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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trajectory Sep 13. 2024

사랑이란 무엇인가?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은 나에게 일어나는 기분 좋은 사건이 아니다. 사랑은 행위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행하는 것이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애인을 만드는 방법이 궁금한 현대인들이 <사랑의 기술>을 읽는다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책의 초반부터 애인을 만들려는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지를 파헤치고, 그런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아마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대체 '사랑의 기술'이 무엇인데?” 이 책에서는 당신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고찰해 봐야만 한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당신이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저 책이 쓰인 것은 1950년대 중반이다. 책 내에서 그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1900년대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꽤 달라졌기 때문에 다시 고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분리'에서 오는 욕망에 대해 분석한다. (에리히 프롬은 정신분석학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은 에리히 프롬이 저 책을 쓴 지 50년도 더 지났다. 그런데도 나는 저 책에서 묘사하는 사회가 우리 사회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실패하고, 그럼에도 대체 그들이 추구한 것이 사랑이 맞는지를 점검하려고 조차하지 않는다. 이 상황은 에리히 프롬이 묘사하는 당시 서구 사회의 모습과 동일하다. 그래서 이 책이 여전히 서점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릴까?


사랑이 무엇인가?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나는 항상 사랑이 무엇인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사랑을 하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사랑은 성욕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성욕은 사람에 대한 갈망에 있어서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사람에 대한 갈망, 내가 느끼는 삶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려는 충동이 사랑에 가까워 보였다. 나는 애인과의 관계에서 나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그것을 치유받는 것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있도록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이 늘어가는 내가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정말 이것이 사랑일까? 이런 의미의 사랑은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느껴지는 뜨거운 사랑, 기념일을 챙기며 그 마음을 계속해서 되살리 려는 노력, 관계에 찾아오는 역경(결혼 반대 등)을 극복하는 우연적인 이야기 등으로 가득 차 있는 드라마 영화 속의 사랑과는 너무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래서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가끔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삶의 고통을 해소하려는 모든 노력이 사랑일 수는 없다. 그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지 모른다는 은근한 불안이 있었다.


언제나 분명해 보인 것들도 있다. 상대방을 구속하고 상대방에게 집착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한 사람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결코 바람직할 수 없고, 삶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사랑일 수도 없는 것이라고 보였다. 그래서 서로의 직업, 재력, 외모 등으로 등급을 분류해 상품처럼 포장된 사진을 보고 사람을 고르는 행위는 결코 사랑에 이르는 길일 수 없다. 사랑은 적어도 인간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대면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은 언제나 분명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대면적인 관계에 이르지 못하고 살고 있다. 자신을 연애 시장에 내놓는 상품으로 취급하고 가치를 측정한다. 연애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대화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결혼과 같은 중대한 결단의 기준을 대체로 사회적인 조건에 둔다. 나는 분명히 이것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에게 이런 종류의 사랑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관계, '상대방이 나를 완성시켜 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멋진 말로 표현되는 관계 또한 오해의 여지가 크다. 상대방이 내 부족한 부분을 기계적으로 채워주는 것은 나를 완성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는 절대 나의 빈 곳이 채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정량화할 수 있는 능력과 비교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취향의 집합체로 보는 데서 이런 오해가 생겨난다. 나에게 부족한 어떤 것들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우리의 ‘것’을 합치면 우리는 ‘모두 가지게’ 된다는 착각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온전히 가지지 않은 사람들의 결합은 불완전함을 증폭할 뿐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우리는 사랑을 하기 위해 인간을, 나를 알아야만 한다. 나를 모르기 때문에, 내 삶의 불완전함 때문에 사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은 태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가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다. 사랑은 우리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다. 이런 사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에 완전히 반하는 것이다. 관습적으로 우리는 사랑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생각해 왔다. 사랑은 저 여자와 이 남자가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랑의 형태는 형제애, 성애, 자기애, 신에 대한 사랑 등 다양할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통합된 태도는 일관되며, 그것이 사랑이다. 그러니 직장 동료들과의 사랑, 오랜 친구와의 사랑, 애인과의 사랑,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사랑(그리고 아주 중요하게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한 번에 가능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적용하면 대체 사람들이 사랑이란 것을 하고 있기나 한가? 극단적인 처방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 모든 것에 실패하고 있을지 모른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그 둘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엇이 먼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삶의 완성'을 다른 사람이 해주어야 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한다는 것은 오로지 내 태도의 문제이지, 대상이 누구인지(사랑받을 만한 사람인지)의 문제가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삶을 완성하고자 하는 사람은 현대에(그리고 에리히 프롬의 시대에도) 꽤 드물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삶의 완성이라는 원초적 욕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을 삶의 우선적인 문제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을 하려는 올바른 시도는 삶의 완성이라는 길로 이어진다. 즉, 올바로 사랑하려 한다면, 좋은 삶에 이르게 될 것이다.


올바로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술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기술은 공학적인 기술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다. 이성을 처음 만나면 어떻게 말을 건네는 게 좋은지 와 같은 처세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술은 테크네, 즉, '사랑에 대 한 이론'에 입각해서 하는 '사랑이라는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테크네는 또한 합리성을 띠고 있는 단어다. 사랑이란 합리성에 근거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삶의 태도라는 것을 가지려면 넓은 의미에서 합리적으로 행 동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에리히 프롬은 아주 기본적인 처방을 내린다. 적어도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에 몰두할 줄 알아야 한다. 그 활동이 무엇인지는 상관없다.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온전히 관심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지나치게 음주하고, 지나치게 즐기기 위한 영화를 봐서는 안 된다. 일정 시간은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매일 명상(놀랍게도 이 책에서도 명상적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해야 한다. 삶을 망가뜨리면서 삶의 공허함과 균형을 맞추려는 (우리 시대에도 흔한, 그의 시대에도 흔했던) 삶의 소비에 자신을 노출하지 말고, 삶의 깊은 근원에 맞닿아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결국 우리는 '신앙'을 가져야만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은 종교적 공동체에 속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초기 물리학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훌륭한 '이성적' 물리학자들은 자신의 모험이 성공할지를 모르는 채 '믿고', 과감하게 나아갔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결국 이러한 궁극적 믿음으로서의 신앙에 이르러야만 한다. 신앙은 삶을 모험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다. 그런 힘 없이는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에리히 프롬의 표현에 따르면, '유아적 욕망에서 멀어질'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 생모로부터 분리되고, 이 심리적 신체적 분리 과정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못하면 각종 유아적 욕망에 구속된 채 어른이 된다. 자기 아내를 어머니처럼 생각하는 남편, 자기 남편을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아내 등은 우리 사회에서 흔한 개념이다. 우리는 사랑을 이런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 일으키는 불완전함의 표출 과정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 처지라고 하더라도, 그 사랑보다 위대한 사랑이, 모든 대상에 대해 더 일관된 사랑이, 인간 실존의 요구라고 할 수 있는 좋은 삶의 형태를 발견하는 과정으로서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다.


 자신의 결핍을 알지 못하면, 자신이 어떤 심리적 과정을 거쳐 성장하였는지를 알지 못하면, 진정한 사랑을 깨달을 수 없다.


나를 알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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