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 조사실에서 나오니 맥이 풀렸다
짐을 주섬주섬 챙겨서 다시 좁은 복도를 빙빙 돌아 엘리베이터 앞으로 나왔다. 그런데 1층 로비로 내려와서 경위님이 급 물어보신다. 그런데 그 장비... 중고로 팔면 얼마나 나와요? 이렇게 갑자기 묻기 있기 없기? 이게 바로 허를 찌르는 수사 기법인가?
시장에 대량으로 유통되는 기계라면 시장가가 있으니 가격산정이 쉬운 편인데 문제는 대량으로 유통되는 장비가 아니다. 그래서 정확한 시장가라는 게 없고 그때그때 상황 따라 또 우리가 본체에 붙여서 파는 아이템들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가 있어서 변수가 많다. 이 모든 걸 다 설명해야 하나 해서 약간 멍해졌다가 가격 산정이 어렵다고 얼버무리고 그 자리에서 헤어졌다.
나는 이 고소인은 모르지만 피고소인이 우리랑 거래하던 업체이기 때문에 최근에도 돈 갚으라고 대표한테 연락한 적도 있었다. 피고소인이 고소인을 속이거나 편취해서 근저당권 설정에 동의하게 만들었는지 여부는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문제다.
도대체 근저당권 설정자인 우리가 어디까지 파악하라는 거냐고. 변호사님께 처음에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고 얘기했을 때, 피고소인들이 고소인을 홀리거나 속여서 근저당권을 설정했을 때의 법적인 효과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이런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고 했다.
나는 일찍이 담보나 보증에 대해서는 절대로 하면 안 된다는 (특히 보증!!!) 신념이 있다. 엄마로부터 전해 듣기론 아빠가 어렸을 때는 친가가 기와집일 정도로 잘 살았었다고 한다. 그런데 친할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망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었다고 했다. 그래서 보증 같은 건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마음깊이 새기고 있다. 그러니 아마 이 근저당권 설정을 위해 토지를 제공해 주신 분도 사탕발림에 넘어가거나 해서 토지를 제공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추측정도 해 볼 뿐이다.
아무튼 일개 재무팀장이 경찰서까지 방문하다니. 팀장 맡은 지 5개월 만에 팀장생활 끝판왕 찍은 거 같다. 나 이제 곧 팀장 그만둘 거니까 더 이상 버라이어티한 일은 그만 벌어졌으면 좋겠다. 제발…!
이런 마음 상태론 사무실 바로 들어가도 집중이 안될 거 같았다. 그래서 마음도 좀 가라앉히고 방금 있었던 일을 메모도 해놓을 겸 사무실 근처 스타벅스에 왔다. 달달한 핫초코를 마시며 친구에게 썰 풀듯 핸드폰 메모장에 방금 있었던 일을 다다다닥 적어 내려가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근처에서 무슨 고소 고발이, 계약이, 추심이, 금액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나이 지긋한 중년 두 분이 법정 소송과 관련된 일이 있는지 아까 경찰서에서 들었던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라. 하필 그들의 이야기가 아주 잘 들릴 지근거리인 건너편 테이블에서 그러고 있더라.
내 얘기로도 이미 충분히 머리가 아픈데 남의 이야기까지 듣고 있으려니 영 기분이 좋지 않다.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라면 모르는 외국어 같이 흘려듣고 카페에 내부에 흐르는 BGM처럼 듣고 넘길 수 있는데 하필 내가 아주 조금 아는 거다 보니 단어들이 귀에 팍팍 꽂히네. 아오. 머리 아파.
참 세상에 우리 회사 말고도 이런 일들이 세상천지 많이 벌어지고 있구나. 한쪽은 채권자이고 한쪽은 채무자인 듯 열심히 열변을 토하는 두 분. 카페에서 머리 좀 식히고 들어가려다가 저분들 때문에 카페 BGM이 영 별로가 돼버려서 사무실에 돌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