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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Sep 17. 2023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소원을 외치다

봄날의 조계사 산책

(2022년 봄에 쓴 글입니다.)


 

    이번주는 마감 때문에 월요일부터 야근을 했다. 그냥 야근을 해도 힘든데 일주일의 시작인 월요일부터 야근을 하니 일주일이 다 망가진다. 그래도 목요일까지 급한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 될 것 같아 금요일 오후 반차를 냈다. 회계팀의 몇 없는 장점은 스케줄 대로 일하기 때문에 어느 시기엔 절대 휴가를 못 내지만 그 반대로 휴가를 낼 수 있는 시기가 명확한 편이라는 점이다. 살다 보면 갑자기 발생하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인데 그런 면에선 일하는 스케줄 하나만큼은 불확실하지 않다는 점이 좋다.


     오늘 휴가 내고 가는 목적지는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다. 지하철을 환승해서 가야 하나 아님 버스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야 되나 고민했는데 찾아보니 시간은 좀 걸려도 회사 근처에서 광화문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오늘 오후 반차를 낸 나는 시간이 많은 도시여행자이므로 내가 좋아하는 버스를 타기로 한다. 처음 타보는 버스지만 퇴근길 일부와 코스와 겹쳐서 익숙한 길이 나오다가 곧 눈앞에 낯선 길이 펼쳐진다.


     그러다 예상치도 못하게 길 양 옆으로 펼쳐진 벚꽃길을 만났다. 바람은 좀 쌀쌀하지만 한 낮, 오후 두 시가 지난 시간. 버스 안에서 마주치는 바깥 풍경은 따뜻하게만 보인다. 이제 나무에도 연두색의 새순과 이파리들이 막 올라오기 시작했다. 3월은 학교가 시작하는 달이라 한 해를 시작하는 감각이라면, 4월은 자연이 꽃피기 시작하는 달이라는 의미에서 시작의 감각이 존재한다.


     강남을 한 바퀴 훑고 반포대교를 건넌 버스가 남산터널을 지나 을지로를 지나 종로에 들어섰다. 이 버스는 나를 교보문고 근처에 내려주긴 하는데 광화문역이 아니라 그것도 한 바퀴를 돌아서 교보문고 건너편에 내려주는 노선이었다. 이미 한 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온 나는 계속 앉아있자니 좀이 쑤셨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안내방송이 나왔다.


다음 정류장은 조계사입니다.



     이걸 듣고 "내릴까?"라는 생각이 들어 즉흥적으로 내리기로 했다. 교보문고 근처에 조계사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니까 목적지까지 좀 더 걷지 뭐, 하면서.


     다행히 나 말고도 내리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미리 하차벨을 눌러둔 덕분에 나도 편하게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위치 파악 후 교보문고 쪽으로 가려했는데 지도를 보니 조계사가 정말 바로 근처였다. 그래, 버스 정류장명도 '조계사'고 나는 어차피 시간도 남는데 한번 까짓것 가보자, 조계사.


버스에서 내려서 조계사까지 걷던 길의 풍경. (@조계사 근처, 2022.05)


     본가 근처에도 사찰이 있어서 그런지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한 달 전 정도부터는 근처 반경 1km 안 도로에는 모두 연등을 달아놓는다. 덕분에 산속에 있는 사찰에 가지 않고도 부처님 오신 날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버스 정류장명도 '조계사'인 데다 조계사가 당연히 근처에 있으니 내가 내린 도로 양 옆으로도 색색깔의 연등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다. 그래도 다른 때는 모르겠지만 부처님 오신 날 즈음 해서는 이상하게 절에 가게 된다. 국내여행을 다니다 보면 유명한 관광지를 찾게 되는데 보통 지역마다 유명한 절은 한 군데씩 있다. 특히 석가탄신일 약 한 달 전부터는 절과 절 근방에 연등 장식이 꾸며지기 때문에 봄에 국내의 어딘가를 놀러 가면 높은 확률로 연등이 달려있는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불경 소리를 듣고 있는 평일 오후 한낮의 조계사 풍경. (@조계사, 2022.05)


      화려한 연등이 나를 감싼다. 경내로 들어오니 스님이 불경을 읊고 계신다. 이것이 바로 라이브로 ASMR 불경 듣기인 것인가.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린다 하더니 그 많은 문구 중에 '반야바라밀다'와 '아재아재바라아재'만 정확히 들렸다. 경내 앞마당에 앉아계신 분들도 많다. 작년에 갔던 봉은사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운이 좋은 건지 한참 스님이 불경 외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끝나고 스님이 나오시더라. 안에서는 박수를 치고 밖에서 듣던 분들은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도 따라서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다. 혼자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빌었다. 하지만 그 소원을 이루(어내야 하)는 것은 나다. 소원 주머니를 하늘에서 뚝 떨어뜨려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행동을 해야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권에 당첨되려면 최소한 복권을 사야 하듯이, 최소한의 행동은 해야 한다. 


     등에는 사람들의 소원이 매달려있다. 이름과 집주소까지 쓰여있는데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이 된다. 부처님이 주소를 알아야 찾아오시나? 동명이인을 구분하려고 그러나? 크크크. 리프트차가 돌아다니면서 계속 등과 소원을 달아주고 있는데 참 재밌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소원이 이렇게 많은데 과연 이 중에 몇 명이 소원을 이룰까? 그중에 나도 있을까?


     바람결에 파다다닥, 스스스슥 소리가 난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연등 밑에 달아놓은 이름을 코팅해 놓은 종이들이 움직이면서 서로 부대끼면서 내는 소리다. 수많은 소원들이 내 머리 위에 달려있는데 그것들이 결코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도 저기다 마음만큼은 하나 얹었으니까. 어떤 형태로든지 좋으니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건강하고,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한 마음을 쓰며 잘 지내는 것과 같은 것들.


     차갑지 않은 적당한 온도의 바람이 불었고 햇살은 따뜻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게 평화롭다. 내 앞을 걸어가는 똥똥한 비둘기조차도 평화로워 보인다. 경내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들고 한 바퀴를 돌아본다. 몇십 층짜리 빌딩 여러 개가 절을 에워싸고 있었다. 절 밖으로 열 발자국만 나가도 차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끊임없이 흘러가는 이곳이 결코 서울시내 한복판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곳은 별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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