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_취향의 재발견

②_눈물샘 폭발 수업

by 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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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 박스에서 ‘취향의 보완재’ (2) 번 또한 트렌드(trend)가 원인이 되어, 일종의 보완재 형태로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트렌드(trend)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자기 사랑’ 트렌드가 애완견의 증가 추세를 가져왔다고 보는 관점이다. 여기서 (1) 번 유형과의 유일한 차이점은, 반려동물의 증가 원인을 단순히 ‘동물 사랑’으로만 여기는 게 아니라 ‘자기 사랑’을 좀 더 근본적인 뿌리 원인으로 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면서, 본인이 원래 좋아했던 취향에 해당되는 동물을 향한 수요와 소유까지 함께 증가하는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1) 번과 (2) 번의 두 가지 차이가 별로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그 작은 차이 덕분에 (3) 번이나 (4) 번 같은 또 다른 유형들도 더 파생된다는 흥미로운 점도 나중에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1) 번과 (2) 번의 그 작은 차이는 무엇일까. 둘 다 모두 ‘동물을 사랑하는 취향’ 때문에 반려동물이 증가했다고 보는 것은 동일하다. 다만 (1) 번 유형은 예전과는 달리 동물을 갑자기 좋아하게 된 사람들의 ‘새로운 취향’이 영향을 끼친 것이고, (2) 번 유형은 원래부터 동물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기존 취향’이 영향을 더 미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번의 경우는 동물 사랑의 ‘새로운 취향’의 소유자가 늘어난 것이라면, (2) 번의 경우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덕분에 그들이 원래부터 좋아했던 ‘기존의 취향’에 해당되는 동물의 소유가 늘어난 것이다.



그런데 (2) 번의 경우는, 애초부터 원래 동물을 좋아했던 취향의 소유자들이 왜 갑자기 현대의 증가 추세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것인지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원래부터 동물을 애정했던 사람들일수록 당연히 예전부터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새로운 트렌드 변화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테니깐 말이다. 그런데 동물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실제로도 모두 다 항상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는 거라고 봐도 되는 걸까? 가족이나 친구처럼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도 물리적 거리 등의 이유로 항상 함께 지내지는 못하는 것처럼, 아무리 동물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여러 가지 사정상 모든 동물 애호가들이 전부 다 반려동물과 늘 함께 살고 있을 거라고 단정 짓는 것은 무리수에 가까울 수도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만약에 자신의 취향이 100가지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마음껏 만끽하면서 누리거나 원하는 대로 다 가지면서 살 수는 없는 법처럼 말이다. 금전적 여유가 풍족하게 넘쳐난다면 어느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적 여유나 체력적 여유 같은 것은 누구든지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서 아무리 좋아하는 게 많을지라도 모든 것을 다 충족하면서 살아가는 행운아는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선순위에 따라서 가장 좋아하는 취향들 위주로 추구하면서 살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솔직히 일상생활이 너무 바쁘고 버거우면 자신의 취향이 뭔지도 모르고 살 때도 허다하지 않은가. 그만큼 한 가지 정도의 취향이라도 잘 발견해서 꾸준하게 충실히 따르고 사는 것조차도 쉽지 않을 만큼 삶이 팍팍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예전의 내 모습 또한 그랬듯이 말이다.



평소에 분주하고 피로한 일상에 치이면 작은 취미 활동이라도 시도하기는커녕, 나의 선호나 취향이 무엇인지 파악할만한 여유조차도 가질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아예 처음부터 나 스스로를 별다른 관심사나 선호하는 취향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직장인 생활을 벗어났던 기간에 잠시라도 여유가 생기니깐 그제야 내가 무엇을 조금 좋아하는지도 차츰 감을 잡기 시작했던 것 같다. 회사 생활만 했을 때는 그저 나에게 주어진 것 한 가지만 파고드는 성향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내가 여러 호기심도 꽤 있는 인물이라는 것도 그렇게 뒤늦게 알아차리기 시작했으니깐 말이다. 전혀 먹어보지도 않은 음식은 내가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 수조차도 없는 것처럼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떤 취향에 원래부터 무심한 성향이었던 것이 아니라 무심해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거의 항상 지쳐있었던 기억들만 한 가득인 거 같았으니깐. 그런 나 자신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꽤나 늦어버린 시점 같아서 왠지 모를 서글픔도 어디선가 모락모락 피어올라오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거든.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디선가 이런 심정을 매우 닮은 감정을 확 느껴본 적이 있던 것 같다. 퇴사 후 영어가 아닌 다른 외국어 수업을 그냥 한번 무작정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그 기분이 아마도 그런 감정이 아니었을까. 첫 수업의 그때 그 느낌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살짝 어색한 마음으로 그 작은 강의실에 들어서서는 중간 자리쯤으로 찾아서 앉으니깐 왠지 모를 설렘과 함께 낯섦이 반반쯤 섞인 듯한 어정쩡한 기분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뭔가 되게 좋은 느낌의 신선한 새싹처럼 파릇파릇하게 솟아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갑자기 대학시절 새내기로 돌아간 것 같아서 설레었던 것인지, 아니면 아무런 현실적인 목적도 없이 그저 단지 ‘하고 싶은 마음’의 순수한 바람으로만 등록을 했던 나 자신이 어색할 정도로 감격스러웠던 것인지, 과연 어떤 감정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냥 좋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첫 수업을 듣고 있는 와중에, 파릇한 새싹처럼 들떠 있던 그 기분이 갑자기 중간에 울컥하는 감정으로 치솟으면서 소용돌이치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새로운 언어의 신세계에 한걸음 내디딘 신생아의 호기심 어린 발걸음처럼 ‘아장아장’ 하듯이 분명히 그 수업을 너무나 재미나게 천천히 잘 듣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날라 온 뿅 망치로 뇌리를 ‘뙁’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어떤 리얼(real)한 깨달음이 쓱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에, 나의 눈가 주변에서 자꾸만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불시에 들이닥친 불청객처럼 나를 화들짝 놀라게 만든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나 스스로가 감당이 잘 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어머. 이게 웬일이야. 즐거운 어학원 수업을 듣고 있는데,
난데없이 눈시울이 왜 뜨거워지는 거야.
이걸 어찌 가려야 하지. 아이고.’


너무나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자꾸만 새어 나오려고 하는 눈물을 억지로 참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나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한가득 고여서 그렁그렁 맺혀있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움직이면 바로 쭉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어느 방향의 어느 각도로 흘려보내서 닦아내거나 말려야지만 티가 나지 않을지 궁리하면서 용을 쓰는 내 모습이 어찌나 애처롭던지. 결국에는 그리 샘솟던 눈물들을 어떤 기묘한 스킬들로 애써 숨겼는지는 기억조차도 잘 나지 않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기억이 난다. 어디선가 느닷없이 쳐들어와서 나의 눈물샘을 폭발시켰던 그 뿅 망치의 깨달음 말이다. 그건 확실히 기억이 난다. 아주 신나는 마음으로 신입생처럼 그 수업을 흥미롭게 듣고 있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신기했는데, 그와 동시에 궁금증 하나가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왜 학창 시절에는 수업을 이렇게 재미있게 듣지를 못했을까?
수많은 수업을 들어봤지만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본 기억은 거의 없구나.
진짜 왜 이렇게 그때랑 느낌이 다르지?’



이런 의문점들이 슬쩍 스쳐 지나가던 순간에 갑자기 그 핵심적인 원인의 본질을 왠지 알 것만 같았다. 그것도 완전한 비교 대조의 차이처럼 상반된 느낌으로 불쑥 올라왔던 것이다. 잠시 회상해 보니깐 학생 때는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 수업을 들었던 것 같고, 그 이후에는 비록 학생 신분이 아닐지라도 어떤 자격증이나 인증서를 획득할 목적으로 듣고는 했었다.


뭔가 그렇게 항상 분명한 현실적인 목적성이 짙게 깔려 있던 수업들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수업은 모두 다 그렇게 똑같았다. 수업에 임하던 나의 목적과 각오와 의지들이 거의 다 동일했다는 것이다. 어쩜 동기부여가 그리도 하나같이 닮아 있었을까. 비록 설렁설렁 대강 듣거나 실컷 졸았던 수업조차도 나중에는 어차피 시험을 위해서 벼락치기로 몰아서라도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감만은 저 밑바닥 기저에 기본으로 깔려있던 것 같다.


수업에 참여할 때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 수강 신청을 할 때조차도 엄청 듣고 싶은 마음으로 어떤 수업을 선택한 적도 별로 없던 것 같았다. 그냥 필수교양 과목이니깐 포함을 했던 것뿐이고, 전공과목은 최소한의 학점을 채워야 하니깐 성적이 잘 나오는 과목이나 혹은 내가 좀 더 자신 있는 수업들 위주로 신청을 했으니깐 말이다. 정말로 듣고 싶은 열망이 강렬했던 수업이 그다지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어쩌다가 관심 가는 수업이 보일지라도 너무 어려워 보이거나 성적 나오기 힘들다고 소문난 과목이면 조금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선택하지 않았던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 이런 경향들은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다른 또래 친구들에게도 매우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그냥 일종의 수강 신청 스킬과 전략처럼 만연해 있던 풍토였다고나 할까. 아니 뭐, 경쟁의 도가니인 한국 사회에서는 학생 신분으로서 당연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과거의 그런 모든 기억들이 참 그 순간 왜 그리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던 걸까.


마치 가슴속에 박혀있던 어떤 시커먼 돌덩이를 캐내버린 기분처럼 말이야. 그런 시커먼 씁쓸함을 토해낸 듯한 기분이 들었던 동시에, 그 돌덩이가 뽑혀버린 텅 빈자리의 허한 느낌까지 더해진 것 같았거든.



'이 녀석, 그동안 너였구나. 네가 그렇게 내 가슴속에 콕 처박혀 있어서 숨이 차고 갑갑했던 거구나. 바로 너였어. 항상 뭔가 가슴이 무겁게 답답했던 그 이유가 바로 너였다니. 참나. 새로운 관심사에 발을 들였으니 빛나는 보석을 캐내는 기분이 들어도 모자랄 판에, 아니 왜 갑자기 어딘가에 묻혀있던 가슴속 깊은 곳의 암흑 덩어리를 캐내는 기분이란 말이냐. 그래서 더 씁쓸했나 보구나. 마치, 마음(心)의 암 덩어리라도 캐낸 것처럼.'



그때 그 시절에는 그런 순간의 소중함과 배움에 대한 즐거움을 거의 잘 느껴보지 못한 채로 심리적 부담감에만 억눌려서 진도에 쫓기는 듯한 심정으로만 수업을 들었으니, 당연히 지금 느끼고 있는 이런 진정한 학습의 본연의 즐거움을 그저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느껴본 적이 거의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은 것이었다. 거기다가 직장 생활에만 한창 시달리다가 너무 오랜만에 작은 강의실에서 그저 나만을 위한 순수한 배움의 시간을 마주하게 되니깐, 마치 허허벌판의 사막에서 뜨거운 햇볕에 한창 시달리다가 너무 오랜만에 깨끗한 생명수 한 방울이라도 받아 마신 것처럼 시원한 해방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떤 현실적인 치열한 목적성 없이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그리고 순전히 ‘나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게 왜 그리도 마냥 좋기만 했던 걸까. 맑은 구름 위의 다리라도 걷는 아이처럼 동심의 세계에 푹 빠진 듯이 그냥 그렇게 말캉한 구름 위의 기분이었다고 해야 하나. 하긴 우리가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단지 ‘나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우리가 어린아이 일 때는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원하는 것을 하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할 때 그다지 많은 이유들이 없지 않은가. 뭔가를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해야 하거나 수많은 타인들을 고려하거나 배려해야 하는 상황들을 굳이 어린아이가 짊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직장인의 삶과는 완전히 반대로구나.



잠시 취미로 듣고 있던 그 수업의 시공간이 왜 그렇게 한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던 건지 알 것 같네. 그런데 동시에 왜 그리도 갑자기 서글픔이 확 몰려왔을까. 그건 아마도 저렇게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동심의 세계로 너무 오랜만에 놀러 간 기분이 들어서 그랬던 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지만 한번 지나가버리면 다시 돌아가기 힘든 동심의 세계처럼 너무나 희소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겠지. 마치 꿈속에서 동화 속의 이상한 나라로 입성한 앨리스가 되어 시계 토끼와 함께 나란히 라틴어 수업을 같이 듣고 있어서 너무 좋은데, 조만간 곧 이 꿈에서 깨어날 것을 아는 것처럼 말이야. 시계 토끼의 회중시계 초침 소리가 엄청 구슬프게 들려서 서글펐으려나. 조금 있으면 뒤집어져야 하는 모래시계의 모래 알갱이 소리를 닮았을 테니깐. 그래서 내가 지금 이런 사치를 부려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이상하게 묘한 심정의 온갖 기분들이 마구 범벅이 되어서, 그렇게 갑자기 어디선가 정체 모를 눈물이 마구 산발적으로 쏟아져 나올 기세처럼 터질 것 같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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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목적도 없이 순전히 나 자신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 가슴 벅차오를 정도의 감동이라도 올라왔던 것일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러면 그 순간만이라도 좀 마음껏 즐겁게 행복감을 충만하게 느끼면 얼마나 좋아. 처음에는 분명히 그랬거든. 엄청 그저 좋기만 했으니깐 말이야. 어휴, 그런데 이와 동시에 올라오는 느낌은 뭐랄까. 티끌 하나 없는 맑고 새하얀 눈송이 한 점 위에 거구인 내가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아무런 목적성 없이 완전 새하얀 순수한 바람만으로 마련된 그런 나만의 작은 시공간은 마치 저런 새하얀 눈송이처럼 너무나 귀하고 순수한 자연 상태인데, 속세의 인간인 내가 괜히 조금만 잘못 움직였다가는 부서져서 녹아 없어져버릴 것만 같은 그런 연약한 눈송이 같은 느낌이었거든. 그 위에 간신히 앉아있는 것 같아서 살짝 조심스럽게 위태위태한 거지. 그만큼 너무나 좋은데 동시에 또 너무나 낯설게 어색한 기분이 같이 올라온 것이다.


이런 느낌 또한 일종의 ‘HappySad’ 감정이 아니었을까. 꽤나 닮아 보이네. 슬픔 같은 어두운 찌꺼기 감정들이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채로 어딘가에 쌓여서 보이지 않게 침전되어 있으면, 이렇게 막상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될 때 그 슬픔이 같이 새어 나와 버리는 신비로운 그 현상 말이다. 비어 있는 비커에 행복이라는 물을 부었는데도 오랜만에 그 행복을 제대로 만끽하느라 흥에 겨웠던 건지, 마음의 막대기로 물을 골고루 휘젓다가 괜히 밑바닥에 쌓여있던 슬픔 가루까지 둥둥 떠올라서 같이 섞여버린 것 같은 그 오색찬란한 느낌. 아,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꼭 이렇게 엉뚱하게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터져버린다니깐. 오 마이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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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팍한 현실판 세상에 찌들어 있던 ‘어른이’(=어른+어린이)가 갑자기 동심의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것처럼, 너무 오랜만에 마음의 편안함과 자유를 만끽하는 순간이었으니 낯선 기쁨처럼 어색할 만도 했겠지. 그게 진짜로 어색함이었든 간에 엄청난 기쁨이었든 간에 어떤 종류의 감정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어떤 분명한 진실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는 것. 나한테는 그게 더 중요했던 순간이었다. ‘지금껏 아무리 열심히 살았어봤자, 아무리 신나게 사는 척했어봤자, 진정으로 진짜 행복했던 순간은 거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구나.’라는 그 뼈아픈 진실 하나 말이다. 하필이면 이런 소소한 행복의 순간을 통해서 그런 ‘슬프도록 잔인한’ 진실을 역방향으로 이렇게 거꾸로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은 또다시 ‘슬프도록 아름다운’ 아이러니함의 경종을 잔잔하게 울려 퍼뜨리는 것 같았다.


그 작은 뿅 망치의 경종은 나의 학창 시절과 직장 시절에도 똑같이 침투하여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내가 직장인이었던 시공간에도 그리고 내가 학생이었던 시공간에도, 저 슬프도록 아름다운 투박한 진실의 종소리는 똑같이 진하게 관통하고 있었다. 아, 무겁도록 뜨거운 이 진국의 종소리는 과연 어디까지 계속 퍼져나갈 것인가. 도통 멈추지를 않는구나. 어휴, 언제쯤 멈추려나. 그러더니 결국,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 시점에서 그 종소리가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동심의 어린 시절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아니 아무것도 알 필요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이 자유롭기만 했었던 천진난만한 동심의 그 시절. 결국 진정으로 행복했던 순간은 오로지 어린 시절뿐이었던 것인가. 아아. 그 슬프도록 아름다운 깨달음의 순간이라니. 아무리 슬프도록 처절한 진실일지라도, 그걸 이제라도 깨달았다는 그 순간이 어찌나 가슴 아플 정도로 아름답게 다가오던지 말이야.



그때 그 아름다운 수업 또한, 행복했지만 다시 돌아가기 힘든 ‘어린 시절’의 시공간을 닮은 것처럼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행복의 눈물이라도 터졌던 건가 보다. 거의 자동으로 감지된 거겠지. 그게 얼마만의 소중한 순간이었는지, 그리고 언제 또 그런 행복의 시공간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알 수가 없어서 아무런 기약도 할 수 없다는 그 사실도 함께 말이다. 그래서 나 자신이 굉장히 가엾게라도 느껴졌던 걸까. 정말로 뭔가 되게 사무치는 감정이었던 것만은 분명했거든. 어디서 그렇게 쓰나미 같은 폭풍의 감정이 몰려와서는 갑자기 휘몰아쳤나 몰라.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순간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 작은 사설 학원의 작은 강의실에서 도대체 고개를 어디로 떨구어야 할지 모를 만큼 너무나 난감했던 기억의 한 조각이 선명하게 떠오르는구나. 그나마 제일 앞자리가 아닌 게 너무나 다행이었던 순간이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기를 바랐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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