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층에만 살다가 갑자기 1층에 살게 된, 살아가는 이야기
나는야 이제 독립 3년 차. 그리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쭈욱 아파트에만 살았다. 최근까지 고층에 살다가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1층에 살게 되었다. 그래서 1층에 살게 된 소감 아닌 소감과 장단점에 대해 써볼까 한다.
대여섯 살 때의 기억은 좀 흐릿하다.
나는 10살 전까지 주로 아파트 1층 또는 2층에 살았었다. 아마 아주 어렸을 때엔 1층에 살았다고 들었다. 엄마 왈 언젠가 한 번은 물난리가 크게 났는데 1층이어도 다행히(?) 바로 아파트가 땅이랑 붙어있는 구조가 아니라 계단을 한 네다섯 개 올라오고 나서 1층이 있었다고. 그래서 그 계단의 세 번째 칸 정도까지 물이 찰랑찰랑 차올라서 좀만 더 차올랐으면 집이 잠기고 난리가 날 뻔했는데 다행히 거기서 그쳤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었었다.
그리고 10살 때 25년간 살던 집은 무려 12층이었다. 요즘은 워낙 높은 아파트들도 많으니 12층 정도면 아주 우스운 높이겠지만 나에게는 그곳이 가장 높은 곳에서 산 것이다. 맨날 1,2층에서만 살다가 갑자기 12층으로 이사를 갔고 그때는 지금보다 더 키도 작고 어렸을 때여서 그런지 엄청 높고 무섭게 느껴졌었다. 어른이 되면서 높은 건물도 많아지고 내 키도 커지고 이 높이에 익숙해지다 보니 12층이 높다는 개념도 시들해졌지만.
그렇게 25년간 살던 집을 떠나와 이사 온 곳이 9층이었다. 그곳에서 1년 살고 처음으로 독립해서 살던 곳이 4층이었다. 4층만 해도 상당히 낮다고 느껴졌지만 그래도 완전 저층부와는 달리 나무들도 시야를 가리지 않았고 사생활 보호도 돼서 생각보다 안정감 있고 좋았다. 그리고 이번 이사를 통해 어렸을 때 살았던 1층으로 회귀하였다.
1층으로 이사 오게 된 경위는...
이전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이전 집에서 새 집으로 이사를 알아볼 때까지 이사일이 한 달~길어야 한 달 반 밖에 남지 않은 상황으로 한시가 급한 상황! 그나마 점찍어 뒀던 단지에 연락해 봤더니 이사 날짜를 맞추기가 힘들었는데 빈집이 있는 게 이거 딱 하나였다.
빈집이니까 ASAP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다고. 그래서 1층임에도 불구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 그러면 본가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 하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1층은 해가 안 든다, 보안이 위험하다와 같은 말들을 많이 들어왔지만 그냥 듣고 흘려 넘겼는데 실제로 살아보니 진짜로 그러하다(?). 먼저 장점부터 보자.
*1층의 장점*
1.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아도 된다. (출퇴근이나 외출할 때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시간 절약 가능)
2. 양쪽 옆집과 윗집에서 층간/벽간소음이 있을지언정 적어도 내가 걸어 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층간소음 항의를 받을 일이 없다.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꽤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풍광은 좋지만 십 몇 층, 이십몇 층 살아봐라? 어디 좀 나갈라치면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게 일이다. 회사처럼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꽉 차서 못 타는 일은 없지만 누군가 엘리베이터를 잡고 있으면 일찍 나온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간혹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거나 점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땐 계단을 이용해야 하거나 거꾸로 옆라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층까지 올라가서 거꾸로 계단을 통해 내려와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파생된 장점 하나는 바로 쓰레기 버리러 나가기가 간편하다는 것. 1층에 살면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금방 후딱 버리고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 좋아.
그리고 아파트에 사는 이상 층간/벽간소음은 피하기 어렵지만, 1층에 살면 적어도 내가 층간소음의 가해자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 우리 집 밑에 아무도 안 살거든! 걸어 다녀도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아이들이 있는 집은 오히려 1층을 선호하기도 한다. 1층에서도 뛰면 벽 타고 다른 집으로 울릴 수도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적어도 아랫집이 없으니 좀 더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있다는 거다.
자, 이제 1층의 어마무시한 단점들을 말해볼까?
*1층의 단점*
1. 문을 열어놓기 어렵다.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집 안이 보일 위험이 있어 항상 커튼치고 생활해서 답답함 + 채광 아쉬움)
2. 바닥에서 찬기가 올라오는 느낌이 든다.
3. 다른 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안이 취약할 수 있다.
4. 오래된 아파트의 경우 배관문제로 인해 1층에서 물이 역류하는 경우가 있다.
아무래도 1층의 가장 아쉬운 점이라 하면 채광문제일 것 같다. 새로 생긴 아파트라면 아직 나무가 우거지지 않아서 문을 열어놔도 채광에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오래된 아파트는 단지 내의 나무들도 기본 20,30년씩 되다 보니 1~3층 정도는 나무에 가려져 있다.
게다가 1층의 경우, 보안 문제 때문에 문을 함부로 열어두기도 좀 애매하다. 보안을 위해 쇠창살이 쳐져 있어서 문을 열어놔도 바깥 풍경이 밉게 보인다. 마치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기분. 낮에 잠깐 환기시키기 위해 열어놓는 것까진 괜찮지만 가능하면 밤에는 안 열어둔다. 여름밤에 창문 열어놓고 음악을 듣거나 바람 쐬는 걸 참 좋아하는데 이제 1층에 살면서 이런 건 하기 어렵게 되었다.
내 집이라면 베란다 창에 필름을 시공하던지 뭐라도 하겠지만 이곳은 전셋집이다. 내 마음대로 뭘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주인에게 뭔가를 요구하기도 애매한 상황. 결국 이것저것 찾아보다 그나마 저렴한 가격에 가능한 종이 소재의 가림막 커튼을 이용해 베란다 창을 가리고 베란다와 거실 사이 거실창은 커튼을 침으로서 해결했다.
둘째, 층간소음의 가해자가 되지 않는 건 좋지만 아무래도 1층이라 바로 지면에 붙어있다 보니 미묘하게 바닥에서 찬기가 올라오는 느낌이 든다. 이사 오기 전 집에서는 5월인데도 후덥지근해서 저녁에 문을 열어놓고 있곤 했는데 여기는 아직까지도 뭔가 쌀쌀하다.
그리고 아직 장마철은 겪어보지 않았지만 1층이 다른 층보다 더 습할 수도 있다는 소릴 들었다. 그리고 물난리가 나는 경우 1층은 물에 잠길 위험도 있다. 이번 여름에도 비가 많이 온다는데 집도 바로 천변 옆인지라 조금 걱정이 된다.
셋째, 보안에 취약할 수 있다. 1층은 공동현관이 있기에 아무래도 많은 사람이 드나든다. 게다가 구축아파트라 보안장치가 없어서 아파트에 아무나 드나들 수 있기 때문에 보안이 좀 더 취약하다고 느낄 수 있다.
넷째, 오래된 아파트의 경우 겨울에 베란다 배관이 얼어서 위층에서 세탁기 쓰면 1층으로 물이 역류하고 난리 난리를 치르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다. 나는 꼭대기 층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1층에서 물이 역류한다고 하면 그 기간 동안은 세탁기를 사용하지 못했다.
세탁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불편함도 있지만 그보다 1층 사는 사람들은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집안이 난리가 났다는 이야길 들었을 땐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으니 세탁 못하는 것 정도는 참아야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잘못하면 내가 그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될지도 모를 일. 제발 내가 사는 동안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단점 다 따져서 뭐 하겠는가. 보안과 채광 문제는 최대한 커튼으로 잘 가려보고 낮에는 가끔씩 커튼도 열어둬야겠지. 보안 문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문단속 잘하고 다니면 된다. 그리고 자연재해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최대한 아무 문제없기를 신께...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