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을 어떻게 보내시나요?
나는 점심을 밖에서 사 먹다가 몇 년 전부터 되는대로 하루이틀 정도 도시락을 싸와서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코로나 전부터였는데, 도시락을 싸 오니 확실히 돈이 절약되었다. 그리고 밖에서 파는 음식은 간이 강해서인지 점심을 먹고 나면 속이 부대끼는 느낌도 있었는데 도시락을 먹으니 속이 편안했다.
대부분 회사들의 점심시간이 12시를 전후로 몰려있기 때문에 12시에 밥을 먹으러 나가면 항상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고, 사무실에 1시까지 돌아오는 게 빠듯했다. 하지만 도시락을 먹으면 밥을 후딱 먹고 여유 있게 회사 앞 여의도 공원도 산책할 수 있어서 점심에 도시락 먹기를 선호하게 되었다.
도시락은 혼자 싸왔지만 다른 팀에도 도시락 싸 오는 사람들이 간간히 있었다. 그래서 그다지 친하지 않아도 캔틴에 다 같이 모여서 밥을 먹고 그 김에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하고 접점이 없으면 잘 못 친해지는 편인데 캔틴에서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대화도 나누다 보니 내 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여의도에 있던 사무실이 강남으로 이사를 오면서 캔틴이 없어진 대신 대회의실에 모여 밥을 먹고 환기를 시켰다. 하지만 곧 코로나가 터졌고 재택근무가 시작되면서 출근하는 사람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회의실에 밥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여러 팀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특정한 한 팀이 전부 도시락을 싸 오는 바람에 점심 먹는 사람들 중에 나만 다른 팀 직원인 다소 이상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이건 마치 그 팀이 모여서 밥을 먹는데 내가 억지로 끼어든 것 같달까. 그래서 다 같이 모여서 먹는 대회의실 말고 작은 회의실에서 따로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도시락 먹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퇴사하고 코로나가 잠잠해지자 다들 나가서 먹기 시작하면서 매일 도시락을 싸와서 먹는 사람은 나밖에 안 남았다. 나도 처음엔 일주일에 2,3일 정도만 싸 오다가 이제는 점심약속이 미리 잡힌 날만 빼고 매일 도시락을 준비해 오게 되었다.
그래도 사람들하고 밥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좋았는데 혼자 점심을 먹게 되니 그 점이 아쉬웠다. 처음에 하루이틀 혼밥 할 땐 좋았지만 가뜩이나 독립해서 평일 저녁에도 집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데 점심마저도 혼밥을 하려니 무료하다.
그나마 밥 먹는다는 구실로 다른 팀 사람들하고 모여서 이야기도 나누면서 조금 친해지기도 했는데 점심을 혼자 먹다 보니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도 점점 소외되는 느낌이다. 나에게는 좀 여러모로 아쉬운 점심시간이긴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쩌겠는가?
즐겨야지.
혼자만의 점심시간.
처음엔 밥을 먹고 남는 시간에 유튜브를 봤는데 유튜브 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맨날 보려니까 평소에 안 보던 거까지 괜히 막 다 보게 되었다. 이 소중한 시간에 유튜브 밖에 안보나 하면서 자괴감이 들었다.
이렇게 된 거 이 시간을 좀 더 실용적으로 활용해보자 싶었다. 그래서 중국어 공부가 된다고 믿으며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중국 드라마(이하 중드)가 있길래 매일 한 편씩 보기도 했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러닝타임이 1시간 정도로 긴 편인데 반해 중드는 40여분 정도라 점심을 후딱 먹고 남은 시간에 한 편 보면 점심시간이 끝나 있었다. 이 드라마는 24화로 구성되어 있어서 거의 한 달에 걸쳐 봤다. 가끔은 도서관에 곧 반납해야 할 책이 있는 경우 책을 읽기도 했다.
최근엔 일본어 라디오소설 낭독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매일 주어진 과제를 해야 하는데, 이게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지만 스크립트를 미리 읽어보고 녹음할 시간이 필요하다. 모임장님이 보내준 스크립트를 보면서 처음에 초벌로 한번 쭉 듣는다.
발음을 모르겠는 단어에 후리가나를 달고(한자 위에 히라가나로 발음을 적는 것) 쉬어 읽는 부분이 있는지 체크한다. 그 뒤로는 몇 번씩 들으면서 따라 읽어서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 녹음을 한다. 그리고 녹음파일을 단톡방에 올리면 끝.
집에서 해도 되지만 이게 은근하게 시간이 들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해봤는데 괜찮았다. 점심시간엔 사무실에 사람들이 없어서 집중도 잘 되고 주변이 조용하니 녹음하기에도 딱이다. 그래서 요즘은 밥 먹고 낭독모임 스크립트를 읽어보고 녹음하면서 점심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오늘 문득 떠오른 생각.
점심시간에...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서
새 포지션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이것은 일종의 금기다. 현재 회사를 다니고 있으면서 이직을 하기 위해 회사 안에서 다른 포지션 공고를 찾아본다는 행위. 여태까지는 양심 상 회사에 있을 땐 일부러 구직활동과 관련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혹여나 뭐라도 잘못했다가 괜히 들킬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꼭 집에 가서 퇴근하고 하거나 주말에 했다.
그런데 사람은 금기와 금단을 건드리면 더 짜릿하고 재밌잖아? 현재 회사를 다니고 있으면서 거기서 다음 회사 갈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너무 재밌는데? 크크크.
어차피 하루종일 일하고 집에 가서 저녁에 구직 사이트에 접속해서 뭘 좀 하려고 하면 벌써 피곤해진 상태라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 구직 말고도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보니 괜히 미루기도 한다. 그동안 내 체력과 바이오리듬을 봤을 때 오전부터 점심시간까지가 가장 집중력이 좋기 때문에 차라리 그 시간에 집중해서 구직공고를 보자는 결론을 냈다.
그래서 요즘엔 점심시간에 낭독모임 과제를 하면서 구직 사이트 검색이라는 금기시되는 행동을 하며 점심시간을 알차게 보낸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직할 회사를 알아보는 것은 법에 저촉되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것은 아니다. 도의적인 영역의 문제에 가깝지.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지금 하는 일 또한 소홀히 하지 않는다. 양심에 찔리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무언가 찜찜한 것이 마음 한편에 남아있는 가운데… 그저 점심시간에 회사에서 구직사이트에 접속했을 뿐인데 기분이 업되고 행복 바이러스가 뿜뿜하기 시작한다.
점심시간에 구직 사이트에 접속하다가 결국 이직 준비가 잘 안 되어서 한동안 접속하지 않았다. 얼마 뒤, 헤드헌터한테 연락이 온 것도 있고 해서 오랜만에 점심시간에 구직 사이트에 접속했더니 마치 내가 접속했다는 걸 알고 있듯이(?) 그새 보안 상 접속할 수 없는 사이트로 지정되어 있었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