개 빛으로 가득 찬 도시를 유쾌하게 그려보고 싶었다. 그림 속에서는 가볍게 내리는 빗속에서 무지개 빛 판타롱 팬츠를 입고, 레트로한 음악에 여유 있게 박자를 맞추는 누군가처럼 그려보았는데, 이렇게 표현해보고 나니 이젠 정말 추적추적 내리는 비도 유쾌한 기분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비가 개이고 창문을 열면 어쩌면 반원으로 선명하게 뜬 예쁜 무지개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