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왜 두 번째 기회가 왔을 땐 또 안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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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2023년의 어느 여름날.
코로나 때문에 그동안 중단됐던 본사 방문 프로그램이 올 가을에 부활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1차 때 나를 추천하셨던 분이 또 나를 추천하셨다는 거다. 나는 애매하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면서 팀장이 되어버린 상태라 이전글의 2번 조건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보직이 없는 사람이 우선권이 있는데 나는 팀장이 되면서 보직이 생겨버림)
하지만 이미 이 회사에 근무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팀장이 된 지 얼마 안 됐기에 재무팀장이 되었다고 해도 당분간 본사에 출장 갈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팀장이 되면 더 고생할 테니 약간의 보상차원에서라도(?) 나를 추천하셨던 것 같다.
이건 내가 오케이 하기면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간다고 못하겠는 게 이미 이때도 그만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본사 견학까지 보내줬는데 다음 해에 바로 그만두면 회사에서 완전 배신감 쩐다고 느낄 거 같아 선뜻 가겠다고 못하겠는 거지. 물론 나보다 오래 다닌 그 팀원 눈치도 여전히 보이고. 이제는 후자의 이유는 그렇게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전자의 사유가 더 컸다.
그런데 여태 본사방문 프로그램을 한 두세 번 했나? 그런데 거기 갔던 사람 중에 지금 남아있는 사람? 인사팀 사람 빼고(심지어 인사팀 인솔자 중 한 명도 오래 다니지 않고 그만둠ㅎ) 1,2명 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렇게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되긴 한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1,2년은 더 다니고 퇴사했는데 나는 곧 내년에 그만둘 기세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못 간다는 핑계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지난번처럼 일본에 공연을 보러 간다던가 하는 것도 없었다. 뭔가 비벼볼 건더기가 1도 없는 것. 미리 여행이라도 잡아놨음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니 거짓말도 못하겠고.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며칠이 지났다.
지난달에 했던 건강검진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유방 쪽에 문제가 있는 거 같으니 병원에 가보란다. 강남역 근처에 있는,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유외과에 갔다. 선생님은 초음파를 슥슥 30초도 안 보더니만 이 병원에 있는 장비로는 자세히 보이지 않으니 더 큰 병원으로 가라면서 소견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두둥.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안고 좀 더 큰 병원으로 갔다. 대학병원은 추천서가 있어도 초진 예약을 잡으려면 몇 달씩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대학병원은 아니지만 이 분야에서 나름 이름이 있는 그래도 중급정도되는 규모의 병원에 갔다. 여기는 대표의사한테 1,2주 만에 예약이 잡혔다.
그런데 병원에 갔더니만 의사 선생님이 심각하게 맘모그래피수술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어려운 수술은 아니라는데 어쨌든 수술은 수술이지. 그 말을 듣고 나니 심난하더라.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래도 그 경과도 봐야 되고 수술하면 또 병원도 왔다 갔다 해야겠지. 그런데 하필 그 수술을 예상하는 시점과 본사 방문 프로그램으로 일본에 가야 하는 날짜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마음도 불편하고 이래저래 업무도 많고 해서 가기 싫은 데다 어쩌면 수술까지 할 수도 있는 상황. 게다가 수술 날짜도 정확히 언제로 잡힐지 모르는 상황.
병원에 다니는 건 윗선에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뭐 좋은 일도 아니고. 병가를 낼 정도의 심각한 일이 아니라면 병원에 진료받으러 가는 건 휴가 내고 개인일정 있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본사 방문 프로그램을 거절하려면 병원에 가서 검사받은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실은 건강검진에 갔는데 이렇다더라, 그래서 나도 좋은 기회라는 건 알지만 병원도 가야 하고 마음도 신경 쓰인다고. 게다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서 날짜 잡고 어쩌고 하면 그런 상태로 가도 마음이 불편할 거 같아서 안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알겠다고 하시면서 결국 그 자리는 본부 내 다른 팀원에게 돌아갔다.
나의 투병... 까지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건강상태를 상사에게 알리는 바람에 이 소식이 결국 대표이사님 귀까지 들어갔다. 어찌어찌 대학병원에 예약을 잡아주셔서 한 달 만에 대학병원의 교수님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 그 병원에서는 심각한 것이 아니니 경과를 지켜보자고 해서 수술은 하지 않았다. 큰 병으로 의심될 때는 병원을 여러 군데 가 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닌 거 같다. 특히 그게 정확히 진단이 나오지 않는 경우엔 더더욱.
지난 첫 번째 기회는 '내가 가기 싫다 + 그다음 주 출국 일정'때문에 스스로 걷어찼다 치자. 이번엔 첫 번째와 같은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고민하던 차에 이런 식으로 나의 건강을 이용해(?) 상황이 해결되었다.
결과적으론 내가 바라던 상황ㅡ본사 방문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는 것ㅡ이 됐지만 한편으론 약간 소름 돋았다.
내가 온 마음을 다해 가기 싫다는 걸 보고 내 안의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거대한 흐름이 결과적으로 유방에 혹을 만들어서까지(?)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 같아서. 물론 건강검진 결과에 나왔던 그 혹 비슷한 것들은 이미 몇 달 전부터 내 몸 안에 내재되어 있었을 것이고 우연히 이 참에 발견된 것이지만 말이다. 타이밍 문제에 가깝기도 하다.
아무튼 회사를 10년간 다니면서 두 번이나 본사에 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 안/못했다.
결국 내 생에 최초의 도쿄 방문은 그로부터 1년 뒤에 이루어졌다. 무사히(?) 퇴사를 하고 내돈내산으로, 마음 편하게 열흘간의 여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