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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Dec 17. 2021

치약과 경조금 사이의 줄타기

이 둘은 무슨 관계일까요?

     어느 회사나 사람이 들고 나지만, 요즘 우리 회사는 특히 퇴사가 잦은 것 같다. 내가 퇴사에 별 관심이 없다면 괜찮겠지만 요즘 내 머릿속이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해선지 그들이 너무나 홀가분해 보이고 부럽다. 남들이 '그만둔다'는 이유에 휩쓸려 나도 그만두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남들과 상관없이 스스로 퇴사 생각이 있고 그게 단시간 내에는 이뤄지기 어려울 것 같으니 그게 걱정될 뿐이다.


     나는 퇴사 이후의 계획이 확실하지 않다. 30대 중반이나 돼서 '일하기 싫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 회사를 그만둘 순 없다. 아무리 돈에 대해 신경을 안 쓴다고 해도 매달 들어오는 월급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주 35시간제 등 일을 하면서도 내 시간을 좀 더 꿈꾸고 있기 때문에 지금보단 돈을 적게 받고 이직할 가능성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 확보가 100% 되는 포지션이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굉장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사실인데, 10년간 회사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주 5일 근무를 기준으로, 회사에서 치약 한 통*을 쓰는데 약 6개월이 걸린다.
(*약 200g짜리 기준)


     물론 야근이 많거나 치약을 남들보다 많이(?) 짜서 쓰면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크기의 치약을, 점심 먹고 이를 닦을 때마다 쓰면 대략 6개월 정도 소요되는 것 같다. 궁금해서 다른 친구에게도 물어본 적이 있는데, 얼추 비슷한 기간을 말했기 때문에 나름의 신뢰도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마침 지금 쓰고 있는 치약이 거의 떨어질 시점이어서 핀란드 여행 갔을 때 기념으로 사 왔던 자일리톨 치약을 회사에 미리 갖다 두었다. 치약을 보면서 핀란드 여행을 떠올렸고 과연 나는 다음 치약을 개시한 뒤에 이걸 다 쓰기 전까지 나갈 수 있을까? 아니면 또 새로운 치약을 준비해야 할까? 궁금해졌다.


     얼마 전, 육아휴직에 들어간 다른 직원이 부친상을 당했다고 사내 전체 공지 메일이 왔다. 난 그 직원과 업무 상 얽힌 것도 없고 친하지도 않아서 부의금을 안 낼까 했었다. 그런데 그녀와는 지금 활동하지 않는 동호회에 같이 가입되어서 활동한 적이 있었고 나도 이 회사에서 근무한 지 6년 차가 되다 보니 복도를 오며 가며 얼굴 보고 인사한 짬이 있어서 그냥 넘어가려니 마음이 찜찜했다.


     난 결혼도 안 했고 아직 부모님도 모두 건강히 살아계시기에(이건 좋은 거지만)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받을 일이 당장은 없다. 보통 한 군데에서 오래 근무하면 자연스레 서로 경조금을 주고받아 결국 내가 낸 금액과 사람들로부터 받은 금액이 비슷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회사를 두 번이나 옮겨 현재 세 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으며(게다가 그만둘 생각도 하고 있고) 그 전 회사 사람들과는 모두 연락이 끊겼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고받는 경조금에 대해 추적조사를 해보니 약 10년 정도 시간이 흐르면 내가 어딘가에 냈던 경조금 금액만큼을 결국 회수하게 되는 패턴이 나온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관련기사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190507.22030002182) 그러니까 내가 이 회사를 다니며 낸 경조금 봉투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나와 똑같이 이런 불만을 표시하면서 나한테 경조금을 내는 사람들한테서 회수하게 될 것이다.


    5만원권이 나온 뒤로 모든 경조금의 최소한도가 5만원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친하지 않은 경우라도 보통 5만원을 내게 되는데, 이게 고민이 되는 거다. 그래서 확실하게 낼 거면 내고, 말 거면 말아야 한다. 이 직원은 육아휴직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내년 중반부나 돼야 회사로 돌아오거나 아니면 육아휴직이 끝나면서 퇴사할 수도 있다. 그러니 또 고민이 되기 시작한다. 실제로 육아휴직 후 여러 사유로 돌아오지 않는/못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몇 년 전, 회사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가 있는데 이 직원이 누가 봐도 헤드헌터랑 하는 통화를 들은 적이 있다. 빨리 나갔어야 했는데, 그녀의 통화가 길어지면서 대답하는 내용을 보아하니 내가 중간에 나가면 안 될 거 같았다. 그래서 그 직원이 나가고 나면 가야지, 하고 앉아서 버티고 있는데 전화가 끝났는데도 이 직원이 한참 동안 화장실을 안 나가는 거다. 화장실  세 칸 중 한 칸에 누가 있는데, 그게 누군지 보려고 그랬으려나? 화장실에는 나랑 그녀, 둘 밖에 없었으니까.


     다행히 그 층엔 우리 회사 말고도 다른 회사가 하나 더 있어서 그 화장실을 우리 회사 여직원들만 쓰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전화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화장실에 있다 나갔고, 나는 시간 간격을 띄고 화장실을 벗어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이 통화를 들은 건 사내의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밀은 유지되었다. 심지어 그녀 본인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다. 어쨌든 난 그런 통화를 들었으니까 그녀가 곧 이직하려나, 생각했는데 이직을 포기한 건지 실패한 건지 그 뒤로도 이 회사를 다녔고 결혼도 하고 육아휴직까지 들어갔다.


     시국도 시국이고 해서 장례식장은 안 가기로 했지만 계속 마음이 찜찜하다. 그래, 이건 어차피 못 받는 돈으로 치자. 참고로 그녀의 결혼식에도 안 갔는데 애매한 사이라 생각돼서 축의금만 냈다. 그리고 올해부터 조직개편이 되면서 그 팀이 우리 본부 밑으로 들어와서 축하를 해야 하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본부 단위로 뭉치는데도 함께하게 되었고 이번에 그녀가 출산휴가에 들어간다고 할 때 적지만 선물 비용을 모금했다. 뭔가 선물을 사서 줬겠지 했는데 그 팀에선 돈만 걷어 가고 그 이후로 어떻게 했다는 결과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중에 그 팀 직원한테 직접 물어보니 현금을 전달했다고 한다. 


     이래저래 고민은 됐지만 결론은 마음 편한 게 좋겠다 싶어 부의금을 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출산휴가에서 돌아오는 그녀의 얼굴은 안 봐도 좋으니 제발 내가 그전에 이 회사를 그만뒀으면, 하고 빌었다. 부의금을 내고 나니 앞으로 낼 경조금이 더 많아지기 전에 빨리 이곳을 그만둬야지, 라는 목표에도 이상하게 박차를 가하는 느낌이 든다.



마침 집에서 쓰던 치약도 똑 떨어졌다. 하지만 회사에서 쓰는 치약이 떨어졌을 때와 느낌이 다른 건 왜일까.



새로 딴 치약을 다 쓰기 전에는 퇴사할 수 있도록
 아니면 적어도 확실한 목표는 세우도록 노력해보자.



     지금 쓰고 있는 치약을 짜도 짜도 더 이상 나오지 않길래 최후의 수단으로 가위로 정 가운데를 잘라 두 동강을 냈다. 그렇게 하면 몇 번 더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잘라낸 치약 용기 안을 칫솔로 닦아내며 남은 치약을 정말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쓰자. 그리고 새 치약을 쓰는 날부터, 카운트다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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