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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Nov 05. 2022

그림책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를 읽고

어른이 되고 처음으로 읽어본 그림책 그리고 떠오르는 사람

     나는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이다. 하지만 글로만 세상을 살아갈 순 없다. 말을 해야 한다. 그것도 '잘' 해야 한다. 글도 그렇지만 말의 내용, 전개 방식, 톤에서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나는 그나마 직업 상 말을 많이 안 해도 되는 편이지만 경력이 쌓이고 직급이 점점 올라가니 조직에서 발표할 일도 생기곤 한다.


     회사에서의 발표는 학창 시절 때의 발표와는 다르다. 웬만하면 발표를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고 그럴 때는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발표했다. 유명한 연사처럼 물 흐르듯 말을 자연스럽게 하고 청중을 나에게 모두 집중시키는 그런 스피치는 하지 못했다. 그나마 내가 알고 있는 걸 전달하는 수준에 그치는 정도였다.


     내가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일단 두서가 없이 말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할 말은 많은데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주제 하나를 말하기 위해서 앞 뒤로 해야 할, 덧붙여져야 할 말들이 많다. 그나마 글은 좀 생각해보고 문장을 이리저리 배치하면서 조정할 수 있는데 말은 정리가 잘 안 된다. 


     게다가 난 말이 빠른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말이 빨랐고 고치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아직도 고치지 못했다. 그래서 말이 빨라지다 보니 단어들이 뒤엉키면서 말이 꼬인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말을 느리게 해야지, 하고 생각할 때만 그나마 정상 속도를 유지하는 거 같고 조금만 흥분하거나 하면 말이 빨라지고 만다. 그러다 보니 발음이 뭉개진다. 그러면 사람들이 응? 뭐라고? 를 반복하게 되고 그러면 나는 말하는데 더 자신감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전부터 스피치 학원이나 연기학원에 다녀볼까 생각했었다. 왜, 지금 대배우들 중에도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연기학원을 다녔고 그러다 배우가 됐다는 사람들도 많기에... 마치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고 발표를 하면 의외로 자연스럽게 발표를 잘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연기학원에는 가 보지 못했고 대신 스피치 학원을 알아보다 동네 근처에서 한 군데를 발견했다.


     하지만 수강료는 생각보다 꽤 비쌌고 당장 무언가 크게 중요한 발표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 등록이 망설여졌다. 그런데 그 학원에서는 강의실 대여료 정도의 적은 돈만 받고 맛보기로 수업을 체험해볼 수 있는 과정이 있었다. 원장 선생님이 설명도 살짝 해주고 나머지 시간은 참여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짧게 발표하는 걸 연습해보는 그런 모임이었다. 2개월 과정에 8만 원으로, 1주일에 두 번 정도 있는 모임에 아무 때나 참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부담 없이 한번 참석해보기로 했다. (이게 2019년의 일이다.)


    1부 수업에선 학원 원장님이 들어와서 짧게 강의를 진행했다. 원래 수업 때 쓰는 교재가 있는데 그걸 나눠주시고는 발음이 어려운 문장들을 따라서 읽어보거나 자기 암시문(긍정적인 문장들) 같은걸 크게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복식호흡과 발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래야 목소리가 떨리지 않고 말도 잘 나온다는 뉘앙스. (그때 한창 열심히 연습할 때는 차 안에서도, 집에 와서도 잠들기 전에 학원에서 배운 복식호흡과 발음 연습을 하기도 했었다.)


    조금 쉬고 2부 수업에선 수강생들끼리 모여 진행을 했다. 예를 들어 3분 스피치라고 하면 동일한 주제를 두고 각자 나와서 3분간 발표를 하는데 형식을 갖춰서 했다. 예를 들면... 인사말을 하고, 발표할 주제에 대해 말하고 그리고 서론, 본론, 결론을 갖춰 말하고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끝. 그리고 3분 스피치니까 가능하면 3분에 시간을 맞춰서 발표할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것까지 체크했다. 


     그러면 듣고 있던 사람들이 어떤 점은 좋았고, 어떤 점은 나빴는지 피드백을 준다. 신기하게도 이 사람들은 오늘 나를 처음 보니까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도 내가 평소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나는 가만히 서있으면 너무 딱딱해 보일 거 같아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는데 오히려 그 동작이 너무 커 보이고 정신 사납다는 의견과 몸 전체가 긴장되어 보인다는 평을 들었다.


     발표하는 사람이 릴랙스 되어서 편하게 보여야 듣는 사람도 편한데 나는 긴장해있다는 사실이 이미 겉으로 다 드러나 있었던 거다. 모든 것의 시작은 그것을 아는 것부터다. 어렵겠지만 이제 알았으니 조금씩 바꿔가면 된다. 머릿속으로는 드라마에 나오는 한 장면 마냥 연기를 한다고 생각한다. 아주 자신감 있고 당당한 태도로, 청중의 눈을 맞추고 손으로는 제스처를 취해가면서 모두를 집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래서 연기를 배워보고 싶은 걸 지도 모르겠다. 이걸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어서.


     교재에 나오는 문장을 돌아가면서 읽기, 낭독을 해본 적도 있었다.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을 받았다. 낭독은 발표가 아니라 그냥 쓰여있는 문장을 읽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자신 있었다. 안정된 톤과 적당한 높낮이, 적당한 속도, 빠르기의 완급 조절, 발음의 정확도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말하는 사람의 발표 내용을 판단하게 한다. 

 

     이것 외에도 내가 지적받은 것처럼 서 있는 자세나 태도, 제스처(너무 많이 해도 정신없긴 하다) 이런 것들도 다 종합적으로 평가 요소가 된다. 물론 발표 내용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도 청중을 이해시키고 그들의 이해 수준을 나만큼 아니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발표의 주목적이니까 그게 중요한 거다.


     이 모임의 참여자들은 나 같이 평범한 직장인들이 많이 왔던 거 같다. 특히 영업사원이라던지 팀장 같은 분들이 많았는데 이 분들은 업무 상 발표할 일이 많아서 참석했다고 한다. 나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팀장이 될지도 모르니 조금씩 준비하는 차원에서 온 거였다. 베테랑 수강생이신 한 분이 본인도 일반 참여자처럼 똑같이 발표도 하면서 수업도 이끌어주셨는데 2년 이상 모임에 나오신 분이라 했다. 그분은 신입생인 우리가 볼 때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었다. 이 모임에 왜 나오나 싶을 정도로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분은 계속 연습을 해야 한다고 했다.


     2021년 10월 김영하북클럽 책은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라는 그림책이었다. 나는 책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책을 보는 것을 선호한다. 노래도 그렇지만 미리 알고 보거나 들으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라가거나 감정마저도 그들을 따라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줄거리를 모른 채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림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언제였더라? 지금 내 또래 중에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라면 그림책을 보는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겠지만 나는 아이가 없으므로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본 게 가장 최근일 것이다. 나에게 책을 읽는 것에 대한 기억은 문자로 된 책을 읽은 기억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어른이 되고 그림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림책이라 분량이 많지는 않았으므로 책은 짧은 시간 안에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눈물이 핑 돌았다. 스피치 학원에 다니던 어느 날, 진짜로 말을 심하게 더듬는 성인 한 분이 왔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이전에도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는지 원장님과도 아는 사이인 거 같았다. 스피치 학원엔 아나운서 과정도 있지만 말더듬이를 교정하는 코스도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여태까지 자신감이 없어서 목소리가 작거나 나처럼 두서없이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실제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말을 더듬는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잊고 지냈던 그분 생각이 났다. 학생은 아니었던 거 같고 아마 직장인 정도 되는 나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쯤은 어딘가에서 잘 살고 계시려나?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사실은, 본인이 말더듬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서고 열심히 참여하셨다는 거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너는 강가에 데려가 너는 강물처럼 말한다고 해줘서 좋았다. 좋은 부모의 태도란 이런 게 아닐까? 자식을 키운다는 건 너무 어려운 거 같다. 내 DNA를 받고 내 속에서 나왔을지언정 나랑 전혀 똑같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자라지도 않는다. 내가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 어떤 식으로 조언하느냐에 따라 그 아이가 살아가고 생각하는 게 달라질 수도 있다. 


     이 책의 내용이 작가의 실화라는 것을 알리는 글이 책의 맨 뒷장에 나와있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동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실재했던 일이라 생각하니 감동이 배로 밀려왔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도 같은 말을 들려주며 글을 마친다.



너는 강물처럼 말해.


그러니까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말하면 된다고.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같은 사람이 말을 할 때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두려운 시선을 느끼지 않도록 
충분히 기다려주고,
찬찬히 이야기를 들어줄 것.

내가 말하는 것보다 남이 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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