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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Jul 31. 2022

출근길의 지하철 계단을 오르며 본 것은?

어느 날의 우연이 만들어낸 일 : 소설 <파친코>를 읽어야지 하는 결심

     원래 나의 출근길은 버스-버스 루트였다. 그런데 올해 초, 같은 버스에서 팀장님을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정확히는 팀장님만 나를 본 상황) 얼마 전 또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이대로는 혼자 사는 것을 들킬 뻔하게 생겨서 고민 끝에 출근길을 변경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는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한다. 엄마는 뭐 어떻냐고, 시원하게 말하라고 했지만 이제 와서 말하기에는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일상이 비교적 편안하게 흘러가는 이유는 이렇게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재들을 미리 통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지난 1년은 잘 숨겨왔고 이제 집 계약기간도 1년밖에 남지 않았으니 남은 1년만 잘 버티면 된다.






     버스는 언제나 한가로운 편이었는데 지하철 2호선은 역시 사람이 많다. 최악의 시간대인 9시 출근이 아닌데도 사람이 많다. 회사가 있는 지하철역에 내려 앞사람의 꽁무니를 쫒으며 출구로 나가기 위해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이럴 땐 고개를 숙이고 계단만 보고 걷거나 시선을 조금 올려서 정면에 두면 내 앞에 걸어가는 사람이 바지를 입었나 치마를 입었나, 또 무슨 소재로 되어있고 어떤 색깔인가가 눈에 띈다.  


     사람이 꽉꽉 들어찬 계단에서는 마냥 핸드폰 화면만 보고 있거나 발을 헛디뎠다가는 이 거대한 행렬의 흐름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나나 다른 누군가가 넘어지거나 멈칫하는 순간 어딘가에서 갑자기 병목에 걸리는 거다. 그런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선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고 오로지 앞만 보고 적당한 속도로, 마치 운전할 때 도로의 흐름을 타는 것처럼 사람들의 속도에 맞춰 걸어야 한다.


     좋아. 오늘도 잘 도착했어. 출근 시간보다 살짝 여유 있게 도착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런데 내 앞에 가는 사람 손에 들린 물건이 눈에 확 들어온다. 어? 책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냥 책이 아니라 페이퍼백이다.


     페이퍼백은 우리나라 책에선 찾아볼 수 없는 판본 형태로, 주로 해외(영미권)의 서적들이 이런 형태로 되어 있다. 크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A5 사이즈 정도로, 우리나라의 반질반질하고 도톰한 종이와 달리 속지가 거친 갱지로 되어있다. 해외에서는 이런 페이퍼백 판형과 커버가 딱딱하고 속지 품질이 좋은 종이로 이루어진 하드커버 판형이 구분되어 책이 출시된다고 알고 있다. 다만 모든 판형이 페이퍼백으로 출시되는 건 아닌 거 같고, 어느 정도 팔리는 책의 경우 하드커버 판형이 먼저 나오고 1,2년 뒤쯤에 페이퍼백으로 출시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출근길 아침, 이 전쟁통 같은 지하철에서 영어 원서를 읽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당연히 누굴지 궁금해진 내 시선 끝에는 한 남자가 책을 손에 쥔 채 계단을 오르고 있다. 젊은 남자다. 나도 젊지만 왜 젊은 남자라고 지칭하게 되는 걸까. 왜냐하면 그는 누가 봐도 요즘 20대가 많이 입는 스타일의 옷을 있었고, 요즘 20대가 많이 하는 스타일로 머리를 매만졌으며 귀에는 무선 이어폰을 꽂고 있는 요즘 20대로 추정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싱그러운 20대에게 어울리는 '젊은'이라는 형용사가 자연스러웠다.


     나도 이사 오기 전, 지하철을 30여분 타고 출근을 할 때 매번 앉아서 올 수 있어서 그 시간을 이용해 해리포터 시리즈 페이퍼백을 들고 지하철에서 책 읽어본 경험이 있었다. 가끔 지하철 안을 흘끔흘끔 돌아보면 책 읽는 사람은 가끔 보였지만 페이퍼백을 쥔 사람들은 거의 본 적이 없었고 더군다나 남자는 진짜 드물었다. 그럼 이 사람이 들고 있는 책은 과연 뭘까 싶어 유심히 쳐다봤는데, 책을 쥔 손가락 사이로 책 제목이 얼핏 비쳤다.


     이 사람이 쥐고 있던 책은 바로 독서 애호가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했지만 최근에 애플 TV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화제가 된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의 영문판 버전이었다. 한국어판은 절판돼서 일시적으로 구하기 힘들어졌다는 그 책(이 일이 있던 당시엔 그랬었는데, 이제는 판권 계약을 새로 해서 구하기 쉬워졌을 거다) 그리고 그 책을 출근길에 영문판으로 읽고 있는 사람.



소설 <파친코>의 영문판. 한국어로 읽었다면 울지 않았을 문장을, 이상하게 영어로 읽으니 눈물이 났다.



     사실 나도 집에 영문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영어공부 겸 해서 영어 원서를 꾸준히 읽고 있는데 원서를 살 때 한 권만 사는 게 아니라 배송비 문제도 있고 하니 사는 김에 몇 권씩 모아서 한꺼번에 산다. 그래서 얼마 전 페이퍼백을 여러 권 주문하다가 그때 이 책도 같이 주문했었다. 이건 한국계 미국인인 작가가 영어로 쓴 책이니까 왠지 최초의 언어인 영어로 써진 맛을 그대로 느끼고 싶어 내용 이해를 조금 못하더라도 원서로 읽고 싶어서 주문했다. 그제야 나도 얼른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며 걷고 있었고 짧은 지하철 계단 오르기도 끝이 났다.


     이제 출구가 오른쪽과 왼쪽, 두 군데로 나눠지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오늘 아침 우연히 지하철 출구로 나가는 계단에서 내 앞에 서서 한 손에 소설 <파친코> 영문판 페이퍼백을 들고 계단을 오르던 남자는 나와는 반대 방향인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기에 곧 나의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그 남자를 따라 시선을 좇지 않았다.


     만약 오늘 평상시처럼 지하철을 타던 대로 굳이 1-3까지 걸어갔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이었다. 버스를 타고 역 앞 정류장에 내려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한 후, 지하철을 타기 위해 승강장으로 내려왔는데 마침 7-2쯤 지나갈 때 열차가 왔길래 그냥 타야겠다 싶어서 아무데서나 탄 것이었다.






     우연히 지하철에 들여놓은 발걸음으로 인해 우연치 않은 풍경을 마주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게임> 황동혁 감독은 길을 걸어 다니면서도 길 한복판에 드라마 속 장면들을 펼치고 다녔고 그걸 현실로 만들었다고 어느 인터뷰에선가 본 기억이 난다. 짧은 송도 여행에서 <오징어게임>을 몰아서 보고는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다짐했다. 나도 내가 꿈꾸는 것들을 현실로 만들고 싶다.



     나는 다른 사람 인생에선 조연이거나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 1로 출연하고 있을지 몰라도, 내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선 단독 주인공이다.



     이런 건 드라마를 시작할 때 흐를 법한, 약간은 오글거리는 내레이션이 아닐까 생각하며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는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 회사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파친코>를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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