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6
11월에 접어들었는데도 이상기온 영향으로 연일 낮 최고기온이 20도의 따뜻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얇은 겉옷 하나 걸치고 산책해도 땀이 흐르고는 한다. 매번 산책 때마다 아파트 단지에 있는 3그루의 모과나무 아래를 꼭 확인하고 있다. 혹시라도 모과 한 알 떨어져 있나 연신 살펴보지만 도대체 모과들이 떨어지질 않는다. 3그루 중 가장 햇볕 좋은 곳에 자리 잡은 모과나무는 족히 못해도 30개 이상의 열매들이 주렁주렁한데 아직은 때가 아닌지 영 내려올 생각들이 없다. 간혹 떨어진 게 보이지만 어김없이 한쪽이 썩어있거나 바닥에 부딪쳐서 짜개어진 조각뿐이다. 작년 이맘때도 이렇게 매일 쳐다보다가 겨우 마지막 남은 한알을 운 좋게 주워와서 아들방에 놓아두었다. 1년이 지난 지금 모과는 마르디 말라서 딱딱한 돌처럼 굳은 채로 여전히 아들방 책장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올해도 하나라도 주우면 다행이다 싶은 마음으로 방앗간을 들르는 참새처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무밑 풀밭을 체크를 한다.
오늘도 여느 날처럼 점심을 먹고 환기를 시킬 때였다. 우리 집은 아파트 7층이라 작은방 창에서 내려다보면 그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모과나무가 바로 보인다. 별생각 없이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느데 아저씨 한분이 모과나무 밑에 반원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영산홍 덤불 속으로 손을 쑤욱 넣더니 모과를 꺼내시는 게 아닌가. 아뿔싸 매일 풀밭만 체크를 했지 덤불 속은 생각도 못했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올해는 모과를 몇 개 더 주워올 수도 있겠다고 행복한 상상을 했다. 30여분 지나 환기시킨 창을 닫으면서 습관처럼 또 모과나무를 내려다보느데 딱 바로 그때 마침 모과 한알이 나무에서 덤불 속으로 떨어지는 거다. 최근 들어 이렇게 급하게 집을 뛰쳐나온 적이 없다. 몇 년 만에 나타난 반가운 애인을 만날 때보다 더 쏜살같이 강아지를 앞세우고는 1층으로 뛰어내려 갔다. 두근두근한 맘으로 조심스레 덤불 속을 헤치고 들여다보니 모과가 4개나 있었다. 심봤다, 심마니라면 아마 이렇게 소리쳤을 거다. 4개 중 좀 작고 상처 있는 것 하나를 빼고 총 3개의 모과를 양손 가득 안아서 집으로 가지고 왔다. 허풍을 좀 치자면 모과는 내 주먹 2개 정도의 크기이다.
이게 뭐라고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지면서 마치 수확한 농부처럼 뿌듯한 마음이다. 냉정히 따지면 수확이 아니라 서리에 가깝다고 해야 하려나. 혼자 하루종일 헤실거리며 모과를 자랑해 대니 작은아들은 그게 뭐라고 그렇게 좋냐며 이상한 사람 취급이다. 나도 왜 내가 이렇게까지 모과를 주워오고 싶어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3년 전 초봄에 이사를 왔고 아파트 마당에 모과나무가 있다는 건 늦가을이 되어서야 알았다. 노랗게 익은 모과열매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이제는 나무 몸통만 봐도 모과나무를 알아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모과나무의 몸통은 배롱나무와 비슷하게 얼룩무늬가 있고 매끈매끈하다. 군복의 무늬와 비슷한데 모과나무는 짙은 카키색이고 배롱나무는 더 밝은 베이지톤이다. 늦봄까지도 민둥산 같은 배롱나무와 달리 모과나무는 이른 봄에 꽃이 핀다. 벚꽃 필 즈음이면 모과나무 꽃을 볼 수 있다. 꽃도 복숭아꽃 비슷한 모습에 분홍색이라 참 예쁘다. 모과나무 꽃이 이렇게 예쁘다는 게 왜 소문이 안 난 건지 의문이다. 여전히 모르는 것도 많고 배워야 할 것도 많다. 떨어진 모과 찾는 법도 모과 꽃이 예쁘다는 것도 모과나무의 얼룩무늬도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모과 3개는 깨끗이 닦아서 방마다 하나씩 놔두었다. 작은 아들방에는 이제 작년의 모과와 올해의 모과 총 2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작년의 모과는 모과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작은 사과 모양으로 동글하니 예뻤는데, 1년 내내 썩지 않고 잘 말라있다. 크기만 수분기가 빠져서 처음 주웠을 때보다 1/2로 줄었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꼿꼿함이 느껴진다. 가부좌를 틀고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있는 노스님의 모습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겸허해진달까. 이 고요한 어른 같은 모과를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합장하는 마음으로 옆에 슬며시 대갈장군 같이 못생기고 커다란 올해의 모과를 놓아두었다. 월동준비 중 하나를 해치운 기분이다. 한 달 정도 지나 나무에 이파리 하나 없는 을씨년스러운 한겨울에도 책상 위 놓여있는 샛노란 모과를 보면 따뜻한 마음이 들고 은은한 모과향에 여유로운 웃음을 지을 것 같다. 도시에 사는 내가 가끔 느끼는 자연의 호사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