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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4, 일방통행 삼각관계

말할 수 없는 비밀..

by 라텔씨

시드니에서 생활하던 셰어 하우스는 한국인 형 한 명의 이름으로 계약이 되어 있었다. 그 형은 셰어 하우스에 직접 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정착과 생활을 도왔다. 한 번 들어오면 오랫동안 머물다 가는 사람들이면 좋겠지만, 워킹 홀리데이 이거나, 유학생활 초기에 와서 자리를 잡기까지 짧은 기간 동안만 머무는 사람들이 많았다. 길어봐야 3개월, 짧으면 며칠 만에 나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는 시드니에서 몇 년째 유학 생활 중이었다. 유학생활은 학비부터 생활비까지 한 학기에 몇천만 원씩 들었다. 많은 유학생들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에 시간을 쏟아야 했다. 그는 셰어 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방 3개짜리 아파트에 10명이 살았다. 2층 침대가 2개 들어가는 방에 4명이 함께 생활하고, 모든 공간을 공유했다. 언뜻 생각해 보면 그 많은 인원이 한 집에서 생활하면 무척 불편할 거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생활해 보면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다.


모두 각자의 일상이 있었다. 누구는 새벽에 나가서 오전에 일을 마치고 돌아왔고, 누구는 오전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왔다. 아침부터 밤까지 학교에 있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아예 루틴이 없기도 했다. 욕실을 쓰는 시간, 주방을 쓰는 시간 모두 제각각이어서 겹치는 일이 많지 않았다.

셰어 하우스에 사람들이 사는 첫 번째 목적은 저렴한 숙박비였다. 그 누구도 셰어 하우스에서 분란을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았다. 모두 한마음으로 서로를 배려하며, 양보하고, 이해하려고 애썼다. 가끔 술 취한 룸메이트 때문에 시끄럽고, 프랑스인 거구 룸메이트의 코 고는 소리에 잠 못 이루기도 했지만 모두 착한 친구들이었다. 대부분 착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셰어 하우스를 관리하는 형이 절대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단체 생활에 맞지 않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은 여지없이 퇴출당했다.


남자, 여자 모두 함께 생활하던 숙소라 소소한 연애 에피소드도 많았다. 성격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매일 같이 마주치고, 자주 파티를 하면 없던 감정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젊은 남녀들의 호감은 언어와 국적을 넘어서 피었다 시들었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어느 날 검은 뿔테를 쓴 20대 초의 한국인 여자가 들어왔다. 들어오기 전부터 형은 흐뭇한 미소로 나에게 말했다.


"셰어 하우스 들어오기로 한 애가 예쁘더라.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그는 괜히 들떠 있었다. 검은 뿔테 때문인지 하얀 얼굴이 더 강조되는 외모의 그녀는 무척 밝았다. 예쁘고, 성격도 좋고, 마음도 착했다. 부지런하고, 요리도 잘.. 아니, 자취 생활은 처음인지 요리는 전혀 할 줄 몰랐다.


"이거 같이 먹어."


그는 그녀를 살뜰히 챙겼다. 20대 후반이던 그는 오랜 유학생활로 다져진 특급 자취생이었다. 요리, 빨래, 청소 그의 손을 거치면 모든 것은 일사천리였다. 셰어 하우스의 완벽한 살림꾼이었다. 요리를 잘할 줄 몰라서 매번 빵으로 끼니를 때우려는 그녀에게 자취생의 노하우를 담아 요리를 해줬다.


하루는 술자리에서 형이 말했다.


"OO 괜찮지 않냐? 어떤 거 같아?"

"참하고 예쁜 거 같아요. 착하고. 왜요? 형 좋아해요?"


형은 그냥 웃고 말았다. 시드니에서 생활하면서 수많은 커플을 봤는데, 그중 오래된 커플은 둘 다 유학생인 경우뿐이었다. 어느 한쪽이 워킹 홀리데이로 와서 만나기 시작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몇 달 뒤면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서 유학생들에게 워킹 홀리데이를 온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끌리더라도 의도적으로 밀어내는 부류였다.(물론 1년 뒤면 무조건 헤어진다는 생각으로 막 만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녀는 형이 이성적으로 밀어내기 어려울 만큼 매력적이었다.


내가 본 연애, 사랑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은 당연히 하면서도 형과 그녀가 과연 잘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시드니에 머물 시간은 길어야 6개월이었고, 형은 시드니에서 대학을 졸업하면 호주에서 일하며 영주권을 받는 것이 목표였다. 그들의 시간은 같은 공간 안에서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다.


형도 알고 있었다. 이루어지기 힘든 인연이라는 것을. 호주 생활 몇 달 만에 내가 알게 된 사실을 몇 년을 지낸 형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애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가끔 그가 화를 내고, 별거 아닌 일에 욱할 때면, 그녀에 대한 마음을 억누르느라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러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의 모든 행동은 그녀와 연관이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뿔싸.


그녀와 눈을 마주쳤을 때, 그가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과 닮아있음을 알아버렸다. 그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은 찰나였지만, 모든 것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해맑은 미소가 내게 조금 더 오래 머물렀던 이유, 나의 시답지 않은 말에도 집중했던 이유, 그리고 술자리에서 나를 향하던 시선까지. 모든 조각들이 맞춰졌다.


문제는 내가 이 사실을 알아버렸다는 것이었다. 형은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감정을 억누르려는 그의 노력은 날마다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는 그녀에게 감정 표현을 더 이상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였다. 여전히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갈등 중이었다. 그런 형을 보면서 나는 미묘한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가 나에게 그녀가 "괜찮지 않냐"라고 물었을 때, 아무런 부담 없이 "착한 것 같다. 참하고 예쁘다"라고 대답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대답은 너무나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녀를 좋아했던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다. 빵과 커피로 밥을 대충 때우는 모습을 보면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었고, 피곤한 얼굴인데도 밝게 웃는 그녀가 보기 좋았다. 하지만 그것이 '좋아한다'는 감정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한 달 후, 농장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녀와 그리고 그와 함께 보낼 시간은 한 달 남짓. 함께 지낼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아서였을까, 그녀는 나에게 더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으면, 곁에 와서 가벼운 스킨십을 하는가 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기도 했다. 그럴 때면 형과 눈이 마주쳤지만, 어깨를 으쓱하고 별일 아니라는 시늉만 하고 말았다. 애써 못 본 척하려는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땅으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이런 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여전히 밝게 웃으며 형과 나를 대했고, 그 웃음 뒤에 담긴 의미를 나는 알았다. 형은 여전히 그녀에게 친절했지만, 나와 그녀가 함께 있는 순간들을 보고 있을 때마다 어딘가 고개를 돌리거나 자리를 피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서 있었다. 어쩌면 그녀와 형, 그리고 나 모두 서로의 감정 속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나 그냥 걔 안 좋아할란다. 어차피 곧 갈 거고, 나도 시험도 얼마 안 남았고.."


그는 그녀가 나에게 마음이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 잘해줬지만, 곧 농장으로 떠나는 나에게 더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도 곧 떠날 것이기에 그녀의 마음을 흔들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거의 지났다.

농장으로 떠나기 며칠 전, 셰어 하우스의 거실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떠나는 나를 위한 파티가 열렸다. 술이 몇 잔 돌던 중, 갑자기 형이 말했다.


"내가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고맙다."

"아니에요 형, 내가 더 고마웠어요. 그리고 미안해요."


무엇이 힘들었고, 무엇이 미안한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편안한 목소리였다.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쉰 후, 웃으며 나를 바라보며 건배를 했다. 그녀는 우리 곁에서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듯이 큰 토끼눈을 한 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며칠 후,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농장으로 떠났다.


"오빠, 잘 가요. 서울 가면 봐요."


시드니에서의 생활은 우리 모두에게 일종의 중간 지점이었다. 각자의 목표를 위해 잠시 머물렀던 공간, 스쳐가는 인연 속에서 서로 다른 방향성의 감정들이 혼재한 순간들. 형과 그녀, 그리고 나는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지만, 동시에 붙잡지도 않았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형과 그녀 모두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형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묵묵히 나아갔을 것이고, 그녀는 또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 웃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나간 여름의 한 장면처럼 떠오를 때마다 가끔 미소 짓는다.

.

.

호주에서 돌아온 후 한참이 지나, 그녀를 만났다.

"형이 너 좋아했던 거 알았어?"

"알았죠~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나 좋아하지 말라고 오빠 좀 이용했던 건데...^^"


59738ebe-7fed-45d6-a6d0-e0adc994df5b.jpg 이 여우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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