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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Jul 02. 2023

치약의 상징인 사람에게 치약 선물받기

2022년 회사 송년회 마니또 에피소드


     나는 위와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이 치약을 다 쓰기 전까지 육아휴직에 들어간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내가 먼저 퇴사해서 그녀를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썼었다. 오늘 쓸 에피소드는 그 글의 후속 편이다.


    새 치약을 뜯고 열심히 짜서 점심 먹고 이를 닦으면서 이 치약을 다 쓰기 전에 이직에 성공하길 다짐했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아직까지 이직을 못했고 그 사이 그녀는 육아휴직이 끝나고 무사히 복귀를 했다. 복귀를 했어도 원래 다른 팀인 데다 업무상 겹치는 게 1도 없고 우리 팀을 제외한 다른 팀원들은 재택근무를 많이 하다 보니 사무실에서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흘러서 어느새 연말이 되었다. 원래 그녀가 속한 팀은 우리 본부와는 별도로 분리된 팀이었었는데 얼마 전부터 우리 본부에 그녀가 속한 팀도 들어오게 되어서 뭔가 행사가 있을 때 기쁜 일, 축하할 일, 슬픈 일을 함께하게 되었다. 연말이 되자 코로나도 조금 잠잠해졌고 작년처럼 팀별 송년회가 아닌 코로나 이전처럼 본부가 다모여서 송년회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런 연말행사 할 때 술만 주구장창 먹는 건 의미가 없으니까 본부원들 서로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알아도 보고 친하게 지내라는 의미로 마니또와 선물 주고받기를 한다고 했다. 랜덤으로 마니또를 뽑아서 각자의 마니또에게 2만 원 내외의 선물을 준비하면 된다고 했다. 화요일인 오늘 마니또를 뽑고 행사가 있는 다음 주 월요일에 있는 송년회에 선물을 들고 가야 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택배로 선물을 주문해도 그동안 안 올 위험도 있었고 선물로 뭘 줄지 생각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나는 누굴 뽑으려나 궁금했는데 올해 입사해서 대화도 몇 마디 못 나눠 봤지만 띠동갑 아래인(즉 12살 차이가 난다) 통통 튀고 재기 발랄한 다른 팀의 신입사원이 당첨되었다. 그런데 파티션 너머로 저어기 멀리서 목소리 큰 그녀가 하는 말이 다 들렸다.


나 ㅇㅇㅇ 받고 싶다!!!


     누가 자길 뽑을지 모르지만 자기는 꼭 그 선물을 달라고 어필하는 듯이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청개구리다. 내가 그 말을 안 들었으면 모를까 예상되는 거 하면 재미없으니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 선물을 준비했다. 나중에 송년회에서 선물증정식에서 선물을 받고 뜯어본 그녀의 표정을 보니 너무나 솔직한 그 애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더라. 선물은 역시 달라는 걸 줘야 하는가 보다.


     다행히 마니또끼리의 선물 말고 본부 차원에서 본부원들에게 주어진 랜덤 선물이 있었는데 내가 받은 물건이 바로 그녀가 갖고 싶어 했던 거였다. 어차피 나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기분 좋게 그녀에게 줬다.


     나는 이렇게 내 마니또에게 선물을 전달했고 서로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가운데 이제 지목받지 못한 사람은 나를 비롯해서 다섯 명도 안 남았을 시점이었다. 과연 나를 마니또로 뽑은 사람은 누굴까? 하고 있었다. 나에게 선물을 줄 사람은 바로바로... 행사 내내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작년에 치약을 짜면서 ‘제발 이 치약 다 쓰기 전에 퇴사해서 육아휴직에서 돌아오는 그녀와 만나지 말자’ 했던 바로 그녀였다.


     나는 그녀랑 개인적으로 친하지도 않고 최근엔 대화도 나눈 일이 없었다. 나에 대한 정보가 없던 그녀는 선물을 고르는데 고민을 많이 했다면서 말을 꺼냈다. 그러다 카카오톡 선물하기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내가 선물함에 담아놓은 아이템이 눈에 띄어서 그걸 선물로 준비했다고 했다. 엥? 카카오톡 선물함? 내가 대체 거기에 뭘 담아놨지?


     몇 달 전에,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고를 때 이거줄까 저거줄까 고민돼서 선물함에 담아놨는데 그게 다른 사람들한테 보이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카카오톡 친구 중에 한 명이 그 선물함을 보고 그게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건 줄 알고 언제 담아놨는지도 모를, 기억도 안 나는 아이템을 나한테 선물로 준 적이 있어서 선물함 자체를 전부 비공개로 변경했었다.


     그런데 카카오톡 선물함에서 봤다니? 내가 아직도 선물함을 공개로 해놨나? 혹시 저번처럼 쓸데없고 별로 원하지도 않는 츄파춥스 사탕 100개 모음 이런 거 아냐? 생각하면서 그녀가 내미는 선물 꾸러미를 받았다.


 내용물이 뭐였냐면…
살짝쿵 비싼 치약이었다.


     이 고급치약도 위와 동일한 사유로 선물함에 담겨있었다. 내가 갖고 싶은 물건이라서 사람들한테 ‘이보시오, 이거 보고 나 사주시오’ 하고 담아놓은 게 아니라 친구들한테 선물을 보내야 할 일이 있어서 2,3만 원대의 스몰럭셔리 선물로 어떤 게 좋을까 하다가 봐 둔 걸 선물함에 담아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걸 내가 받고 싶은 걸로 착각(?)해서 그걸 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완전 착각은 아닌 게, 내가 써보고 괜찮길래 친구들한테도 줄까 말까 고민하긴 했다.


    계속 고급치약을 써볼까 했는데 고급치약은 양이 적어서 치약이 떨어지는 속도가 빠르기도 하고 이제는 생활비를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그래서 비싼 치약 한 번은 써봤으니 이제 비싼 거 사지 말고 그 돈 아껴서 집 사는데 보태야지 생각해서 비싼 치약은 이제 안녕... 하고 있었는데. 하하하.


      나는 회사 화장실에서 치약을 짜면서 이 치약 다 쓸 때까지 얼른 이 회사 떠나서 다시는 만나지 말자 생각했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치약을 선물로 받고 말았다.


      이건 무슨 의미? 앞으로 이 치약을 다 쓸 때까지는 이곳을 못 떠나리라는 의미? 아니면 나에겐 치약 하면 떠오르던 상징이었던 그녀에게 받았으니 그야말로 어깨 양쪽에 이직의 날개를 달아 훨훨 날아가리라는 의미? 뭐가 되었든 나만 의미를 아는 재밌는 선물이 되었다. 당분간은 선물 받은 고급치약을 잘 쓰고 다시 생활용품 코너에서 파는 일반 치약의 삶으로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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