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천국을 꿈꾸는가?
"예수천국 불신지옥"
자주 다니는 지하철 역 광장에는 365일 내내 피켓을 들고 확성기로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다.
피켓에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큰 글씨가 적혀 있고, 그 주변 여백은 알아보기 힘든 글씨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하루 종일 말해 목이 쉰 듯,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다. 스피커는 온갖 잡음을 섞어내며, 시끄러운 버스 소음과 함께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기독교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소리가 들릴 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천국, 가봤나?'
예수님을 믿는 온 세상의 사람들이 천국에 간다면 인구 밀도가 높아져 과연 천국이 천국일 수 있을까? 서울처럼 인구 문제로 시달리게 된다면 우스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친다.
천국은 죽음과 연관이 있다.
사람들은 죽음이란 '무(無)'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무'를 두려워한다. 세상을 살아가며 아둥바둥 쌓아올린 모든 것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한순간에 사라진다. 재물은 물론 내가 낳은 자식들도 내 소유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 죽음이다.
죽음으로 모든 물리적 연결고리가 사라진 뒤에야 우리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임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죽음과 고독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아닐까? 천국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만들어진 장소일지도 모른다. 죽음 뒤에 무언가가 있다고 믿으면 두려움이 덜어질 테니까. 죽어서 가는 곳이 이승보다 평화롭고, 근심 없이 지낼 수 있는 곳이라는 믿음은 우리를 위로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위로한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헤어진 거야."
위로가 될 수도 있지만, 결과에서 거꾸로 돌아보면 좋은 위로라고 하기는 어렵다. 더 나은 만남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현재의 관계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도 있고,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지금의 에너지를 아끼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천국에 대한 개념도 이와 비슷하다. 어차피 기독교를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믿음이 있다면, 지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일까? 물론 성경의 말씀과 교리를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삶을 살아도 죽어서 천국에 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할까?
죽음을 마주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음을 온몸과 온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을 직시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후회 없이 빛날 것이다.
먼 훗날의 천국과 지옥을 논하며 지금 이승의 삶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현재의 삶이 괴로운 경우, 둘 중 하나 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