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심리 강의 중에 만났던 K는 싫어하는 컬러가 빨간색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딱히 부연 설명을 말하지 않아도 심하게 찌푸린 표정과 부르르 떠는 몸짓이 얼마나 빨간색을 싫어하는지 잘 보여주었다. 자신이 싫어하는 컬러와 연관된 경험이 있었는지 이야기할 차례가 오자 K는 간호사로 일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응급실에서 근무했던 K는 거의 매일 피 흘리는 환자들 틈에서 힘들게 일해야 했다. 피를 수혈하거나 닦아주고 치료하면서 보는 검붉은 피들은 무섭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K는 간호사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오래전에 그만두고 미용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응급실에서 일했던 경험은 빨간색을 싫어하고 꺼리게 했다.
K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K가 왜 빨간색을 그토록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K도 자신이 빨간색을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놀라워했다. K는 빨간색에 대한 어두운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기억을 소환하고 이야기를 끄집어낸 후로 조금씩 빨간색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느 날 여러 가지 색깔의 천을 몸에 두르는 활동을 할 때, K가 빨간색을 걸치자 사람들은 정말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K는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지만, 빨간색 옷을 사 입을 수도 있겠다면서 밝게 웃었다. K는 가무잡잡하고 노란빛을 띤 피부를 지니고 있어서 붉은색 계열을 입을 때 생기있어 보이고 피부색도 밝아 보였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 때문에 빨간색을 입을 엄두도 못 내고 싫어하기만 했던 거다. 하마터면 가장 어울리는 색깔을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살뻔했다고 말하는 K의 모습을 보면서 색채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단순히 싫어하는 색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뿐인데, K가 긍정적인 변화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K에게 빨간색은 시각적인 자극을 주는 단순한 색채가 아니었다. K가 기억하고 연상하는 빨간색은 사람들의 고통과 피하고 싶은 과도한 일들, 두려운 질병과 죽음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공포와 위기를 모두 담고 있는 색채였다. 다시 말해 빨간색은 K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응집해놓은 상징이었다. K는 빨간색에 투사하고 억눌러 두었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문제를 자각하면서 더 이상 어두운 기억을 빨간색과 동일시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빨간색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자 대신 긍정적인 느낌과 반응이 찾아오면서 K는 빨간색의 장점과 아름다움을 비로소 보고 즐길 수 있게 되었던 거다.
K처럼 사람들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색깔을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심리를 투사하기 쉽다. 똑같은 색깔을 보고 선호도가 갈리고 연상되는 기억이나 느낌이 정반대로 달라지는 것도, 색채가 사람들의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추상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러시아의 화가 칸딘스키는 형식과 색채에 의한 서정적이고 환상이 가득한 추상미술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색채의 화가라 불릴만큼 다채로운 색채를 통해 장대한 심포니에서부터 섬세한 내면까지 풍부하게 표현한 칸딘스키는 "색은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공감각 능력이 매우 뛰어났던 칸딘스키는 눈에 보이는 색채 외에 음악을 듣고 색을 표현하는 틍력이 탁월했다. 누구보다 색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다양한 색채경험을 많이 했던 칸딘스키는 색이 영혼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