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생명력
정동진역 소나무를 바라보다가 나의 첫 셀프 여행지가 바로, 이곳 '정동진'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다니. 덕분에, 행복했던 그 순간들을 이렇게 다시 오랜만에 기억하게 될 줄이야. 그때는 밤기차를 타고 왔었던 나 홀로 여행이었던지라, 새벽 밤 시간대의 독특한 분위기에 푹 빠져들어서 그런 낭만적인 느낌이 물씬 더 풍겼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정동진은 해돋이 타임과 그 직전의 밤 새벽 시간에 더욱 멋진 포스를 뿜어내기는 하지만, 날이 밝은 후에 마주하게 되는 정동진 또한 민낯 그대로의 그대 모습을 보는 것처럼 동진이만의 진짜 매력을 또 발산하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원래 강동면 정동진 마을은 고성산(高城山)이 있어서 고성동이라고 불렸다가, 그 후 "궁궐(경복궁)이 있는 한양의 광화문에서 정동 쪽에 있는 바닷가"라는 뜻에서 '정동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신라시대부터 임금이 사해용왕에게 제사를 지낼 만큼 그 자연풍광과 일출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래서 나 또한 정동진의 그런 그림 같은 해돋이 풍경과 밤바다의 분위기에 도취되고는 했었나 보다.
그런데 며칠 전쯤 그날은 너무 피곤해서 늦게 일어난 덕분에 아예 쉬는 날로 마음을 먹고, 이른 오후부터 정동진 마을 앞바다로 행차하여 멍하니 한참 앉아 있던 적이 있다. 그 순간 유난히 정동진의 매력이 내 눈에 더욱 돋보이는 것을 느꼈고, 이미 서로 하나가 된 것처럼 내 오감으로도 그 매력을 체감하고 있었다. 환한 대낮이라서 그날 동진이의 매력이 그렇게 한눈에 더 잘 보였던 걸까? 그동안은 주로 초저녁쯤 바다 앞에 오래 있었고 낮에는 짧게 있던 편이었는데, 그날은 대낮인데도 평소보다 오래 앉아 있었더니 그 매력이 유독 더 느껴진 걸까? 온몸을 감싸고 있는 듯한 뭔가 다른, 그 특별한 느낌의 기운은 뭐였을까? 그 기운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 오늘은 간단한 점심 후에 가장 먼저 바다 앞으로 마실을 나가보았다.
처음에는 저 멀리서 파도치는 먼바다를 바라보다가, 그 기다란 시선을 지금 걸터앉아 있는 검은 바위에서 바로 보이는 가장 가까운 파도로 이동해 보았다. 이렇게 바로 앞에서 찰싹거리는 파도를 보고 있으니깐 더욱 하나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동진이만의 그 특별한 기운에 동화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파도의 투명한 흰 물결을 보고 있자니 참 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진이 너는 무엇보다도, 맑고 깨끗해. 하지만 강해.
작지만 힘찬 느낌이야. 어딘가 모르게, 너만의 힘이 우러나오는 게 느껴져.
특유의 흔치 않은 너만의 아우라가 있어. 뭔가, 소중한 생명의 에너지 기운이야.
그동안 너의 그런 기운으로, 내 기운을 다시 불어넣어 줘서 고마웠어.
나를 이렇게 다시 일으켜줘서 고마워.'
상쾌하고 청량한 바람까지 항상 너의 곁에서 함께 하는구나. '바다와 바람' 너희는 항상 그렇게 세트로 나를 응원하면서 나에게 힘을 주네. 너희들 덕분에 치유받고 회복돼서 다시 힘을 낼 수 있게 돼. 여기 올 때만 해도 많이 지쳐있어서 미약하고 보잘것없던 나의 작은 에너지가, 다시 정화되어 힘을 낼 수 있는 '맑고 강한' 에너지가 된다. 나를 둘러싸려고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던 부정적인 상황이나 감정, 어두운 그림자들로부터 탈출하게 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역전승의 기회가 있는 새로운 판으로 이동하게 해주는 그런 에너지 같아.
작은 마을 앞의 작은 바닷가인데도 파도가 꽤나 센 편이라 그런지, '작지만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정동진은 마치 '강소(強小) 기업'을 닮은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대기업은 아닐지라도 내실 있는 '작지만 강한' 기업 말이다. 기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면, '작지만 강한 개인'도 비슷하게 연상이 된다. 특히, 바닷가 해변의 모래 알갱이들을 보면 아주 작고 고운 입자들이라서 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강한 파도로 인해서 더욱 작아진 듯한 모래 알갱이라서 그리 고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얼핏 보면 ‘작은데 강하다’ 혹은 ‘고운데 강하다’라는 의미가 썩 어울려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맑은데 강하다’ 또한 마찬가지로 어울리지 않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보통은, 작거나 곱거나 맑은 것들은 어딘가 모르게 여리 여리하게 연약한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몸집이 작고 허약한 아이... 곱고 가냘픈 여인... 졸졸 흐르는 맑은 시냇물...’등등 무언가 보호를 받아야만 할 것 같은 약한 느낌이라서 ‘강하다’라는 상반된 의미가 동시에 성립되지 않는 분위기들이다.
이렇게 ‘강소 기업’이나 ‘강소 개인’은 일반적으로 그리 흔치는 않은 만큼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작지만 강한 힘이 느껴지는 정동진도 매우 소중한 가치가 있는 귀한 존재처럼 여겨진다. 이런 정동진이기 때문에, 맑으면서도 동시에 강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맑음’이라고 하면 그저 ‘맑고 순수한 소녀’나 ‘티 없이 맑은 자연’이 자동으로 연상되면서 순간적으로 나약한 이미지만 떠오를지도 모르겠지만, 맑음을 채우면 채울수록 의외로 강해질 수가 있다. 마음을 정화하면 할수록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원리라고나 할까?
그런데 정동진 앞바다에서 느껴지는 이런 강인함을, 최근 정동진역에서 마을 관련 이야기를 찬찬히 읽어보다가 그제 서야 우연히 알게 된 과거의 ‘역사(history)’적인 삶에서 또다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동진이가 옛날에 겪었던 그런 실제 스토리들이, 그동안 내가 정동진한테서 받았던 그 느낌들과 너무 닮아 있어서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현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스타 정동진’의 이런 평화로운 정경만으로는, 그렇게 힘겹고 치열한 삶의 흔적이 있는 어두운 흑역사의 시절이 있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962년 11월 6일, 채굴된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영업을 시작한 정동진역은 인근에 탄광이 밀집해 있어 한때 인구가 5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명소 때문에 이름이 알려진 역이지만, 이 역 개통목적은 원래 탄광촌 주민들 및 석탄 수송이었던 것이다. 하루에 7~8편의 여객열차가 운행되면서 1970년대 연평균 21만 명을 수송하는 역으로 기능했고, 1976년의 연간 수송 실적을 보면 29만 명이 다녀갔다. 석탄산업이 활발하던 이 시기가 정동진역의 ‘흥성기’였던 셈이다. 1960~1980년대 정동 탄광지구에 살던 주민의 80%가 탄광업으로 생계를 꾸렸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산업 환경의 변화로 인구 2천 명도 안 되는 조그마한 어촌으로 변했고, 1990년대 초부터는 열차가 거의 운행하지 않을 정도로 한산했다. 1980년대 말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 등으로 인하여 광산이 잇따라 ‘폐광’되기 시작하자 탄광촌 사람들은 떠나가기 시작했고, 이후 지속적인 인구 감소로 한때는 ‘폐역’을 검토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폐광된 1990년대 들어서는 정동진역에 하루 1회 비둘기호가 운행하는데 그쳤으며, 1992년 들어서는 이용객도 3만 명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존폐 위기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던 이때가 아마도 정동진역의 ‘생존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던 중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의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배경이 된 정동진역 일대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정동진 해돋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찾아들었고 전국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다. 이렇게 갑자기 벼락 스타가 되어버린 이 시기가 바로, 다시 회생하기 시작한 정동진역의 ‘부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객취급을 중단한 지 1년 2개월이 지난 1997년 3월 15일 다시 승객을 수송하기 시작했고, 2000년 들어서는 정동진역 이용객만도 연간 76만 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석탄산업의 성쇠에 따른 정동진의 변천사는, 이렇게 ‘정동진역’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략적인 히스토리만 살펴보아도 참, 정동진은 그동안 꽤나 극적인 변화를 겪어온 것 같다. 매우 활황 국면으로 번성했다가도 갑자기 존폐 위기에 직면하여 ‘죽느냐 사느냐’의 길목 앞에서 흔들리고 있을 때, 혜성같이 나타난 스타처럼 급부상을 하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변화무쌍하게 굴곡진 삶을 살아오기도 정말 쉽진 않았을 텐데 용케도 잘 버텨온 것 같아서 짠한 마음이 든다.
더구나 초기의 흥성기에는 주요 생계 현장이 바로 ‘석탄 산업’이었다. ‘석탄산업’이란, 석탄을 채굴하여 용도에 알맞은 제품을 만들고, 입도(粒度)를 고르게 하여 연료 또는 화학공업 원료로 공급하는 1차 산업이다. ‘광업’은 지하 및 지표상에 부존 하는 고체·액체·기체 상태의 천연광물을 채굴·선광·제련하는 산업이라서 그런지, 채굴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가공이 들어가게 되면 2차 산업으로 분류가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정동진 사람들이 종사하던 산업을 1차로 보든 2차로 보든 간에 분명한 점은, 그들이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하고 있던 일들이 바로 생존과 직결이 된다는 점이다.
항상 생사의 기로에 서서 목숨을 걸고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정동진 마을과 정동진역이 탄생한 배경은 석탄 산업의 등장 덕분이었지만, 아무리 이 산업이 그 시기에는 호황이었을지라도 업종 성격 자체가 ‘생존’이 왔다 갔다 하는 치열한 1~2차 산업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즉 정동진 마을은 시작된 초기부터가, 삶의 현장 자체는 위태로운 산업 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존형 삶’이 바탕이 되었던 그들의 현실은, 광부들의 일상에서 지켜지는 금기 사항들만 보더라도 그 힘겨움을 어느 정도 느낄 수가 있다.
입갱이란, 광산에서 갱 안에 뚫어 놓은 길을 의미하는 ‘갱도’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광부들은 ‘입갱 하면서 뒤돌아보면 죽어 나온다’고 믿었다고 한다. 입갱 할 때 갱구의 뒤편인 바깥세상은 빛이 있는 안전한 곳이다. 하지만 거기에 미련을 두다 보면 어둠 속으로 입갱 하는 것이 점점 더 두려워진다. 그만큼 두려움이나 공포감이 증가하면 실제로도 죽음과 연결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항상 내재된 채로 광부의 하루를 시작한 게 아닐까? 그래서 그 두려움을 없애려고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을 애써 가지기 위해서 뒤돌아보지 않으려는 비장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광부들은 출근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탄광에 출근하는 광부가 인사를 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족들 또한 탄광에 출근하는 사람에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 이 또한 인사를 하면, 광부인 가족이 돌아오지 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식으로 인사를 서로 잘 나누게 되면, 아무래도 어딘가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런 감정이 두려워서가 아니었을까? 어찌 될지 모르는 위험한 광산 속으로 매일 목숨을 걸고 출근하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걱정으로 애틋한 마음인데도, 그 애틋함을 함부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마음이 너무 안쓰럽다.
이런 금기 사항들만 보아도 생존에 대한 그 두려움과 불안함을 매일 가슴에 지닌 채 일터로 나가면서, 애써 표현하지도 못하고 지그시 눌러야만 했던 그 심정들이 너무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나서는 길인데, 사랑하는 사람한테 사랑의 표현은커녕 안부 인사조차도 할 수 없는 그 마음이 가끔은 참 얼마나 먹먹했을까...
석탄산업이 아무리 활발했던 시기였을지라도, 이렇게 광산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광부들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치열하고 긴장감 높은 삶이었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마을이 처음 시작되던 삶의 기초 터전도 이렇게 생사의 갈림길에서 일하던 고된 산업이었는데, 정동진은 그 이후에 더욱 큰 고비를 맞이하게 되어 석탄 산업마저도 호황기의 막을 내려야만 했으니 그 심정은 얼마나 비통했을까 싶다. 산업 환경의 변화와 정부 정책으로 인해서 활황이던 광산이 대부분 급하게 폐광된 덕분에, 마을 주민들도 무더기로 떠나고 ‘정동진역’조차도 더 이상 운영의 필요성이 높지 않아서 ‘폐역’의 위기까지 연속으로 맞이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거의 소멸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나고 스타급 도시로 된 거 보면 말이다. 내가 마을 앞바다에서 종종 느끼던 그런 강인함이 예전의 그 시기에도 진짜로 있었던 건가 보다. 폐광되어서 거의 폐역의 위기까지 다다르던 마을이었던 만큼 그렇게 폐허가 될 뻔한 고비에서 다시 살아나기만 해도 다행이었을 텐데, 드라마 하나 덕분에 갑자기 꽃길을 걷게 된 ‘스타 시티(Star City)’급까지 되지 않았는가! 규모가 작으니깐 ‘스타 타운(Star Town)인가? 아무튼 인기는 뭐 거의, 스타 시티급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매년 해돋이 시즌에는 일출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로 엄청 붐비는 곳이 되어버렸다. 다 죽어가던 마을이라서 다시 간신히 살아나기 시작한 회생 정도의 수준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이상으로 급상승까지 해서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부활한 것이다. 살아날 듯 말 듯 거의 다 죽어가던 생물체가, 겨우 다시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다.
조금 아프던 사람이 다시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기만을 바라는 상태였는데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건강하게 좋아져서 일상적인 삶을 되찾게 된 것은 물론이고, 그런 기적적인 회복을 넘어서서 완전 초특급 매력을 발산하는 여신급 스타까지 된 것 같다고나 해야 할까?
건물 1층에서 2층으로 걸어가는 단계별 계단식 상승이 아니라, 저 아래 깊은 곳 광산처럼 어두컴컴한 지하 밀실에 오래 갇혀 있다가 극적으로 구조되어 지상으로 올라온 그 해방감에 감격하려는 순간, 갑자기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빌딩의 최상 꼭대기까지 엘리베이터 타고 한 번에 슝 올라가서 특급 상승까지 확 해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정동진 너! 초특급 매력의 톱스타 연예인이든 간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초고층 빌딩의 최고 탑 꼭대기든 간에, 그 위기에서 그렇게 급부상한 너는 참 대단한 에너지를 가진 것 같아. 마치, 언제든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강력한 생명의 기운을 너 자체적으로 ‘built-in’해서 보유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역시 정동진 앞바다에서 느껴지던 그 좋은 기운과 운치가 괜히 그런 게 아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