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후임자의 채용의뢰서를 내 손으로 작성하기
그런데 팀장 3개월 차, 퇴사를 결심했던 그때는 곧 연마감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이었어요.
만약 그때 퇴사하겠다고 말하고 그만둔다면 새로운 사람이 온다고 해도 감당이 안 될 거고 어차피 저도 바로 이직자리를 구한 것도 아니니 이것까지는 마무리 짓고 나가자는 마음으로 버텼습니다. 적어도 재무팀장으로서 회계감사는 한번 마무리해 봤다, 정도로 정리하기로요. 물론 내년 초에 거의 받을 게 확실 시 되는 인센티브의 힘도 없다고는 못하겠네요.
그래서 이제 감사보고서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고 해서 퇴사를 하려고 합니다.
중간중간 본부장님이 신경 많이 못 써줘서 미안하다, 팀장 하다 보면 분명 보람된 순간이 있을 거고 그런 순간들을 만들어가면 된다, 아직 경험이 없으니까 그런 거다, 더 해보면 나아질 거다, 와 같은 좋은 말들을 해주셨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쨌거나 내가 그렇게 노력할 마음이 더 이상 없었으니까.
당장 이직하는 것은 아니라 했더니 그러면 다니면서 알아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시간을 좀 더 주시겠다고 한다. 아니, 그만둘 사람 오래 붙잡아둬 봤자 뭐 하냐고요. 휴식도 취하고 여행도 갈 생각이라 3월 마감까지만 마무리하고 즉 4월 초까지만 출근하고 싶다고 했다.
면담이 길어질 걸로 예상했는데 의외로 한 시간도 안 돼서 끝났다. 내가 워낙 확고하게 보였기 때문이겠지. 본부장님도 내가 이런 얘길 갑자기 하니 당황하셨겠지만 내 생각을 존중해 주신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면담에서 나의 퇴사 이야기를 꺼내기 전 올해 중순 육아휴직 들어가는 팀원의 대체인력 이야기도 하고 있어서 내 자리와 육아휴직자 몫까지 두 명의 채용의뢰서를 작성해 달라고 하셨다. 그리고 조만간 다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네 알겠습니다, 하고 방을 나왔다. 내 손으로 내 후임자를 뽑는 채용의뢰서를 쓰게 될 줄이야. 겁나 웃긴 상황이네. 그나저나 내 자리 채용의뢰서야 쓰면 그만이지만 육아휴직은 내가 제도를 잘 모르니 인사팀에 확인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인사팀장에게 문의를 했다. 관련해서 잠깐 얘기하고 싶다고 하니 시간을 내서 회의실에서 만났다.
먼저 육아휴직 대체자 얘길 하면서 일반적으로 채용기간이라든지 어떤 식으로 뽑는지 등을 물어봤다. 그리고 내 얘길 건넸다. 나도 퇴사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채용의뢰서가 두 개 올라갈 거라고.
인사팀장도 놀란 눈치. 차라리 어디로 옮기게 돼서 퇴사한다고 하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데 아무도 나를 등 떠밀지 않았는데 내가 강력하게 퇴사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니 퇴사를 결심하게 된 대강의 계기와 그에 대한 배경설명이 구구절절 필요했다.
이제 회계일은 그만하고 직무를 바꿀 거라 했다. 그런데 내 얘길 듣고 자기 와이프가 생각난다면서 사실 부인분도 일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다. 내가 인사팀장님의 부인분을 만난 적은 없지만 듣기로는 금융권에서 오래 일했다고 들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와이프 분의 퇴사 사유도 나와 비슷하게 지금까지 하던 일(직무)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어서라고 했다고.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고 했다.
회의실을 나와 두 명 분의 채용의뢰서 초안을 작성했다. 사람을 아무리 빨리 뽑아도 내가 다음 팀장과 마주치는 일은 없겠지. 안 마주치고 싶다.
그리고 이제 내일, 팀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