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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 Oct 27. 2024

#2_인간 사랑은 Why 감소?

feat. 태풍의 위험과 불안

지금의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부족해졌거나 마음이 더 차가워져서, 사람 대신에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진 걸까?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정 자체의 크기나 농도가 줄었다기보다는, 사랑이 시작되거나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물리적, 심리적인 여유와 안정감이 줄어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심리적인 여유가 줄었다는 의미는 결국, 불안도가 높아진 사회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전체적으로 사회적 불안도가 증가함에 따라 집단적인 심리적 불안도가 높아진 만큼, 구성원 개개인의 심리적인 안정감이 감소하게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당장 하루하루가 어떻게 될지 아주 가까운 미래조차도 예측이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 현대 시대라서, 사회적인 불안도가 점점 증가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높은 변동성과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위험성이 높은 상태의 삶을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내일 모레 당장 어찌 변화될지 모르는 세상은 미리 대비하기가 쉽지 않아서 위험도가 높은 만큼 사회적 불안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희망적인 삶에 대한 기대가 줄어들게 되고, 그만큼 미래의 안정적인 삶에 대한 신뢰도 또한 낮아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도 이런 현상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증가된 위험이라서 우리나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적인 공통 위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회적 불안과 위험에 따른 신뢰도 하락은 불가피한 시대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진짜 문제는 어떤 원칙과 룰(rule)처럼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까지 하락하게 되면 희망을 가지기 어려운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어떤 투입에 따른 산출이 올바른 프로세스에 의해 정당한 결과 값으로 나오는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거나 혹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최소한의 사회적인 원칙이나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세상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하락되기 때문에 삶의 희망과 안정감은 점점 감소하게 된다.     


가령, 어떤 수고와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나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거나 열심히 살면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매번 무너지는 경험을 많이 해서 좌절감으로 가득한 삶이라면, 과연 어떤 사회적인 규정이나 시스템을 진정으로 신뢰할 수가 있을까. 이런 사회적인 성과 측면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의 행복이나 만족도 측면에서도 ‘선량함이 악함을 이긴다.’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와 같은 기본적인 윤리 덕목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를 주변에서 자주 목격하거나 직접 겪게 된다면, 누구든지 삶의 희망이 희미해지게 되면서 세상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 계속 쌓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령 이런 일들을 꼭 반드시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흔히 들리는 사례나 뉴스들로 간접 경험이라도 많이 하게 된다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기대와 신뢰는 자연스레 무너지게 되어 소리 없는 무력감과 허탈감만 누적되어 간다. 그런데 자기 자신 또한 종종 저런 경우들을 실제로 직접 겪게 된다면, 스스로 믿고 있었던 세상의 기본 원리와 질서의 축이 흔들리게 되면서 삶을 살아낼 의지의 생존 뿌리가 점점 약해지게 된다. 즉 자신의 삶을 굳건하게 버텨낼 수 있었던 마음의 기둥축이 더 이상 단단하지 못하게 되어 힘을 잃게 되므로, 삶의 의욕 또한 감소하면서 무력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는 자신의 삶 하나만 간신히 살아내는 것조차도 급급하게 되어버려서 버거운 상태인데, 어떻게 감히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감수하면서 서로가 평생 함께하고 책임지는 삶을 꿈조차 꿀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사랑의 결실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경우가 의외로 많은 것 같다. 더 정확히 언급하자면 ‘사랑 자체’의 결실은 두 사람만의 문제지만, 그런 한 쌍의 사랑이 결혼 같은 실질적인 가족의 형태로 연결되는 결합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닐 때가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마음이 너무 잘 통하고 모든 게 잘 맞아서 아주 이상적인 한 쌍이 될 수 있는 두 사람이 만났어도 가정과 결혼의 결합을 위해서는 양쪽 모두의 또 다른 수많은 관계와 상황이 걸리게 되는 양가의 환경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것처럼, 사회적인 환경 또한 제일 밑바탕에 깔려있는 더욱 커다란 환경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이외의 환경적인 문제라는 것은, 사랑 이외의 외부적인 다른 요인이 작용 가능하다는 의미다. 두 사람 간의 사랑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서 무력해지게 되는 외부의 환경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긴 두 사람만의 사이에서도 남녀평등의 문제가 작용할 수 있는 만큼, 그게 양쪽의 양가 범위로 확대가 되면 더욱 커질 수 있는 것이고, 이게 또 사회적인 범위로 확대가 되면 또 얼마나 더 커질 수 있는 외부적인 환경 이슈로서 작용하는가. 이렇게 같은 테마의 문제도 환경적인 조건에 따라서 더욱 커지는 힘의 원리가 작동되는 만큼, 고용 문제 같은 다양한 이슈가 복합적으로 얽히는 사회적인 환경의 범위까지 확장되면 어떻겠는가. 


“제발, 우리 둘 좀 사랑하게 해주세요!”라고 몸부림치는 듯한 이런 절규가 과연 영화 속에서만 단골로 등장하는 애절한 사랑의 멘트로만 보이는가. 저 멘트가 낭만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 동시에 얼마나 지극히 현실적인 말인지도 피부로 직접 체감해본 사람들이 꽤 많을지도 모르겠다. 아주 애절하게 말이지.     




우리 주변 현실에는 이런 영화 속 주인공들이 얼마나 많을까. 우리 보통 사람의 삶은, 영화가 아니라서 별로 해당되지 않으려나.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의외로 꽤 많을 수도 있다. 그들만의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 덕분에 가장 근본적인 사회적 환경과 바탕이 자신의 발 하나도 딛기 힘들 정도로 탄탄하지 못해서 신뢰도가 약한 상태라면, 그런 나약한 사회적 토지의 판 위에다가 어찌 그런 두 사람이 합친 발을 디딜 수 있는 가정의 울타리 집을 지을 엄두가 날 수 있을까. 그건 마치 살얼음판 위에다가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집을 짓는 것이 아닐까. 설령 그런 집을 간신히 지었다고 한들, 언제 또 외부의 태풍 같은 환경에 의해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감을 가득 안고 살아야 한다면 그게 또 무슨 소용일까. 열심히 살기만 하면 앞으로도 잘 살아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기대와 믿음 정도는 가질 수 있어야지만 그런 사랑의 출발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데 살얼음판 위의 태풍 같은 환경에서 과연 그런 출발이 그리 쉬울까나.      


물론 갑자기 경제 불황이 닥치는 전 세계적인 위험이나 천재지변 같은 예측 불가한 위험이 무서워서 평소에 밥 먹고 사는 걸 못하겠다고 미리 포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불신과 불안이 증가하는 주된 이유는 그런 어찌할 수 없는 통제 불가능한 위험들이 아니다. 적어도 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고 어느 정도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삶에 대한 믿음이 흔들려서 불신과 불안이 생기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즉, 자신의 노력으로 스스로 통제 가능하던 위험들까지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저런 것은 시대적인 변화의 환경적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소속되어 있는 세상의 질서와 정의의 문제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빠른 속도의 진행으로 인한 시대적인 변화도 위험과 불안을 증가시키는 기본적인 요인이겠지만, 그보다 더욱 핵심적인 요인은 바로 내가 속해 있는 세상의 위험이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겪고 있는 시대적 흐름이나 천재지변 같은 위험은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공통의 위험으로서, 나만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미리 대비하기가 힘든 위험들이다. 증권 시장이나 기업들의 개념에서 종종 등장하는 일종의 ‘체계적 위험’과 비슷한데, 이런 공통적 요인들은 어차피 스스로 통제가 쉽지 않은 것들이므로 우리가 느끼는 위험과 불안의 민감도에는 상대적으로 기여도가 더 적은 편이다. 


예전에는 변화의 속도가 느렸던 만큼 이런 위험도 자체가 낮아서 기본적인 디폴트(default) 상태의 불안도가 지금처럼 높지도 않았지만, 요즘처럼 급변하는 현대 시대에는 이런 통제 불가능한 위험 자체가 과거보다 훨씬 더 높아져 있는 상태다. 거기다가 원래는 나의 수고와 역량으로 조절해서 통제 가능하던 위험들까지 단지 내 노력만으로는 통제 불가능한 위험으로 변해가는 세상이라면 어떻겠는가. 당연히 우리가 체감하게 되는 불안도와 위험도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나의 노력으로 통제 가능하던 위험들이란 일종의 ‘비체계적 위험’ 같은 개념인데, 내가 개별적으로 더 직면하게 되는 특정한 위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시대적 변화나 어떤 세계적 사건들이 아니라, 내가 소속되어 있는 세상의 고유한 특성들과 더 관련된 위험들이다.      



내가 속해 있는 집단만의 위험. 


내가 속해 있는 회사만의 위험. 


내가 속해 있는 사회만의 위험. 


내가 속해 있는 국가만의 위험.     



나만의 개인적인 위험이라면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요인들이 더욱 많겠지만, 이런 시공간적인 위험들은 공동체적인 요소라서 개인적인 위험보다는 스스로 통제하는 게 쉽지는 않다. 그래도 최소한 시대적인 변화 같은 세계적인 공통 요인들보다는 나의 노력이나 역량으로 조절 및 통제 가능성이 더 높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점점 이 조차도 쉽지 않은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요즘의 공동체들 또한 시대적, 세계적 변화의 영향을 받는 만큼 이런 공통 위험 자체가 높아져서 변화무쌍해진 환경적 요인들 덕분에 그럴 수는 있을 것이다. 점점 평생직장의 개념이 없어지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속해 있는 시공간만큼은 개별 구성원들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어서 스스로 미리 대비 가능한 위험들로 주로 구성되어야지 안정된 신뢰감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기대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그런데 전혀 어떤 룰이나 일정한 법칙 없이 무질서하게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문제나 원리 원칙이 존재하더라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중구난방으로 무자비하게 마구 들이닥치는 요소들이라면, 예측할 수 없는 통제 불가능한 위험들에 해당된다. 


이런 요소들이 난무할 경우에는, 불신과 불안이 점점 더 증가하게 되면서 무력감이 쌓이고 삶의 의욕까지 꺾이게 될 것이다. 그럼 과연 그 누가 자기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의 토지 바닥 판을 안전하다고 믿으면서, 일상의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열심히 매진하고 싶겠는가. 아니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나 있을까. 언제 어디서 또 침입해올지 모르는 폭풍의 비바람에 토지 바닥이 훼손될까봐 조마조마 하느라, 생산적인 업무에만 집중해도 모자를 에너지를 이런 위험에 신경 곤두세우는데 소모하게 되지 않을까. 





가령, 열심히 노력하면 나만의 작은 열매라도 맺을 수 있다는 그런 일종의 농사 원리가 내가 소속된 ‘사회적 토지’의 땅에서 성립이 되지 않는다면 어떨 것 같은가? 내 직업이 농부라서 지금껏 나의 집 앞마당에 씨앗을 심어서 정성껏 재배하면 언제나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는데, 그 비옥한 땅이 갑자기 어느 날 태풍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거의 폐허 수준으로 망가져서 나의 모든 노력의 씨앗들이 다 죽어버리고 어떠한 결과물도 전혀 나오지 않게 되는 상황 말이다. 더구나 이런 태풍 같은 악천후가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들이닥쳐서 예측 불가로 인해 미리 위험 대비조차도 할 수가 없다면, 아무리 나의 소유 자산 영역인 내 집 앞마당 토지라고 해도 내가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위험들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한번 망가져버린 토지는 다시 원상복구가 쉽지 않다. 원래는 내가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뿌린 대로 거둔다.’ 라는 농사의 기본 법칙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모든 기대가 무너져버리고 절망감만 가득 남게 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위험들은 전 세계인 모두가 겪는 시대적 변화의 태풍 위험이 아니다. 나의 일상적인 삶이 존재하는 나의 시공간으로 들이닥치는 ‘나의’ 태풍 위험이다. 같은 시공간에 함께 존재하고 있는 ‘우리들의’ 태풍 위험이다. 예전에는 나의 토지 앞마당에 작은 비닐하우스를 만들어서 장마철의 폭우에 미리 대비할 수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갑자기 저렇게 불시에 각양각색의 태풍이 수시로 들이닥치게 된다면, 그저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는 예측 불가한 위험에 노출된 것과 같다. 아무리 나의 토지 밭일지라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나의’ 태풍 위험인 것이다. 우리 마을에 들이닥친 ‘우리들의’ 태풍 위험인 것이다.     



여기서 갑자기 들이닥친 태풍이 바로, 사회적인 기본 원칙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외부 환경적인 위험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산들바람이 불어와서 앞마당의 코스모스 꽃들과 하늘하늘하게 같이 어울리고 있다면, 이런 온화한 바람은 경제학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세상 질서를 조화롭게 돌아가도록 하는 커다란 울타리 역할을 하는 긍정적인 요소일 것이다. ‘그린 라이트(green light)’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태풍처럼 갑자기 들이닥치는 강풍은 커다란 ‘검은 손’처럼 세상 질서를 교란시키면서 부당하게 망가뜨리는 역할의 위험 요소에 해당된다. 이런 건 바로 ‘레드 라이트(red light)’겠지. 더구나 겉으로는 강풍이 아니라서 얼핏 보기에는 ‘하얀 손’ 같아도 실질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라서, 일종의 숨어있는 무법자 같은 조용한 태풍이 더 무서울 수도 있다. 절대 합리적이지 않은 오래된 회사 규정이라든가, 시대에 맞지 않는 한국적인 관습이나 전통, 혹은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되는 억압적이고 부당한 동양의 문화와 사상 등이 바로 그런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아닐까.     


왜 검정색 손이냐고 의아해서 물어보면, ‘원래부터 그랬어.’라는 너무나 익숙한 답변들이 돌아오고는 한다. 분명히 뭔가 올바르지 않고 잘못된 행태인데도, 규정이고 관습이고 문화라는 명목으로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아주 막강한 검은 손들 말이다. 하지만 원래부터 그랬기 때문에, 이미 익숙해져버린 많은 사람들한테는 저런 손들이 검은색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도 너무 많은 것 같다. 이런 것들이라면 오히려 온화한 산들바람의 강도를 좀 높여서라도, 검은 손을 바로잡는 더욱 센 강풍의 하얀 손 역할이 때때로 더욱 절실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런 존재가 실제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이미 조용한 평화의 산들바람 수준을 넘어서, 더욱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태풍의 눈’이 아닐까. 태풍의 눈(eye of the typhoon)이란 충분히 발달한 태풍의 중심부에 나타나는, 맑게 갠 무풍지대를 가리킨다.




태풍 자체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서 강력한 비바람을 동반하는 존재인데, 신기하게도 이런 어마어마한 태풍의 중심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 고요한 상태인 ‘태풍의 눈’이 존재한다. 태풍의 위력이 강할수록 더욱 맑고 깨끗하며 커다란 태풍의 눈을 가지고 있는데, 구름이 거의 없고 선명하며 주변보다 따뜻한 상태라고 한다. 알다시피 태풍이란 존재는, 그냥 일반적인 수준의 비바람이 아니다. 매우 강한 바람의 세기와 함께 대단한 파워로 휘몰아치는 거대한 자연현상이다. 이런 엄청난 괴력을 지닌 태풍의 가장 핵심부 중심에 거의 정반대로 온화한 상태인 ‘태풍의 눈’이 고요하게 존재하고 있다니. 그 사실이 너무 놀라워서 신비롭게 느껴질 정도이다. 이렇게 태풍이 아무리 어두운 기운을 몰고 다녀도 핵심 중앙에는 맑고 깨끗한 태풍의 눈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검은 손의 환경이 지배적인 공동체 조직일지라도 평화롭게 맑고 따스한 ‘태풍의 눈’을 닮은 구성원들이 어딘가에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비록 몇 안 돼는 극소수일지라도. 그래서 설령, 현실에서는 핵심적인 중심부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만약에 어떤 집단 조직에도 검은 손의 기운이 너무 넓게 퍼져있어서 올바른 절차와 소통 방식이 거의 통하지 않을 때, 조직 내부에서 ‘태풍의 눈 같은 하얀 손’의 존재가 강력한 바람을 동반하여 주변 환경을 맑고 깨끗하게 정화를 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별로인 조직일지언정, 내부 어딘가에는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조직 내부든 외부든 그런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빛나는 인물을 찾아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쉽지는 않을 수도 있다. 태풍의 눈을 닮은 존재라면 이미 스스로 온전한 내공을 지니고 있어서 그저 자신의 삶에 묵묵히 집중하고 있을 때는 평소에 잘 티가 나지 않을 수도 있거든. 그런 존재들은 굳이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비록 힘든 환경일지라도 충만한 자아로 주어진 삶에 열중하고 있을 때가 많아서 초반에는 잘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짜로 어떤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행동 개시를 하게 된다면 단단한 내공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 한번 빛을 발현하기 시작하면 대단한 풍력을 일으킬 수도 있는 존재 말이다. 이런 태풍의 눈 같은 존재를 중심으로 하얀 손의 사람들끼리 힘을 합쳐 모은다면 무언가 실질적인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런 하얀 손의 존재들이 눈에 띄지 않아서 발견하는 것조차 너무 쉽지 않은 상태는 어찌해야 할까. 너무 시커먼 태풍이라서 맑은 태풍의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경우 말이다. 이렇게 검은 손의 무리가 너무 지배적이라서 많이 오염된 경우에는 몇몇의 하얀 손들이 존재할지라도 그들끼리 뭔가를 바꾸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점점 더 심하게 오염되어 가고 있어서 내 삶의 시공간에서 일상생활조차도 많이 힘들어진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특단의 조치로 자신이 직접 ‘태풍의 눈’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시커먼 태풍의 바람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서 차라리 스스로 그 태풍의 눈이 되거나 아예 새로운 태풍을 만들기 위한 태풍의 눈이 되어, 중심 영역을 점차 확장해 나가는 존재가 된다면 강력한 하얀 손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결과의 성과가 얼마나 클지는 몰라도 변화가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그 자체로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 된다. 검은 기운이 만연한 조직에서는 아무리 작은 변화라도 이끌어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작은 성과라도 끌어냈다면 태풍의 눈 역할을 잘 해낸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점점 더 커다란 변화의 영향을 가져올 수 있을 테니깐. 실제로도 바람이 강력한 태풍일수록 더 커다란 태풍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던가. 막강해질수록 점점 더 커지는 태풍의 눈처럼 점점 더 맑고 깨끗한 영역을 넓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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