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우물에서 물 긷기
2024년 8월 중순 어느 날의 이야기.
우리 집에는
정수기가 없다.
본가에도 정수기가 없기 때문에 부모님과 평생을 산 나도 그 영향을 받은 거 같다. 아주 어렸을 때는 수돗물을 끓여 보리차 티백을 우려내서 마셨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집에 생수를 사다 두고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독립해서 살면서도 똑같이 생수를 사다 두고 먹었다. 정수기를 놓을까 말까 고민은 했는데 알아보기도 귀찮았고 직장 다니면 사실 집에 있는 시간 자체가 길지 않기 때문에 별로 쓸 일이 없었다.
그래서 보통 이마트몰 같은 데서 무료배송 금액 맞춰서 시킬 때 생수도 같이 시키곤 했다. 보통 생수 최대 배달 가능 수량은 2리터짜리 페트병 여섯 개짜리가 한 묶음인데 그거 두 묶음 즉 12병이다. 평일에는 야근도 많이 하고 집에 있어봤자 주말 잠깐이라 잘 안 먹을 때는 한 번 사놓으면 3,4달도 두고두고 먹었다. 그런 식으로 지난 3년간은 잘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나는야 백수, 홈 프로젝터이자 새 앞날 준비위원인지라 아무 수입이 없다. 그런고로 쓸데없는 소비는 자제하고 정말 필요한 소비만 해야 한다. 다행히 부식비는 별로 안 드는 게 쌀이고 반찬이고 뭐고 대체적으로 엄마가 1.5배쯤 산 뒤 나에게 일부 떼어주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엄마가 반찬을 만들어서 주기도 하니까 그럭저럭 버틸만하다. 우유나 계란 같은 기본적인 것만 내가 따로 사두면 충분하다.
그런데 물은 그렇지가 않다. 집에 하루 종일 있으니 물을 엄청나게 먹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리터 페트병 2개를 일주일 만에 먹는 거 같다. 그러니 생각보다 물이 빨리 줄어든다. 그동안은 생수 사두고도 혹시 물이 떨어질까 싶어 주문했더니 전에 사둔 것도 안 먹어서 오래된 거부터 먹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지난달 중순 오랜만에 온라인 장보기를 해서 물을 최대치로 주문했다. 그런데 6주가 지난 지금 물이 거의 다 떨어져 간다. 중간에 슈퍼에서 한두 번 정도 사 왔는데 날도 더운데 2리터짜리 물통 들고 오려니 죽을 맛이다.
그렇다고 이제는 회사 다닐 때처럼 시원시원하게 인터넷으로 장보기를 해서는 안 된다. 그때는 필요한 것 그리고 필요해 보이는 것 또 평소에 먹고 싶었던 것과 도전해보고 싶은 요리에 필요한 재료까지 골라서 카트에 담는데도 재정 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절대 아니 될 일이다.
내가 최대한 들고 올 수 있는 생수는 고작 2리터짜리 두병이다. 아파트 단지 입구 쪽에 슈퍼가 있지만 우리 집은 하필이면 아파트 단지에서도 제일 안쪽에 위치해 있어서 입구에 있는 슈퍼에서부터는 한참 걸어와야 한다. 시간으로는 5분밖에 안 걸리지만 짐을 들고 오면 체감시간이 두 배가 된다.
한참 머리를 굴리다 생각났다. 생수가 들어갈 만한 배낭이 있었지. 그러면 장바구니만 들고 갈 게 아니라 배낭을 들고 가서 배낭에 물 두병을 더 담아 오자. 그러면 총 4병을 가져올 수 있어!!! 집에 2리터 생수병이 4병 정도 있으면 당분간 안심할 수 있을 거 같다. 좋았어!!!
아직도 여름이라 덥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슈퍼에 다녀오려 했지만 역시나 나는 늦게 잠들었으며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 차라리 해가 떨어지고 나가기로 했다.
밀린 설거지도 해치우고 청소도 후딱 하고 쓰레기 버릴 것도 정리해서 나가는 길에 버리면서 슈퍼에 갔다. 해가 떨어지니 그래도 좀 나은 거 같다. 휴대폰 요금제를 바꿨더니 이번 달 데이터를 다 써버린 바람에 팟캐스트를 들으려고 하니 재생이 안된다.
영상이 나오는 유튜브도 느리지만 재생은 되는데 영상도 없이 소리만 듣는 팟캐스트가 왜 더 재생이 안 되는 거지? 데이터의 문제가 아니라 앱이 문젠가? 암튼 이거 씨름하다 보니 어느새 슈퍼에 다 와가네. 음악은 됐다, 마.
비장한 결심을 하며 슈퍼에 들어선다. 목표한 것 외의 다른 거, 쓸데없는 건 절대 사지 말자고 다짐에 또 다짐. 앗, 그렇지만 물이랑... 이왕 온 김에 맥주만 몇 캔 사자. 여름이잖아?
생수코너에 갔더니 생수 6병 묶음도 있지만 내가 애초에 들고 갈 수 없으니 그건 패스. 대신 한 병씩 있는 거 보니 1+1이다. 내가 찾던 게 바로 이거다. 바구니에 일단 담았는데… 어우… 무겁네? 손만으로는 이거 절대 못 들고 간다. 맥주는 욕심부리지 않고 작은 거 딱 3캔만 사고 돌아선다. 일단 장바구니가 무거우니 뭘 더 담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계산하러 갔다. 계산대에서 분명 비닐이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아주머니는 도대체 얘가 어떻게 물 4명을 다 들고 가겠는가 싶어서 그런지 '봉투 필요하댔죠?'라고 재차 묻는다. 아니요, 필요 없어요. 생수 2리터짜리 두 병과 맥주 3캔을 배낭에 담고 나머지 물 두병은 장바구니에 넣는다. 등에는 배낭을, 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출발한다.
무거우니 음악을 들으면서 정신이라도 그쪽으로 분산시켜야 될 거 같아 유튜브를 틀고 음악을 튼다. 다행히 데이터는 없어도 재생이 된다. 해가 떨어졌다고는 해도 여름은 아직 여름이다. 나는 등에 손에 짐을 들고 헥헥대다보니 금방 땀이 흐른다.
이건 마치 조선시대라면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는 것과 같은 거겠지? 바로 이게 현대판 우물에서 물 긷기 아닐까? 하며 스스로 떠오른 이 아이디어가 웃겼다. 다만 집 바로 앞에는 우물이 없고 그렇다고 우물을 팔 돈은 없어서 우물가(슈퍼)까지 가는 거지만.
그러다 떠올랐다. 엄마는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내에 사는 부모님과 떨어져서 할머니가 사는 시골에 맡겨졌다고 했다.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거의 중학생이 되어서야 시내로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고. 그래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이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때도 나이 든 할머니와 나머지 가족들을 위해 우물로 물을 길으러 다녔다고 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물지게를 지고 다녔을 엄마가 떠오르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