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니seny Dec 24. 2021

친절한 듯 보이지만 하나도 안 친절한 친절 (상)

주위에 널린 기계적인 친절함 : 콜센터 편

     요 며칠 회사일로 카드사 콜센터에 전화할 일이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영업하는 카드사는 열군데 이상 되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적어도 우리 회사가 가맹점으로 가입되어 있는 8개의 카드사에 전부 전화를 해서 필요한 서류가 어떤 것이 있는지 물어보고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 서류를 보낸 뒤에도 무언가 빠져있거나 추가로 필요한 게 있으면 다시 준비를 해야 하는 과정까지 포함해서 일이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콜센터와 수많은 통화를 하고 그때마다 상담사가 바뀌었다. 이건 자동 ARS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상담원이랑 직접 통화를 해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상담원이 연결되기까지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반복적으로 전화를 하는 수고를 덜고 내 업무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상담원과 빨리 연결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각 카드사의 대표 전화번호와 각 단계에서 몇 번을 누르면 바로 내가 원하는 상담원 연결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지를 상세히 적어놓고 전화를 걸어 기계적으로 번호를 눌렀고, 최대한 빨리 상담원 연결 단계에 도달해 상담원과의 연결만 기다리곤 했다.


     콜센터는 아래와 같이 크게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뉘는데 나는 음식 주문만 받는 인바운드 콜센터에서 근무해 본 적이 있었다.


* 인바운드 콜 : 고객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
예 ) 홈쇼핑 주문 전화, 고객불만센터 등

* 아운 바운드 콜 : 콜센터에서 고객에게 전화를 거는 것.
예 ) 상품 판매, 고객 만족도 조사 등


     대학교 3학년이 끝난 겨울방학, 인턴이나 아르바이트 경험이 없었던 나는 취업할 때 이력서에 넣을 만한 경험도 해볼 겸 여러 아르바이트를 지원했다. 내가 하고 싶어 했던 아르바이트는 나의 전공인 경영학과 관련 있는 연말정산 아르바이트였는데, 몇 군데에 서류를 넣었으나 아무리 소식을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나마 이력서를 낸 곳 중에 연락이 온 곳은 내가 그 프랜차이즈 업체의 메뉴를 좋아해서 생각 없이 넣었던 콜센터뿐이었다. 면접은 굉장히 간단했고 형식적이었는데, 인원이 모자라는 콜센터라는 특성상 별다른 결격사유가 없으면 합격인 모양이었다. 나 역시 합격 통보를 받았고 하루였나 반나절인가 이론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었다.


     이곳은 내가 전화를 걸어야 하는 아운 바운드 콜센터가 아닌 인바운드 콜센터였고, 모든 불만사항을 받는 고객센터가 아니라 오로지 주문만 받는 목적이 뚜렷한 콜센터였다.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주문을 받고, 배달지 주소를 확인하고, 할인쿠폰을 적용할 것인지/할인되는 카드가 있어 적용할 것인지/할인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경우 결제금액을 알려주고 최종적으로 매장으로 주문을 넣으면 과정이 종료되는 비교적 간단한 업무였다. 


     하지만 실제로 전화를 받아보니 어려웠다. 나는 콜 포비아는 없지만 아무래도 전국 사방에서 전화가 걸려오기 때문에 잘 모르는 동네의 주소를 듣고 정확히 입력해야 했으며 남자와 여자, 말이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 사투리를 쓰는 사람, 나이가 많은 사람과 어린 사람, 급한 사람, 메뉴를 잘 모르는 사람 등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전화를 받고 차질 없이 주문을 완료시켜야 했기 때문에 어려웠다.


     이 모든 걸 가장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매뉴얼’이었다. 주문받는 단계별로 정해진 멘트와 순서가 적힌 매뉴얼이 존재했다. 특히 주문을 받을 때는 필요한 요소 몇 가지만 잘 지키면 되기 때문에 그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고객님들의 성격은 다양해서 내가 이끄는 대로 주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이것도 묻고 저것도 묻고, 주문을 다 해놓고는 다시 바꾸는 등 전화받는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요소가 곳곳에 숨어있었다. 


     OJT로 일을 잘하는 선배 옆에서 1,2시간 정도 전화받는 걸 지켜만 본 적도 있다. 정말 능숙한 선배들은 손님의 반발 없이도 그들을 요리조리 이끌어서 주문을 아주 편안하게 잘 마무리했고 벨소리가 울려대는 콜센터에서도 공부를 한다고 책을 펼쳐놓거나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신기했고 나도 좀 더 능숙하게 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나는 토, 일 주말에만 4시부터 9시까지 5시간씩으로 짧게 일했지만 마침 주말 저녁시간이라는 황금시간대였다. 그리고 당시엔 스마트폰도 없었기 때문에 매장으로 직접 전화하거나 매장 전화가 통화 중이면 콜센터로 연결되기 때문에 전화가 정말 많이 왔다. 그날 전화를 몇 통이나 받았는지 그리고 주문이 잘못 들어갈 걸 대비해서 받은 전화에 대한 기록(주문 넣은 점포명 등)도 해야 했다. 


     그 목록이 참 인상적이었던 나는 아르바이트를 한 지 10년이 넘은 최근까지도 그걸 못 버리고 가지고 있었다. 가끔 꺼내보면서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었지만 작년에 25년 만에 이사하면서 다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그랬나 보다. 정확하진 않지만 4시간 근무에 50통 이상의 주문전화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50통이라는 건 최소니까, 시간당 12통이라 치고 60분으로 나누면 한 통화당 5분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물론 주문 내용이 간단하고 할인 적용 등이 바로바로 진행되면 5분 안에 통화가 끝나기도 하지만, 중간에 주문을 바꾸거나 하는 변수들이 생기면 통화 시간은 길어진다. 그러니까 근무시간 중엔 거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처음엔 아르바이트하러 콜센터에 갈 때마다 너무 스트레스였고 힘들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익숙해졌고 어떻게 손님들을 이끌어서 주문을 끝까지 마쳐야 할지 요령도 생겼다. 그리고 말이 너무 빠르다고 고객한테 혼난 적이 있는데 그걸 계기로 해서 말을 천천히 하려고 노력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말하는 속도가 빠른 걸 보면 난 콜센터에는 안 맞는 인재였던 거 같다. 콜센터라 당시 평균 시급보다는 시급이 높은 편이었지만 내가 근무하는 시간 자체가 적다 보니 돈이 크게 되진 않았다. 그렇게 4개월 정도 주말 알바를 했고 4학년이 되면서 전공이랑 직접 관련된 알바도 아니고 당장 돈이 급한 것도 아니어서 그만두었다.


     그래서 나도 안다. 특히나 콜센터에서 가장 빨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빨리 이 전화를 잘 마무리하고 콜센터 전체에 울려대는 콜 소리를 듣지 않고 다음 전화를 받기 위해서는 매뉴얼대로 해야 한다는 것. 어느 단계에선 어떤 멘트를 해야 할지 정해져 있고, 해야 할 답도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쓰지 말아야 할 표현도 있다. 새로운 메뉴가 나왔다면 프로모션 멘트도 한 번 해줘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고충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하지만 단순 주문이라면 모를까, 일반적으로 콜센터로 전화하는 경우는 보통 불만이 있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질문하기 위해서 전화를 한다. 적어도 그 문제에 대한 빠른 해결 혹은 빠르지 않더라도 정확한 방법을 알고 싶어서 전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 며칠 전화를 몇십 번을 하다 느낀 게, 그들은 사람이지만 정말 기계 같은 대답만 한다는 것이다. 조금도 유연하지 않다. 아니, 아마 유연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여러 번 전화를 해서 다른 상담원과 통화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게 필요한지는 잘 알고 있었고 추가 질문 딱 하나만 하려고 했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그다음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끼어들 틈도 없이 정해진 멘트를 1분 동안 기계같이 줄줄줄 읽어대는 상담사를 보고 뜨악했다. 나는 ‘그 문구가 들어가면 되나요?’라는 질문 하나만 하고 싶었는데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원하는 답이 아닌 그녀의 정해진 말이 끝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대표 전화번호를 전화를 걸고 거기서 상담사 단계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소 1분 30초 정도. 여기서 바로 상담원에게 연결될 수도 있지만 대기하는 고객이 많으면 한참을 기다리게 된다. 그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다 치자. 하지만 상담원과 전화가 연결되어도 고객정보 확인 후 -> 어떤 일로 전화하셨냐 묻고 -> 상담원이 곧바로 대답을 할 수 없는 경우엔 확인해봐야 한다며 다시 기다리라 하고 -> 또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며 대답을 하고 … 이것의 반복을 열 번 가까이하고 나니 지쳐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 방문한 건강검진센터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친절한 듯 보이지만 하나도 안 친절한 친절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작가의 이전글 추어탕에 얽힌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