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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 Oct 27. 2024

#3_사랑의 환경이 필요해!_(feat. 먹고사니즘)

feat. 먹고사니즘(=먹고살기 +ism)

이렇게 바람 세기의 강도를 높여서라도 정화를 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결국 바람의 실질적인 속성이 커다란 울타리 같은 우리 삶의 중요한 환경이라서 그런 것이다. 주변 환경에서 불고 있는 바람이 산들바람이나 태풍의 눈처럼 맑고 깨끗한 ‘하얀 손’이라면 지향해야겠지만, 태풍처럼 어두운 기운만 몰고 다니는 ‘검은 손’이라면 반대로 지양해야 할 테니 말이다. 세상에 검은 손 같은 나쁜 힘이나 불공정한 원리만 득실거리지 않아도 훨씬 더 커다란 안정감과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 또한 어찌 보면 ‘먹고사니즘(먹고살기+ism)’과 ‘러브니즘(사랑하기+ism)’의 결합판 아니던가. 얼핏 볼 때는 그저 아름다운 사랑만 연관된 것 같지만, 결국에는 먹고 사는 문제인 현실적인 영역과 사랑의 쏘울(soul) 같은 감정적인 영역이 혼합되어 있는 일종의 복합 예술에 더 가까워 보인다. 마치 응용미술과 순수미술의 혼합처럼. 그렇다면 이런 복합 예술이 가능한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어야지 사랑도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물론 먹고사는 게 조금 버거울지라도 영원한 불꽃처럼 꺼지지 않는 불타는 사랑의 열정이 있다면 그런 현실도 사랑의 힘으로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겠지. 그렇게 강력한 사랑의 마음과 굳건한 의지로 시작을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하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계 수단으로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고 싶어도, 그런 충만한 의욕으로 가득 찬 열정을 불태울만한 ‘삶의 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설령 그런 판이 있더라도 언제 어디서 폭풍에 의해 갑자기 풍비박산되거나 지진이 수시로 발생하는 판이라면? 과연 불타는 사랑의 열정만으로 앞으로 많이 남은 창창한 미래를 함께 헤쳐 나가려는 엄두가 날 수 있을까. 한 남자가 사랑하는 한 여자를 위해서 어떤 종류의 수고와 고생이든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매일 천만번씩 다짐할지라도 그런 의지와 열정을 불태울만한 환경적 터전이 부실하다면 어떻게 미래의 삶에 희망을 가질 수가 있을까. 사랑을 위해 기꺼이 고생하고 싶어도 고생할 수 있는 바닥 판조차 없다면 발을 디딜 수도 없는데 어떻게 사랑을 꿈꿀 수가 있을까. 그래서 참 뭐랄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왠지 요즘 사람들은 사랑할 마음의 온도와 의지가 부족해진 게 아니라, 사랑의 열정과 삶의 의욕을 발산하고 싶어도 그런 마음과 의지를 분출할만한 환경적인 시공간이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살아갈 환경의 울타리가 탄탄하지 않으니깐 사랑하고자 하는 열정과 의지 또한 자동으로 솟아나지 않는 거지. 무력감과 허탈감만 쌓일 뿐. 마치 깊은 산속에서 허공에 힘껏 소리 질러 보지만 수신자 없는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메아리의 공허한 슬픔처럼 말이다. 미래의 삶에 대한 열정이든 사랑을 향한 열정이든 아무리 쏟아 붇고 싶어도 그럴 만한 환경적인 발판의 터가 보이지 않는다면, 공중부양하고 있는 메아리처럼 어딘가에 발을 딛지도 못한 채 나의 열정도 그렇게 사방팔방으로 울려 퍼지면서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며 사라지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오래된 일본 영화의 그 유명한 대사처럼 말이다. ‘러브레터’였던가.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 장면쯤에 눈 덮인 산에서 메아리로 아주 절절하게 울려 퍼지는 이 한마디를 한다.   


  

# 영화 [러브레터]




“오겡끼데스까.” 


# 오겡끼데스까 : 안녕하세요, 건강하십니까, 잘 지내시죠.



마치 나에게 이렇게 외치는 느낌도 든다. “나의 열정은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십니까. 아직 건강하게 잘 살아있으신지요.” 영화에서는 사랑하던 연인한테 가슴 사무치게 하는 대사인데, 왠지 저런 변환도 좀 어울리는 것 같다. 자신의 넘치던 열정이 소실된 모든 이들한테도 어울리는 대사처럼 보이네. 삶의 열정이든, 사랑의 열정이든, 어떤 열정이든 그 본질은 비슷할 테니깐.





즉 현재 벌어 놓은 돈이 조금 부족하다고 해서 미래의 삶을 누군가와 함께 시작할 엄두조차도 못 내는 게 아니라, 앞으로 재산을 모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폭삭 주저앉아 버려서 그런 기대감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 같다는 거다. 아무리 삶의 열정이 넘쳐봤자 다시 사그라지게 될 테니깐 말이지. 무엇보다도 현재 일자리를 원하는데 구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제일 희망적이지 못할 것이다. 공중부양 메아리처럼. 비록 지금은 일자리가 있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수중에 가지고 있는 소유 재산이 별로 없다고 해도 돈이야 앞으로 벌면 되는 거지만 실컷 애써 모아 놓은 돈을 유지하기가 힘들거나, 미래에는 계속 재산을 모으는 게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불신이 가득한 세상이라면 희망적이지 못한 건 비슷할 테니깐. 돈을 벌고 있을지라도 뭔가 차오르는 느낌이 아니라 자꾸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새어나가는 불안감이 들지 않을까. 무언가 부족한 듯 갈증만 더해지고 안정적인 미래의 삶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튼튼한 요새 성벽을 쌓아 올리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아무리 쌓아 올려도 모래성 쌓는 듯한 기분에 더 가까울 테니 말이다.     



그런데 왜 열심히 모은 재산을 유지하거나 계속 돈을 꾸준히 버는 게 힘들 것 같다는 불안감이 증가하게 되는 걸까?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세계적 금융 위기가 발생해서 대량의 실직이 발생할까 봐? 혹은, 고도의 인플레이션 위험으로 인해서 돈의 가치가 하락할까 봐? 아니면, 뭐 갑자기 도난 사고라도 당할까 봐? 물론 이런 이슈들은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잠재적인 위험 요소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명확하게 눈에 ‘보이는 검은 손’의 환경적인 위험 요인이기라도 하지. 더 큰 문제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사람들을 더욱 커다란 불안과 불신으로 몰게 된다는 점 아니었던가. 보통은, 우리가 어딘가에 속해 있다면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가지게 되는 합리적인 기대와 상식이라는 게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불합리한 시스템이나 그런 관습적인 분위기가 주변 도처에 깔려있다면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의 환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므로 평소에 서로 간에 불신이 쌓여서 불안과 긴장이 가득한 시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갈지라도 내일 모레는 당장 어찌될지 모르는 변수가 많기 때문에 평온한 안정감을 느끼면서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거나 기대하는 게 쉽지 않다.      



아주 딱 맞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지 않던가. 바로 그 유명한 ‘경단녀’가 바로 그런 경우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경단녀 현상은 조직 내 규정이나 정관으로 정해놓은 기준이 있는 경우라면 미리 예측이라도 가능해서 그나마 ‘보이는 검은 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은행이나 공공 기관처럼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조직들은 육아 휴직 기간 등이 명시적으로 정해져 있고 실제로 실행이 가능할지라도, 이런 기관들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규정도 없거나 설령 있더라도 잘 이행되지가 않아서 유명무실할 때도 많은 것 같다. 이런 경우라면 ‘보이지 않는 검은 손’ 아닌가. 


나의 예전 회사에서도 옆의 팀이나 다른 부서에서는 그런 유사한 사례가 들리고는 했었다. 출판 담당 부서에서 꽤나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던 여직원이 있었는데 출산과 동시에 육아를 부담해야 했던 그 상황을 지원하는 휴직 제도가 없어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그런 케이스 말이다. 그냥 간접적으로 말로만 들어봤던 그런 일들이 가까운 주변에서도 실제로 발생하는 경우를 접하게 되면, 자신들이 직접 겪는 일이 아닐지라도 뭔가 불안감이 감도는 미묘한 분위기의 공기가 알게 모르게 형성되는 것 같다. 다들 자신이 속해있는 그 공간을, 그 조직을, 그 작은 사회를, 믿지 못하게 되면서 소속감이나 애사심을 키우는 게 아니라 이방인처럼 스스로 이질감을 더욱 형성시키게 되는 것 같다. 비록 겉모습은 그 조직의 구성원일지라도 마음은 자꾸 따로 놀게 되는 것 아닐까. 나는 비록 지구인이라서 몸은 지구에 속해 있지만, 나의 진짜 마음은 우주인처럼 저기 지구 밖으로 이탈하여 안드로메다에서 따로 놀고 있듯이.




이렇게 우리가 평소에는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알고 있을지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그대로 지낼 수밖에 없는 주변의 검은 환경들이 바로 우리의 불안과 불신을 더 증가시키는 요인들이다. 이미 너무 심하게 오염된 폐수나 악취 가득한 쓰레기 상태의 환경이라서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을 지경이라면 전체적으로 아예 폐기 처분하고 새로 정비를 하는 것이 좋은 대안일 것이다. 할 수 만 있다면 이런 대대적인 혁신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제일 이상적이고 좋겠지만, 상황 상 당장은 이런 대형 수리 작업이 힘들다면 작은 것부터 서서히 개조하거나 변화시키는 것도 좋다. 아주 심각한 중대형 문제들이 아니라면 아주 작은 부분만 살짝 방향을 바꾸거나 조정을 해줘도 의외로 꽤 커다란 결과의 효과가 나오는 구조적인 문제나 환경들도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다만 원래부터 그랬으니깐 아무도 문제라고 인식조차도 못해서 굉장히 비효율적이거나 소모적인 낭비가 있어도 무의식적으로 수용해온 분위기 때문에 개선할 필요성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니깐.     



더구나 이런 주변 환경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들이 아니라서 그다지 큰 영향 요인은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오히려 이런 환경적인 요인들은 조금만 개선하거나 막힌 곳을 뚫으면 그 결과의 영향이 얼마나 크게 달라질 때가 많은데 말이다. 가령 위의 컨트롤타워에서 환경적인 부분을 조정하게 되는 일이라면, 얼핏 볼 때는 매우 작아 보이는 것조차도 그 방향의 각도 변화에 따라서 아래로 갈수록 끼치는 영향은 꽤 크게 달라질 때가 많아서 그 결과가 각양각색으로 나타난다. 


‘낙수 효과’라는 말이 괜히 나왔을까.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듯이 고소득층의 소득 증대가 소비 및 투자 확대로 이어져 궁극적으로 저소득층의 소득도 증가하게 되는 효과)


낙수 효과는 윗물의 좋은 현상이 아랫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서 좋은 현상이 또 나타나는 것으로 정의 되어 있지만, 이는 거꾸로 뒤집어보면 윗물의 나쁜 현상이 아랫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현상은 그 영향이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심각해질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어떤 회사나 단체에서 일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런 현상들을 한번쯤은 느껴보지 않았을까. 특히 가장 말단 사원일 때일수록 말이지. 팀장급의 상사가 그저 손가락 하나 튕기는 정도의 지시나 요청을 하여 아주 작은 변화를 가져올지라도 전체 팀원은 엄청난 영향을 받을 때가 많은 법이니깐. 이게 업무적인 지시면 당연한 원리이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지만, 작은 환경적인 요인만 변경해도 그럴 때가 종종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컨트롤타워뿐만 아니라 작은 지원 부서조차도 여러 규정과 시스템을 조금만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설정하게 되어도, 그 밑에 있는 직원들의 업무적 효율성은 엄청 떨어질 수도 있는 법이다. 피라미드 제일 아랫바닥에 있는 사람들만 그 위에 쌓인 무더기의 무게에 깔려서 숨통 막히는 기분이 드는 것처럼. 하지만 어느 누가 거의 죽어나갈 지경일지라도 비명 소리 한번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무심히 던진 돌 하나에 우연히 맞은 개구리는 죽어나갈지라도 그 어떤 비명 소리 한번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 개구리 비명소리 한번 제대로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어떤 소리인지 조차도 모를 걸. 꺅!? 끽!? 케켁!?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여기저기서 죽어나가는 신음 소리가 매일 밤 퍼져나가고 있어도 그런 조용한 비명 소리들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한테 닿을 수나 있을까. 특히 저 위의 피라미드 꼭대기라면 더 들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비명소리들이 많이 터지지 않도록 가능한 여러 환경적 요인들이 애초부터 올바르게 정비되어야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최고로 이상적일 것이다.





이런 비명 소리 방지 목적뿐만 아니라 우리가 희망적인 미래의 삶을 기대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면 이런 기본적인 원리와 상식이 통하는 초기 환경 설정은 더욱더 중요해진다. 물론,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다 똑같은 방식이나 규정으로 돌아가는 건 쉽지 않을 테고 유연성 측면에서도 모든 것을 획일적으로 고정시키는 건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최소한 매우 근본적이고 굵직한 기준들만큼은 제대로 된 토대가 만들어져서 지켜져야지만 신뢰감과 안정감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커다란 울타리 같은 기본적 환경 정비는 긍정적인 낙수 효과를 위해서 필수적이니깐 말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환경을 완벽하게 장착해서 시작하는 건 누구든지 쉽지 않은 만큼 어떤 조직이든 완전한 출발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수정 및 개선 작업 같은 중간 정비 또한 초기 설정만큼이나 매우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령 초기 환경 설정을 거의 완벽하게 했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어느 시점에서 그런 시스템과 절차적인 환경이 일시적으로 올바르게 작동되지 않거나 고장 나서 망가졌다면, 가능한 빨리 수정해서 다시 돌려놓아야 하는 과정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오작동과 고장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게 되는 경우에는 수리 개조 작업을 통하여 원상태로 다시 돌아가야지만 사람들이 더욱 믿고 안심할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을 테니깐 말이다. 기계가 고장 나면 사람이 나서서 수리를 해주는 것처럼, 사회적 환경 시스템이나 절차 또한 부실하게 망가진 상태라면 그걸 사람이 나서서 처리해줄 거라는 믿을 수 있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들이 곳곳에서 발생해도 어디서부터가 잘못인지 문제 인식부터 쉽지 않을 때도 많고 설령 드디어 진단을 해냈을지라도 수정 복구가 잘 되지 않을 때도 종종 있어서, 어떨 때는 오히려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낯설 만큼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로 역설적인 감정이 애석한 것뿐이지. 물론 사람 사는 세상이니깐 과오나 실수들도 발생할 수는 있다. 공장의 자동화 시스템 같은 진짜 기계가 아닌 사회적인 시스템은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은 실수를 하듯이 오류가 생길 수도 있으니깐 말이다. 그래서 사회적 환경 시스템일수록 문제나 고장이 발생하면 중간 해결 및 수정 작업 또한 사람이 나서서 처리해줄 거라는 기대와 믿음을 더 가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공장 시스템 안에 있는 진짜 쇠붙이 기계와 사람이 뭐가 다를까. 사람이라면 분명, 로봇과는 다르게 존재하고 있는 이유가 있을 텐데.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 아닐까.     



시스템 위에 사람 있지, 사람 위에 시스템이 있는 게 아니다.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 것이지, 시스템이라는 절차적 구조나 기계를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절차나 구조 같은 사회적 시스템은 사람 사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개발되는 것이므로, 사람한테 해를 끼치거나 유익하지 못한 시스템이라면 사람을 위한 상태로 원상 복구되거나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적절하지 않은 부실한 시스템을 근거로 하여 사람한테 끼친 피해를 정당화 한다면 완전히 주객전도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마치 시스템 ‘님’을 모시기 위해서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지. 즉, 어떤 피해가 분명하게 발생했는데 원래 절차와 시스템이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식은 가능한 지양되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발생한 피해라면 사람이 나서서 다시 ‘어쩔 수 있게’ 그 손해를 어떤 식으로든 할 수 있는 한 회복시켜 주거나 복구해줘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시스템 덕분에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이 생길 수는 있을지언정 어떤 부당한 손해나 큰 피해까지 발생했다는 것은 뭔가 잘못됐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약간의 불편함과 실질적인 손상은 분명히 다르다. 





만약에 그런 엉망인 시스템이나 망가진 절차들을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하게 된다면, 기존의 일부 사람들한테만 유리하거나 엉뚱한 사람들만 피해보는 상황들이 계속 펼쳐지게 될 것이다. 부정부패가 뭐 따로 있을까. 


꼭 엄청나게 대단한 거대 규모의 중범죄만 부정부패에 해당되는 것일까. 이런 상황들이 점차 쌓이게 되면, 그게 바로 부정부패의 기초적인 씨앗처럼 영양분이 되어줄 것 같은데? 어떤 절차적 시스템이 미비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구성원에게 기준이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아서 형평성에 어긋날 수도 있고, 동일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때그때 다르게 적용되어 악용될 수도 있으니깐 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융통성 있게 좋은 목적으로 약간은 다르게 적용되는 것도 좋겠지만 공정성을 침해하는 정도가 심하게 된다면, 그것은 유연성이 아니라 정의와 질서를 침해하는 것이므로 혼잡을 가져오거나 불신만 키우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부작용들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고질적인 문제들로 오랫동안 막혀 있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것들이 있다면 수정하거나 교통정리 하면서 뚫어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은행에 있는 입출금 시스템 기계를 생각해봐도 금방 알아챌 수가 있다. 그 기계가 자주 고장 나서 나의 현금이 자꾸만 어딘가로 유출되어 없어지거나 올바른 금액이 출금되지 않아서 손해를 본다면 그 기계를 불신하게 되어 점점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비록 어쩌다가 그런 오류가 발생하게 될지라도 은행 직원이 바로 원상복구 작업으로 처리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믿고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은행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기계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처럼, 사람이 만든 사회적인 환경 시스템이나 규정 같은 것들도 이런 믿음으로 돌아가야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안심하고 신뢰하면서 서로가 더욱 존중하고 따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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