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또 다른 송별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새하얀 봄의 눈과 마주치다

by 세니seny

이번이 세 번째 퇴사. 그러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익숙해지지가 않네.


보통 송별회라 함은 저녁때 많이들 한다. 그런데 팀 송별회는 임산부도 있고 다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스케줄을 맞춰야 되는 등 여러 이유로 점심으로 대체됐다. 대신 내가 팀원일 때 팀장님이셨던 분께서 본부 내 팀장들만 모아 저녁으로 비싼 식당에서 조촐한 송별회를 열어주셨다.


비싼 저녁 송별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 택시에서 내려서 3분만 걸어 들어가면 바로 집 현관문이지만 배도 부르고 해서 걷고 들어가기로 했다. 4월 초에서 중순으로 넘어갈 무렵이라 그런지 아직까지 벚꽃이 남아 있었다.


이것저것 음악을 듣다 아무래도 쌀쌀해서 이만 들어갈까? 하다가 마지막으로 이 계절이 지나가기 전에 에피톤 프로젝트의 <봄날, 벚꽃 그리고 너>를 듣자 싶어 틀었다. 뒷배경으로 깔리는 쿵 짝짝, 쿵 짝짝. 이것은 왈-츠. 이 리듬을 들으니 떠오르는 노래가 있어 이어서 다른 노래를 플레이했다. 바로 권순관의 <긴 여행을 떠나요>.


<긴 여행을 떠나요>, 권순관


이 노래를 나지막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데크길을 걷고 있는데...


어라?
봄인데 눈이 오네?


그런데 그 긴 길 중에 유독 특정 구간에만 눈이 내린다. 지금은 봄인데 눈이 웬 말이야. 내가 걷고 있는 데크길 구간 위쪽으로는 벚꽃나무가 있었다. 시커멓고 깊은 겨울밤 하늘, 그 어디서 인지도 모르게 눈이 뿅뿅 솟아 나오듯 벚꽃 잎이 솟아 나와 공기 중에 흩날렸다. 검은색 도화지에 하얀 물감을 짜내듯이 한 방울, 한 방울씩 밤하늘에서 하얀 점들이 내려왔다.


이 노래를 들으며 사뿐사뿐 걷는 지금 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보는 게 아쉽지만 혼자라고 해서 이 풍경 안 볼 거야? 아니잖아. 나는 혼자라도 부득부득 볼 테야.


그래서 이 긴 데크길에서 유독 봄 눈이 내리는, 이 구간만 왔다 갔다 하며 걸었다. 마치 이 노래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환상적인 풍경. 어떤 영상물에서 본 것보다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이 풍경이 세상에서 제일 멋졌다. 근래에 본 것 중 가장 뇌리에 남을 만큼.


전세 계약이 2년이니까 내년 봄에도 분명 이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발견한 나만의 봄 눈 명소다. 과연 내년에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상황에서 이 봄 눈을 바라보고 있을까? 기대도 되는 한편 걱정도 많이 된다.


그래서 이 노래가 끝나고 같은 앨범에 있는 <a door>를 선곡해서 들으며 집으로 걸어 들어왔다. 정확히 지금의 내 상태를 대변한 것 같은 노래 가사 그리고 전해져 오는 마음.


<a door>, 권순관
저 문을 나서면 어떤 세상이 있을지
눈물이 많은 네가 걱정되지만
한 발자욱, 한 발자욱 디디면 돼

<a door>, 권순관


나는 이제 하나의 문을 닫고
새로운 문을 연 것이다.


전 직원을 수신자로 넣고 발송할 퇴사 메일. 지금까지 그래왔듯 안 보낼까 하다 그래도 10여 년을 보낸 곳인데 이 정도는 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대신 남들하고 똑같은, 복사-붙여넣기한 듯한 판에 박힌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말들을 쓸까 고민했는데 이제 그 메일에 들어갈 내용을 대략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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