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le listening to this Music,
낮수성 - Norwegian Wood
오랜 기간 준비했던 직장인 밴드의 9월 공연을 잘 마쳤습니다.
밴드가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되면, 노래만 하지는 않습니다.
공연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가볍게 분위기를 환기할 수 있을 만한 멘트를 간단하게 해요.
보통 그건 프런트맨이 맡고, 프런트맨은 보통 보컬이 하죠.
어떤 말을 하고 언제 공연을 시작할지 내가 정할 수 있는,
공연의 원활한 진행을 볼모로 잡은 1~2분의 짧은 이 시간에는
그 누구도 나를 건드릴 수 없고, 제 말을 들어야 해요.
프런트맨이 가지는 작은 권력입니다.
제가 행사한 권력은
"여러분은 첫사랑을 기억하시나요?"였습니다.
제가 있는 밴드 연합은 이미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으신 연배의 분들이 다수입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잘 꾸려 가고 있는 분들에게 첫사랑이란,
기억 안 나는 척해야 하는 그 어떤 것이기도 합니다.
외부 관객이 찾아오는 공연도 아닌지라, 관객은 거의 대부분 밴드연합 내부 인원입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 제가 했던 질문은 발칙하긴 했죠.
"ㅎㅎ네, 안 나는 걸로 하시죠ㅎㅎ"
"제게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흑백 느낌의 사진 몇 장으로 남아있어요.
같이 걷던 길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좋았던 기억,
같이 먹었던 군것질이 참 맛있었던 기억, 그런 것들이요.
그 사진들은 움직이지 않고, 앞으로도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어쩌면 잃어버릴지도 모르죠"
"아마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것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들려드릴 첫 곡입니다.
부동의 첫사랑, 10cm 원곡이구요.
사운드박스가 들려드립니다"
전 놓치지 않았어요.
아니, 놓칠 수가 없었어요.
첫사랑이란 키워드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똘망똘망 맑은 눈빛을 가진 분의 눈빛이 흐려진 것,
미소를 띠던 분의 미소가 순간 사라진 것,
시선은 절 보고 있지만 초점은 그 너머 어딘가에 있던 분....
관객분들의 변화를요.
네, 제가 짓궂었죠. 그렇지만 사실 즐거웠어요.
온전히 제 말에 집중하고 있고 이제 우리 팀의 공연에 집중하게 될 테니까요.
여러분은 첫사랑을 기억하시나요?
"다음 편이 기대되지 않는
예상 가능한 엔딩만 남은
로맨스도 뭣도 아닌
나의 부동의 첫사랑"
곡의 가사를 따라가면 알 수 있지만,
해피해피 한 내용은 아니에요.
그런데 뮤직비디오를 보니,
후반 까지는 흔한 첫사랑 성공 클리셰로 그려집니다.
가사 내용과 달라 다소 의아했는데
마지막 학우들의 축복 속에 러브레터를 전달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메가폰을 든 권정열 님이 등장합니다.
모든 게 촬영이었던 거죠.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아이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표정으로 촬영장을 떠나며 뮤직비디오는 끝이 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가사가 이해가 갔습니다.
공연은 잘 마쳤답니다.
그리고, 더 잊기 전에 제 이야기를 좀 더 길게 써 볼까 하다가 그만뒀습니다.
오랜 사진의 앞뒤 기억을 찾아 머릿속 서랍을 샅샅이 헤치다 보니,
정말 잊고 싶던 기억까지 함께 딸려 올라와 손에 먼지가 너무 많이 묻더랍니다.
마치 툭 건들면 부서질 것 같이 희미하지만
그렇다고 잃어버리면 큰일 날 것처럼 고이 간직해 본 적은 없어
어디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던져놓고 잊고 살았고, 다른 걸 찾다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
아.. 이게 있었지. 하는 거죠.
기억이 없어져도 괜찮고, 남아있어도 괜찮습니다.
계속 남아있더라도 부동의 첫사랑은
지금의 제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거고
잊게 된다면, 어떤 일이 있었는데
그랬다는 걸 잊어버렸다는 것조차 모를 테니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