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풍경
때 이른 풀꽃 위로 하늘이 맑아옵니다
바람이 당신 곁을 들렀다 오는지
봄내가 푸르게 배어있습니다
젖은 흙 아래까지 꽃의 계절이 만개하겠지요.
풍경은 이토록 달라지고
가만 보는 일만 해도 소란스러운데
시간만 얄궂습니다.
당신과 나를 올곧이 지나
기억 뒤편으로 멀어지고서야 우릴 부르는데
그가 머무는 곳을
두세 번쯤 접어내어 펼쳐 볼 순 없으니.
다만
당신을 켜켜이 품고 돌아올 계절을
벌써 부서지는 봄의 쇄편碎片 위로 미리 그려 봅니다.
노랫말처럼,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더군요. 쉬는 날, 오늘도 느즈막 일어나 양치를 합니다. 늘 앉던 곳, 비스듬히 등을 기대도 책을 읽거나 테이블에 손목을 얹기에 손색없는 그 창가 자리가 비어있길 바랍니다. 종종걸음이 되어 좋아하는 카페로 향합니다. 펜, 종이, 노트북, 보조배터리며 티슈 같은 자잘한 짐들을 좋아하는 가방에 챙깁니다. 수납공간이 좁아 좋아하는 책은 빈 손에 듭니다. 미리 꽂아두지 못한 이어폰이 가방에 있기에 그냥 주변 소리를 듣기로 합니다.
서둘러 자리에 짐을 풀어놓고 주문대로 향합니다. 가을부터면 머그잔에 김이 피어오르는 뜨끈한 커피를, 초여름부터면 유리잔에 물방울이 맺히는 시원한 커피를 주문합니다. 잡생각이 들 새도 없이 나온 커피를 만족스럽게 받아 들고 자리에 눌러앉습니다. 이제 서두를 필요 없으니, 마음 가는 대로 여유를 떱니다. 미뤄뒀던 플레이리스트 정리를 하거나, 책을 다시 처음부터 펼치거나, 어딘가 적어둔 글감들을 뒤적거리거나, 바깥 풍경을 구경합니다. 지금은 가을 몇 스푼이 담긴 바람이 여름의 열기를 털어내고 있습니다.
왜 하필 지구는 대략 삼백육십오일을 주기로 태양을 공전하는 걸까요. 왜 하필 이곳이 절반의 북반구 중에서도 또 그 적당한 절반일까요. 왜 하필 사장님은, 한땐 저물어가는 유행이라던 카페를, 왜 하필 이 한적한 동네에 차렸을까요. 닿는 눈길마다 그 취향이 묻어나는데, 왜 또 이 자리만큼은 이토록 그늘지고 이토록 편안하게 했을까요. 왜 하필 나는 이곳에 있게 되었을까요. 눈 위에 서리, 서리 위에 눈, 또다시 눈 위에 서리가 앉듯이, 하필 또 하필이 겹쳐 이 자리에서 서너 달씩을 휘젓는 네 번의 계절을 오늘도 보고 있습니다.
혹자는 봄이며 가을이며 계절의 변화에 무던하지만, 필자는 하루하루 미묘하게 변화하는 날씨에 예민합니다. 살아계신 윌리스 캐리어와 조너선 엘리스, 그 후대 이공계석학 앞에 무한한 경의를 바칩니다. 그런 성격 탓인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숨 쉬어지고, 살갗에 스치는 것들의 일컬어짐(이름)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리며 골몰하곤 합니다. 그중에서도 계절을 일컫는 말은 특별합니다. 그 이름의 그럴듯한 어원 중에서도 제 마음에 드는 것은 각각 이렇습니다.
봄 - 당신을 보다
여름 - 마음을 열다
가을 - 사랑을 거두다
겨울 - 온기에 머물다
*
종종 계절감을 담아내려 했던 글을 보면, 그즈음의 인연과 풍경이 이런 문장들을 내게 주었구나, 생각납니다. 정말 가끔. 하루 수만의 철자를 쓰고 지우던 이십대의 기록을 가끔 들여다봅니다. 첫 단어로부터 마침표까지를. 예나 지금이나 사랑에 관해서라면 마음이든 어디든 여백을 남겨두지 못했기에, 사이사이 놓인 쉼표와 행간, 공백을 보며 흠칫하기도 합니다. 그것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의문합니다. 여기 이 물음표? 여기 이 쉼표, 여기 이 느낌표! 여기 이 공백( ), 그리고 이 마침표. 그것들 뒤로, 그 무렵의 나는 어떤 마음을 몰래 숨겨뒀을까요.
글이란 떠오른 감상을 담아 쓰는 것이지만, 쓰여진 글을 보는 일은 또 다른 감상을 불러일으킵니다.
계절을 보는 일도 그럴까 합니다. 게으른 듯 부지런한 듯 계절은 지금도 태양과 바람으로 풍경을 그려가지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감상-이야말로 풍경으로 하여금 계절을 달리하게 하는 건 아닐는지요.
그런고로, 당신께 고백하건대
일전의 기록을 들여다 봄視으로 말미암아
한여름 지금이 내겐 봄春이라
슬쩍 인정해 봄試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