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계와 만나는 법, 책 그리고 도서관
서점이나 북카페는 책 배열 방법이 매장 분위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대형서점은 찾아오는 손님도 많고 구색을 갖춰야 하니 도서관만큼 다양한 책이 존재하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서점이나 북카페는 운영자의 취향에 맞춘(혹은 그들이 타겟팅한 범위에 맞는) 분야의 책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도서관은 다르다. 똑같은 책이 이 도서관에는 있고 저 도서관에는 없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인 섹션 구조는 비슷하다. 그 이유는 바로 한국십진분류법(KDC)에 의해 서가가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도서관에 가면 아니 처음 가는 도서관에 가도 대충 내가 원하는 책 혹은 원하는 분위기의 책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국에서 쓰이는 십진분류표를 간단하게 소개해본다.
한국십진분류표(KDC)
000~099 : 총류 [백과사전, 도서관학 등]
100~199 : 철학 [동양철학, 서양철학, 심리학 등]
200~299 : 종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300~399 : 사회과학 [경제학, 정치학, 행정학 등]
400~499 : 자연과학 [수학, 물리학, 화학 등]
500~599 : 기술과학 [의학, 건축학, 전자공학 등]
600~699 : 예술 [음악, 미술 등]
700~799 : 언어 [한국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
800~899 : 문학 [한국문학, 영미문학, 일본문학 등]
900~999 : 역사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나의 세계는
800번대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800번대의 문학코너 때문에 도서관에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서관에 다닌 시간이 오래될수록 방문하는 섹션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요즘엔 800번대만큼이나 0번대, 100번대, 700번대, 700번대와 같은 섹션에도 자주 들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도서관에 한번 가면 머무는 시간도 점점 길어진다. 요새는 오히려 800번 대보다 다른 번호대의 서가에서 서성이는 경우도 많다.
도서관에 자주 다니다 보니 십진분류법을 정확히 몰랐어도 '800번대에는 문학 종류가 모여있구나'라고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다른 번호대도 가끔 다니는 곳은 대충 어떤 종류의 책들이 모여 있는지 감은 잡고 있다. 그런데 200번대, 400번대, 500번대는 뭐였더라? 고 바로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이쪽은 아직까지 내가 발을 담그지 않은 즉 거의 읽지 않는 분야여서 잘 모르고 있던 거다.
요즘 자주 서성이는 서가는 0~199번대까지이다. 십진분류표 상으로는 0번대와 100번대가 나뉘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0번대와 100번대를 묶어서 생각하고 있다. 0번대는 총류로 독서법이나 도서관울 주제로 다룬 책들이 잔뜩 있다. 최근 낭독독서법에 관심이 생겼는데 이미 사람들이 다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100번대는 철학서들이 모여있는데 인간 심리나 감정에 대한 글 또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들이 주로 분포되어 있다. 제목만 봐도 너무 흥미로운 책들이 많다.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제목으로 쓴 책들도 많고 인간에 대한 이야기, 호기심, 궁금증 그리고 삶의 본질에 대한 물음 등이 책 제목에 담겨 있다. 이 책 저 책을 펼쳐보며 '이것도 읽어보고 싶고 저것도 읽고 싶어'를 외친다.
도서관 기본 대여기간 2주에 다른 사람이 내가 빌린 책에 예약을 걸지 않으면 1주일 더 연장해서 최대 3주까지 책을 빌릴 수 있다. 책을 여러 권 빌리는 나로서는 이 3주라는 기간이 짧아서 아쉽다. 최대 대여기간이 한 달 정도만 돼도 참 좋을 것 같다.
회계에서는 매출채권회전율, 재고자산회전율 등 다양한 '회전율'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매출채권회전율이란 한 회계기간 동안 평균 매출채권 금액이 현금으로 회수되는 횟수를 의미한다. 매출채권의 회전이 빨라야(잦아야) 즉 대금회수가 빨리 되어야 자금 흐름이 원활해 기업을 운영하는데 문제가 없다. 그리고 재고자산회전율이란 재고자산이 어느 정도 속도로 판매되어 매출로 이어지는지를 나타내는 수치로, 이 수치가 높아야 즉 재고자산이 빨리 소진되어야 매출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또 재고의 진부화도 막을 수 있다.
도서관에서 책의 대여기간을 마냥 길게 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도서 회전율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치된 도서는 한정되어 있는데 돌려가면서 여러 사람이 읽어야 하기 때문에 적정한 기간과 권수를 정해야 한다. 즉 도서 회전율이 빨라야 특정한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 책을 최대한 많이 볼 수 있다. 내가 다니는 곳의 일반 공공도서관에서 정한 룰은 최대 5권을 최대 3주까지 빌릴 수 있는데 이 수치가 도서 회전율에 있어서 적정한 기간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나는 도서관에 한번 올 때 거의 그 달의 책을 왕창 빌려가는 스타일이다. 그러니까 도서 대출기간을 최대 3주로 하면 도서관에는 한 달에 한 번, 잘해야 두 번 가니까 대출기간이 긴 게 좋다. 한동안은 대출기간 최대 3주에 최대 대출권수인 5권을 꽉꽉 채워 빌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3주라는 시간 동안 빌려온 책을 다 읽기 어려웠다. 다 못 읽은 책을 그대로 반납하려니 마음 한 구석에 이상한 부채감만 쌓였다.
매번 도서관에 갈 때마다 오늘은 어떤 책을 빌릴지 아니면 다음으로 미룰지 결정하느라 참 힘들다. 마음 같아서는 다 읽을 거라고 큰소리 뻥뻥 치며 빌려오지만 막상 집에 가서 책을 읽는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튜브도 그렇고 요즘은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지 옛날보다 책 읽는 시간이 확연히 줄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싶다는 욕심만은 아직 줄지 않았다. 요즘은 최대한 욕심을 자제하고 3권만 빌려서 가능한 다 읽으려고 노력한다.
세상을 만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직접 여행을 가도 되지만 요즘은 손쉽게 인터넷에만 접속해도 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세상을 만나는 방법은 책이다. 그러니 책들이 모여있는 도서관은 내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도서관의 800번 대만 돌던 내가 다른 섹션으로 시선을 확장하면서부터 더 넓은 세계를 만나고 있다. 도서관에 들락거린 지 20여 년이 지난 나에게 아직도 만나지 못한 200번대, 400번대, 500번대와 같은 미지의 세계가 남아 있어서, 더 기대할 것들이 남아 있어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