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이 아닌 '내 집'에서 아프다는 것에 감사하기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그리고 다음날 일어났는데 어째 어젯밤보다 더 상태가 안 좋다?
이건 열이다. 몸에서 열이 나는 거다. 열부터 내려야겠다 싶었지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서 한참을 옆으로 뒤집어눕다를 반복하다 겨우 일어나서 타이레놀 한 알을 먹고 다시 누웠다. 그래도 약이 안 듣길래 성인은 1회에 2알을 먹어도 된다고 쓰여있어서 한 알을 더 먹었다. 그러고 나니 약발이 좀 들었다. 침대에 누워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내 집이구나.
나는 여행지에 가도 잘 아픈 편은 아닌데 딱 한번, 유럽 발트 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를 여행할 때 심하게 감기를 앓은 적이 있었다. 이때는 감기가 안 걸리면 이상한 상황이었던 게, 그 전날 소나기 치고는 비가 엄청 많이 내렸는데 우산 없이 밖에서 비를 쫄딱 맞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내린 소나기로 끝인 줄 알았는데 이건 1차에 불과했다. 그러고 나서 1시간 정도 있다가 여전히 우산 없는 상태로 2차로 비를 왕창 맞았던 것이다. 그래도 밖에서 저녁도 잘 사 먹고 어찌어찌 시내로 돌아와서 비에 젖은 옷을 말리고 씻은 다음 밤에 시내에 나가서 알차게 무료 불꽃놀이까지 보고 들어왔는데...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제대로 감기에 걸린 것이다. 열이 펄펄 끓었다. 나는 여러 명이 쓰는 숙소를 선호하지 않아서 혼자 쓰는 숙소에 머물고 있어서 내가 아픈 걸 알아줄 사람도 없었다.
열도 있고 정신도 몽롱해서 가져온 약으로 긴급처방을 하고 누워있었다. 혼자 있으니까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마음이 편하긴 했는데 낯선 타국 땅에서 아파서 누워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여행 중에 이렇게 아픈 건 처음이었다.
아플 땐 잘 먹고 쉬어야 해결된다. 낯선 방에 누워서 생각했다. 그래도 오늘은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일정이 아닌 게 다행이라고. 일정 상 이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도시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으면 난감했을 텐데 오늘은 그나마 가고자 했던 곳만 포기하면 되니까. 다행히 그날 일정이 시내관광이어서 여행을 못하는 것에 대한 마음을 비울 수 있었다. 어차피 돌아다닐 컨디션도 아니었고.
내 방에 누워서 끙끙 앓고 있자니 그때 생각이 났다. 그때도 비슷한 증상을 겪고 방이라는 공간에 누워있었다. 이사를 오고서도 지난 한 달간 낯설었던 내 집이, 내 방이 이제야 엄청 다정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때와 똑같이 아프지만 그때처럼 다음날 어디로 가야 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영어도 잘 안 통하는 이 도시에 대체 어디 가서 약을 사야 살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사 온 지 한 달밖에 안되었을지언정 그래도 '내 방'에 누워 있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근처에 사는 엄마가 먹을 거랑 빨래거리를 갖다 주러 잠시 왔다 가면서 혹시 모르니 코로나 검사를 해보라면서 자가진단키트를 주고 갔다. 나는 바득바득 냉방병일 거라고 우겼지만 혹시 모르니 검사를 했다.
여태까지 코로나에 한 번도 안 걸리고 잘 피해(?) 왔었다. 마스크 제한 해제가 풀린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모이는 대중교통이나 사무실에선 마스크를 쓰는 편에 속했다. 가끔 마스크를 안 갖고 나오기도 하고 사무실에도 전처럼 9시간 내내 쓰고 있진 않고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고 있지만.
최근에 목이 아파서 스트렙실을 먹었는데 약이 안 듣길래 이비인후과에 갔었다. 그때 코로나 검사를 할 거냐고 물어봐서 안 한다고 하고 진료실에 들어갔더니 의사가 코에 약품을 칙칙- 뿌리고 코만 보길래 그제야 코로나 검사한다고 했더니 이미 약을 뿌려서 안된다네? 그때는 집에 와서 자가진단키트로 검사를 했는데 시약을 조금만 뿌려야 되는데 다 짜버려서 검사가 아예 잘못되어 버린 적이 있었다. 그 뒤로 별다른 증상은 없었기 때문에 코로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랬던 적이 있었기에 이번엔 사용설명서를 자세히 읽어보고 조심스럽게 검사를 했다. 그런데 벌써 약을 뿌리자마자 T선이 나타나고 그위 쪽에 C선이라고 검사가 제대로 됐는지 안 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선이 떴다. 검사가 제대로 된 것도 맞고 T선이 나타나면 약하게든 진하게든 코로나 증상이 있다는 뜻이라고 쓰여있었다.
그동안 그렇게 잘 도망 다녔는데 결국 걸려버렸네...^^ 그나마 타이레놀 두 알 먹으니 정신이 차려져서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길래 엄마가 해온 죽을 먹고 또 누워있었다.
내일부터 하필이면 마감주간이라 제일 바쁠 때인 데다 팀장님이 마지막 출근하시는 일주일이라 인수인계 잔뜩 받기로 했는데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일도 여유로운 시기도 있는데 왜 꼭 바쁠 때 이러는 거냐고요. 나도 좀 쉬어봅시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