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30
해야 할 일들이 예전보다 현저하게 줄어들어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요즘 이래저래 생각이 많다. 학생 때에는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목표여서 공부에만 매진해야 했고, 대학을 졸업할 때는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는 것을 당연수순으로 받아들였다. 운 좋게 대기업에 취업을 했고, 같은 사무실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당연히 직장을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했다. 아이 둘을 낳고 나서는 내 인생의 목표는 다시 육아로 바뀌었다. 이제 아이들은 20대의 청년이 되었고, 나는 나 자신을 돌봐야 할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로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지나온 시간들을 열심히 살아왔지만, 인생의 주인공으로 나 자신의 삶을 살아왔냐고 물어본다면 자신 있게 대답이 나오지가 않는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온통 버리고 싶은 기억이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서 혼자 고민해서 결정을 했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나름 열심히 살았다. 학과도, 취업도, 결혼도, 퇴사도, 재취업도 모두 내가 결정한 것이었다. 본질적인 나로서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나 통찰은 부족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게 내 삶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로서 살아왔냐고 하는 질문에 긍정의 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내 선택의 근간을 흔드는 저 깊은 보이지 않는 손이 내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잣대여서일 것이다. 자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할 기회가 없었고,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넉넉한 환경이 아니었어서 사회가 정해놓은 반듯한 길만 선택하였다. 학교는 성적만이 중요하다고 가르쳤고, 오로지 대학입시만이 목표라고 몰아붙였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 혹은 사자(子)가 붙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 성공이었다. 저돌적으로 세상이 정한 가치를 따랐고 그것이 맞다고 여겼다. 나로 살았다 착각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선택한 것들이 잘 맞았다면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항상 흔들리며 이것이 맞는 일인지, 나는 왜 이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계속 자신에게 반문을 하고는 했다.
남들이 볼 때 안정된 자리에 있어도 잘못된 길에 서 있다는 생각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하지만, 다 내던지고 뛰쳐나오기에는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고 빈손으로 서게 됐을 때의 그 무력감을 견딜 용기는 없다. 진정한 자유를 얻기에는 이미 너무나 세상에 익숙해진 생활인인 것이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가 돼버린 돈의 힘을 지독하게도 잘 알고 있는 생활인. 데이비드 소로처럼 모든 걸 버리고 숲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자급자족의 삶을 선택해서 산다는 것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머리는 이상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어서 무소유를 외친 법정스님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현실의 안락함을 주는 물질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모든 걸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싫어도 억지로 하던 것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여건이 안 돼서 혹은 눈치를 보느라 하지 못했던 것은 지금이라도 시도하려고 한다. 온전하게 삶의 100%를 자유의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50%만 나의 삶을 사는 것에 몰두하기로 했다. 나머지 50%는 익숙하고 편안한 생활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박쥐처럼 이중적인 모습일 수도 있지만, 현재의 나에게는 그나마 가장 실천가능한 모범답안이다. 양손에 든 것들을 놓지 않으려는 비겁한 욕심일 수도 있지만, 반반치킨처럼 두 개를 다 맛보며 균형을 잘 잡아서 걸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