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5
보홀 여행 5일 차, 하루종일 리조트에서만 보내기로 했다. 전날 고래상어 투어의 필리핀 가이드 로빈의 조언대로 오전부터 리조트 앞바다에서 스노클링을 하기로 정했다. 아침 일찍 야자나무 아래 그늘진 곳에 비치체어 자리를 잡고 남편과 나는 장비를 착용하고 바다로 들어갔다. 오전의 바다는 썰물이어서 파도도 거의 없었고 물도 얕아져서 스노클링 초보인 우리가 들어가기 딱 좋았다. 첫 번째 도전은 낯선 바다에 대한 두려움으로 연신 고개를 들어 위치를 확인하며 30분 정도 바닷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형형색색 화려한 열대어들을 보는 건 여전히 즐거웠지만 가이드 없는 초행길이라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머리가 살짝 곤두섰고, 너무 깊은 곳이 나와서 무서우면 얕은 곳으로 이동해서 잠시 서곤 했다. 먼저 밖으로 나가버린 남편은 힘들다고 낮잠을 자고, 다시 기운을 차린 나는 두 번째 스노클링을 혼자 시작했다.
물이 생각보다 얕다는 걸 알았으니 처음보다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이번엔 스노클링 존 제일 먼 곳까지 가보자고 목표를 정하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두 번째라고 제법 바닷속 길이 눈에 익숙해져서 맘이 한결 편안해졌다. 첫 번째 길에 만났던 발이 닿지 않는 2미터 깊이의 위치도 금방 도착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살짝 무서워서 다시 얕은 곳으로 되돌아갔다가 한 번 서서 심호흡하고 난 후 천천히 깊은 곳을 구경했다. 멸치 떼 같은 작은 물고기 몇백 마리와 같이 헤엄도 치고 복어도 만나고 여유롭게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제일 먼 곳까지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더 욕심내지 말자고 세 번째 도전으로 미루면서 물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그래도 물속 코스를 확실히 알아서 자신감이 좀 생겼다. 점심 먹고 나서 오후에 2번 정도 스노클링을 하면 딱 알맞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오후부터 갑자기 날씨가 급변했다.
오전의 햇살 따스하고 잔잔한 물결의 해변은 온데간데없고 갑자기 거센 파도가 치고, 비치매트리스가 날아갈 정도의 돌풍이 불고 폭우가 1시간 정도 쏟아졌다. 오전에 많던 사람들도 모두 사라지고 해변에는 우리 둘만 있었다. 너무 놀라서 우왕좌왕하며 짐을 챙기고 리조트직원에게 물어보니 태풍이 시작됐단다. 다음날까지 태풍의 영향이어서 스노클링을 해봤자 시야가 흐려서 보이는 것도 없을 거라고 한다. 모든 일정이 다 일그러져버렸다. 오후의 스노클링은 물론이고 다음날 예약한 투어조차도 다 취소해야 할 최악의 상황이었다. 얼마나 후회가 됐는지 모른다. 그냥 오전에 더 많이 스노클링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더 깊은 곳까지 용기 내서 갔었어야 했는데, 굳이 겁먹고 미루고 미루다 이제는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된 상황이다. 매번 이런 식이다. 타이밍이 왔을 때 바로 해야 하는데 나중에 해야지 하고 미루면 어느새 기회는 사라지는 법이다. 그러고 나선 후회하는 거다. 그냥 했어야 했다고. 내가 너무 우울해하니까 남편이 3시쯤 비가 좀 잠잠해졌을 때 다시 한번 바닷속으로 들어가 보자고, 그것도 안 하면 후회된다고 설득해서 다시 바다로 들어갔지만, 뿌연 물속과 거센 파도는 감당하기에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 역시나 포기다.
이런저런 답답한 마음과 짜증, 후회,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여러 가지 생각 중 며칠 전 읽었던 박웅현 님의 책(책은 도끼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행불행은 조건이 아니다. 선택이다”라는 문장이 생각났다. “행불행은 운명이 아니라 똑같은 현상을 눈앞에 두고 내가 행복을 선택할 것이냐 불행을 선택할 것이냐이다”라고 작가가 말했다. “난 행복을 선택하겠어” 하면 된다고 조언한 내용이었다. 그래, 맞는 말이다. 더 이상 남은 여행기간 동안 불행하고 싶지 않았다. 행복한 여행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태풍이 오는 시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하고 싶은 것을 찾아 계획을 변경했다. 그날 저녁은 비치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마사지를 받았고, 노래공연을 들으며 저녁식사를 했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람이 거의 없는 해변가를 우산 하나 쓰고 혼자 산책을 했다. 걸어갈 수 있는 가장 먼 거리까지. 덕분에 거북이가 살고 있다는 팻말도 발견했고, 해변가의 모래밭에 밀려온 군소나 조개, 해삼등을 신나게 구경하며 점점 기분이 평온해졌다. 며칠 내내 들러봐야겠다고 눈도장 찍어두었던 해변의 작은 구멍가게에도 들러서 간식들도 샀다.
취소된 투어 대신 썰물에 고개를 삐죽 내민 산호초에 가서 열대어 무리에게 과자를 뿌려주었다. 바닷속만큼은 아니지만 작고 화려한 색의 물고기들이 잔뜩 몰려와서 내가 주는 과자를 열심히 받아먹었다. 산호초 근처라 화려한 물고기들이 많았다. 어제 만난 친구들이었다. 과자를 탈탈 털어 모두 주었다. 생각을 바꾸니 모든 아쉬운 것들은 다시 보홀을 와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같은 리조트에 다시 여행을 와서 미처 하지 못한 스노클링을 마저 더 해야 하고, 거북이가 산다는 팻말이 있는 바닷속에도 진짜 거북이가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따스한 햇살과 야자나무 아래 며칠 동안 누워서 휴식의 시간도 가져야 한다. 보홀의 태풍은 아마도 나에게 다시 또 오라는 초대장 같은 게 아니었을까. 보홀과 나는 서로가 마음에 든 게 분명하다. 다음번에 올 때는 꼭 프리다이빙을 배워와서 바다밑까지 잠수도 도전해 봐야겠다. 신기하게도 내가 맘을 다르게 먹으니 정말로 모든 상황이 훨씬 더 괜찮아졌다. 만약 내가 여전히 날씨를 원망하고 소심한 나 자신을 후회했다면 남은 이틀정도의 여행은 최악의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안 좋은 기분으로 남편에게 온갖 성질을 냈을 테고, 하루종일 리조트 룸에서 둘이 불편하게 지냈을 것 같다.
태풍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아서 천천히 산책한 아침의 해변은 의외로 좋았어서 마지막날 아침도 일찍 일어나 최대한 먼 곳까지 혼자 걸어갔다. 지금까지 살면서 생각하지 못한 원하지 않던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그때도 행복은 상황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거란 사실을 더 빨리 알았다면 나는 좀 더 온화하고 여유로운 사람이 되었을까. 아니면 불행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시간들이 더 행복한 추억으로 바뀌었을까. 보홀에서 그 모든 상황을 즐기기로 한 순간 짜증거리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무색무취의 상황으로 받아들여졌다. 난 그 시간들을 그냥 다 기억하기로 했다. 보홀 첫 여행의 추억으로 다 남겨야지 하고 관찰자의 눈으로 모든 걸 바라보는 순간 그 상황들이 즐거워졌다. 인생을 살면서도 좋지 않은 상황이 닥쳤을 때 나는 불행해라고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행복을 선택하겠어라고 결심한다면 우리의 맘이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