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방문한 동네 도서관은 너무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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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인 어제도 어김없이 부동산에서 연락이 와서는 토요일 오후 4시쯤을 집을 보러 오겠다고 했다. 나는 여태까지 집을 보러 오겠다고 하면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다행히 그동안은 내 스케줄에 맞게 연락이 오거나 서로 조정이 가능했었다. 그런 과정이 참 싫지만 집을 보여줘야 그중에 누군가 계약을 할 테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번 토요일만큼은 조정이 불발됐다. 내가 다른 시간으로 바꿔달라 하니 그쪽도 안된다면서 약속이 다음 주 월요일 퇴근시간 이후로 밀렸다. 자유다. 토요일의 자유!!! 내 집에서 사는데 내 맘대로 들어오고 나갈 자유!!!
내가 아무리 계획형 J 라지만 도서관에 갔다가 마음에 드는 책이 있어서 예상과 달리 더 머무를 수도 있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카페에 들를 수도 있다. 심지어 집 앞에 다 와서도 집 앞에 있는 천변을 천천히 산책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집 보여주는 5분도 안 되는 시간 때문에 스케줄에 질질 끌려다니게 되는 기분이 싫었다.
오늘만큼은 그게 없다. 이 집을 계약할 잠재적 고객을 놓치게 된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계약이 되려면 어떻게든 된다.
여태 집 보러 오면서 친절하게 인사했던 사람, 싸가지는 밥 말아먹고 예의 없이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 내 방 사진을 찍으려 했던 사람, 이런 구조의 인테리어나 가구를 어떻게 놓으면 좋겠다고 참고하는 듯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혼자 온 사람, 신혼부부 둘이 같이 온 경우, 신혼이나 곧 결혼 예정인데 둘 중에 한 명만 보고 간 경우 등. 또 모르지. 속으로는 집을 구하는 척하고 단순 임장 목적으로 둘러보려고 온 사람들도 한, 두 팀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경우가 됐든 내가 아무리 집을 깨끗이 해놓고 집안의 전등불을 싹 다 켜놓고 청소도 해두고 그들이 오는 시간에 맞춰 문을 열어주고 집을 보여줘도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아무도 계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오려고 했던 팀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 같아선 정말로 집 보러 오는 사람들한테 만원이라도 받아서 집 보여주는 나 같은 세입자한테 돈을 줘야 되는 게 맞다고 본다. 안 그래? 내가 5만 원 부르려다가 많이 참았다.
집주인은 월세나 오른 전세금을 챙기고 부동한 중개인은 중개수수료라도 받지, 전전긍긍하면서 집 보여주는 나는 대체 뭐야? 아무 대가도 못 받고 내 시간과 노동력을 쓰면서. 오히려 내 보증금을 무사히 돌려받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이 상황.
집주인, 부동산 중개인, 미래의 세입자 그리고 나 같이 이 집에서 나가려는 세입자 중 이 상황에서 내가 제일 전전긍긍하고 있다. 정말 최대한 양보해서 책임비 1만 원으로 책정한 거다. 그래야 나도 기분 좋게 집을 보여줄 수 있다. 심지어 계약의사 없이 집을 보러 온다고 하면 더더욱 그렇다. 이 무슨 이상한 문화냐고. 이래서 내가 집을 사야겠다고 결심한 거다.
오늘 여기서 빌리기로 정해둔 책만 찾아가지고 가야지, 생각하고 왔다. 내가 낯선 도서관에 찾아가는 이유는 바로 새로운 책들과 만나기 위해서이다. 기존에 다니던 도서관이 생긴 지는 오래돼서 책이 안정적으로 많지만 한 군데를 오래 다니면 서가를 돌다 책이 눈에 띄는 경우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뭔가 재미가 없달까?
그런데 새로운 곳에 오르면 다르다. 이는 도서관마다 소장하고 있는 책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는 대체로 갖추고 있지만 나머지는 희망도서라든지 다른 사유에 의해서 달라진다. 또 서가의 위치, 구조, 조명, 책의 배열 등 모든 게 달라진다. 그러니까 책이라는 속성만 같고 나머지 변수가 전부 달라지니까 낯선 도서관에 가면 새로운 책을 만나게 된다. 아니, 만날 수밖에 없다.
사람 두고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니 될 일이지만 메인으로 다니는 도서관을 두고 언제든 새로운 도서관을 찾아가는 건 괜찮다. 아니, 오히려 권장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책과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미리 정해둔 것들만 딱 빌리고 가려고 했는데 내가 발길을 끊은 2년 사이에 이 도서관에도 새로운 책들이 늘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곳이 낯선 도서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서가 한 칸, 한 칸을 지날 때마다 이 책, 저 책 전부를 손에 닿아보며 이것도, 저것도, 저것들도, 다 전부 읽고 싶다는, 아니 읽어야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좋은 곳을 집 앞에 놔두고도 그동안 방치했다니. 이제 이사 갈 때가 다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니. 최근 일 년간은 홈프로텍터 즉 백수로 지내면서 하루 종일 도서관에 갇혀서(?) 책 읽기와 같은 것도 충분히 시도해 볼 수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다음 주부터 출근이 예정되어 있는 웃픈 상황이다. 인생이 이렇습니다.
그래서 남은 한 달간, 부지런히 집과 도서관을 걸어 다니며 책을 읽어야지. 다시 한번 여기서 이 도서관과 찐하게(?) 시간을 보내고 최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지 않도록 해야지.
진작 그럴 것이지, 꼭 이별을 앞둔 사람 심리가 이렇다. 이사를 가면 원래 다니던 도서관과 접근성이 좋아지기에 오랜만에 찾아간 그곳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기를, 오히려 그곳이 다시금 낯선 도서관이 되어 새로운 책들을, 모르는 세계를, 다시금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글의 초안 또한 마치 카페 같은 분위기의 동네 신식 도서관에서 조금이라도 이곳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서 곧 비가 쏟아질듯한 하늘이 정면 통창으로 훤히 보이는 바 테이블 자리에 앉아서 썼다.
덧.
결국 자가도서대여 반납기를 찾아가다가 헤어지는 애인한테 미련 남은 여자처럼 이곳을 곧바로 떠나지도 못하고 3층을 한 바퀴 쭉 돌다가 마음에 드는 책들을 발견해 핸드폰 메모장에 제목을 적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한참 서가를 산책하다가 마음에 드는 시집 한 권을 발견해 기어코 세 권만 빌리기로 한 것을 결국 네 권으로 늘리고서야 겨우 도서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