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선택
"사랑받는다는 건 때로 두려움을 동반하는 것이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인생에서
신은 간혹 나쁜 때를 골라 좋은 사람을 보내 준단다."
- 아키볼드, 가브리엘에게 《당신 없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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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초조해하지 말아야 해.
사랑은 멋지지만 인생에는 사랑 말고도 중요한 것들이 많단다."
- 마르탱, 리지에게 《당신 없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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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던 해, 필리핀에서 어학연수를 받았다. 마닐라였으면 편했겠지만 그곳은 마닐라 남부의 따가이따이Tagaytay라는 깡촌, 산과 호수 사이에 위치한 리조트호텔이었다. 이런저런 레크리에이션 시설을 구비한 리조트였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를 떠올려보면 참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동물원은 얼핏 야산인지 구별하기 어려웠고, 플로팅 레스토랑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으며 당구장과 노래방은 제대로 관리가 안 됐었고, 골프장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물론 관심도 없었지만. 애초에 골프장이 있었는지는 연수를 마칠 무렵에야 알았다. 그나마 깔끔한 수영장에는 가끔 갔었지만 부단한 취미로 삼기에는 영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훗날 군입대를 앞두고 친구와 찾아갔었는데, 당시 한국인 연수생들이 돈을 많이 벌어다 줬는지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카페테리아와 레스토랑은 특히 좋은 쉼터였다. 햄버거, 샌드위치, 치킨, 프렌치프라이,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필리핀 현지 음식까지. 지금으로 치면 가성비 좋은 감성 맛집이었고 여하간 그곳에서 현지인들이나 친구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 연수생들의 일상이자 취미였다.
연수원에서의 생활이 한 달이 지날 무렵부터는 리조트 시설의 효용은 점차 떨어져 갔다. 그 사이 제 짝을 찾아 연애를 시작했던 용감한 새내기들이 있었는데, 누구네가 사귀더라, 누가 고백했는데 차였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이 하루 걸러 하루 가십거리가 되던 때였다. 하지만, 짝을 찾지 못한 대부분은 연애보다 현실적이고 체감할 수 있는 취미에 목이 말라가고 있었고, 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3G 통신망도 대중적이지 않았던 때였다. 노트북에 선불제 인터넷 수신기를 어렵게 구해 달긴 했지만, 유튜브를 시청한다던가 하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내 취미는 마닐라 인근의 국제서점에서 한국어 책을 사다 보는 것이 거의 유일했다. 그마저도 일주일에 한 번 지프니를 몇 번 갈아타고서야 갈 수 있었는데, 갈 때마다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인기도서 코너를 돌며 눈에 띄는 표지와 제목을 골라 보는 것이 전부였다. 아직 그 디귿자 동선을 빙빙 돌던 게 생생하다.
여하간 어느 날엔 평소보다 더 시간이 부족했는데 그때 집어 들었던 것이 기욤 뮈소Guillaume Musso의 2009년작 《당신 없는 나는?》이었다. 제목이나 표지만 한눈에 보고, 이거 로맨스구나, 했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인기도서 코너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 그리고 그 책은 훗날 수년간 프렌치 로맨스 장르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그의 모든 작품들을 불과 몇 주 만에 완독 할 수 있었던 건 그 특유의 흡입력 덕분이었다. 작가의 여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빠른 호흡과 전개방식은 마치 영화 한 편을 보여주는 듯하다. 파리와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며 쫓고 쫓기는 추격전, 두 남녀의 사랑, 이별, 운명 같은 재회. 그리고 감춰졌던 진실과 반전... 지금도 그 제목만 떠올려도 주인공들의 생생한 움직임이 영화 속 장면들처럼 그려진다.
기욤은 그의 소설들을 통해 하나의 공유된 세계관과 독특한 설정을 보여주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당신 없는 나는?》의 공항, 그 '탑승대기구역'이다. 작품 안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묘사되지만, 나는 실제 파리의 샤를드골 국제공항과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을 떠올리며 읽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거의 모든 장소의 로드뷰와 풍경사진을 찾으며 읽었는데 느려터진 와이파이 덕분에 호텔 로비에 앉아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곳은 사경을 헤매는 영혼들이 잠시 머무는 곳, 죽음의 세계와 현실로 향하는 티켓이 주어지는 곳이다.
사고로 코마 상태에 빠진 마르탱은 현실로 돌아가는 티켓을 얻고, 우연히 열네 살 소녀 리지와 마주친다. 연인과의 이별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그녀는 죽음행 티켓을 쥐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티켓과 그녀의 것을 맞바꾸며, 사랑 따윌 위해 삶을 저버리지 말라며 당부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 전 그는 생각했다. 아니, 그래도 중요한 건 사랑밖에 없어. 정말로 중요한 건 사랑뿐이라고...
로맨스는 그 이름처럼 내게 낭만과 감성에 빠져들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감수성에 아직 첫사랑도 겪지 못했을 때였기에, 소설 속 남녀의 이야기에 심취해 버린 나는 어느새 운명의 존재를 맹목적으로 믿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훗날 사주나 팔자, 관상이나 손금 같은 것들에 흥미를 가졌던 이유가 됐을 지도. 그저 물질로만 이루어진 세상이 아닌, 인간을 초월하는 세상-이를테면 천국과 지옥, ‘붉은 실’ 같은 것들-이 있다고 믿는 것이 더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리고 그때 내가 품었던 짝사랑 때문에.
훗날 알게 됐지만, 그 당시 내가 Y를 좋아한다는 건 모든 연수생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그녀도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었다. 어딜 가나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귀여움이 무기였던 그녀. 나는 외모보다도 씩씩함과 발랄함을 아낌없이 뿜어내는 그녀만의 마력에 취해있었다.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랴. 스무 살 청춘들이 인터넷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곳에 모여 지내다 보면 으레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법. 나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졌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꾀 오랫동안 내 마음에 담아뒀던 짝사랑이었다. 우리가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로도, 그녀가 유학을 간다는 소식에 인천공항까지 배웅을 한 이후로도, 그리고 이듬해 겨울 첫사랑을 만나기 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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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어학연수로 얻은 것들 중에 가장 쓸모 있는 것은 룸메이트이자 동기생이었던 T와의 인연이지 않을까 싶다. 수업이 있는 날이든 없는 날이든 밤이면 밤마다 술에 절어 지냈던 우리는 때때로 되지도 않는 경험과 철학을 내세우며 그 어렵다는 미학美學의 심판관을 자처하곤 했다.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아름답지 않은지 따지며 서로의 얄팍한 식견을 들춰대는 것이 주된 안줏거리였다.
그랬던 그에게 술 한잔 하자는 연락이 왔다. Y가 유학길을 떠난 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고, 그 날의 술안주는 자연스럽게 공항에서의 이별과 그 후일담이 되었다.
그 안줏거리의 카테고리를 운명이었다 말하고 싶지만, 실상 내가 왜 Y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지에 더 가까웠다고 인정해야 한다.
너는 인마, 등신이야. 그래가지고 언제 연애할래?
필리핀에서의 몇 달간 나의 온갖 궁상을 지켜봐 온 그에겐 그렇게 말할 자격이 충분했다. 그는 우리가 공유했던 몇몇 기억들을 들추며 눈곱만큼의 숫기조차 보여주지 못했던 나를 꼬집었다.
그때 고백했어야지, 등신아.
다른 남자들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우물쭈물 바라보기만 했던, 도저히 애송이가 아니라 할 수 없던 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꺼져. 나였으면 혀 깨물고 죽었음.
그리고 그날, 그녀를 공항까지 배웅했던 일에 대해선 이랬다.
그냥 보냈지. 뭐, 악수하고.
와. 진짜 넌 안 되겠다.
속으로, 이래가지곤 글렀지, 수긍하면서도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매일같이 상상 속에 새겼던 로맨스의 환상과 그 주인공들의 가호-사랑과 운명에 대한 주옥같은 대사-가 마음 깊이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Y를 떠나보냈던 그날 탑승대기실에서의 작별인사는 운명을 추종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운명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운명? 운명적 사랑? 겁쟁이 새끼. 그래가지고 언제 연애할래?
그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겁쟁이였기에, 사랑을 앞에 두고 아무 결심도 하지 못했던 애송이였기에 나는 운명에 기댄 것이었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만 하기엔 내겐 어떤 자신감이 있기도 했다. 그것은 그녀와 내가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운명에 대한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조금씩 취하고 있었고, 중간부터 우리는 거의 궤변에 가까운 말을 쉴 새 없이 뱉어냈다. 그러나 나는 서서히 어떤 정답에 가까워지는 듯했다. 애초에 세워뒀던 공리公理-운명의 실재와 그 사실성이라는 명제-와는 어느새 한참 멀어진 채로.
"그러니까, 만약 운명이란 게 있다면 나는 그걸 정한 신에게 끝까지 저항할 거야.
운명적 사랑을 믿는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야.
또 그걸 기다리는 건 바보 같고 가엾지.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운명적 사랑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거야.
운명으로부터 벗어나서,
내가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을 매일 아침마다 오늘도 사랑하리라 선택하는 일.
그리고 내일도, 그 내일도 사랑하겠다 선언하는 것만이 진정한 로맨스인 거야."
그날의 궤변이 다다른 정답은 그런 것이었다.
너무 멀리 흘러버렸다 해도 무방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옛 얼굴들과 감정의 흔적들을 되짚어보면, 운명이라 믿었던 모든 짝사랑들이 사실은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던, 어떤 굴레에도 속박되지 않았던 나의 자유였고 선택이었다.
그래서 그날의 궤변이 다다른 곳은 정답이었다. 다만, 그 후로 내 자유로운 의지로 선택했던 사랑들은 모두 어디로 흘러갔을까. 믿어 의심치 않을 곳이 없었다.
의지와 자유로 사랑했던 당신들은 모두 어디로 흘러갔을까.
거대한 강줄기를 따라 다가오는 세월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굽이치는 흐름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이따금 떠오르는 음표들처럼, 물고기 무리들은 이제 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 어딘가에, 여전히 당신이 있다는 것만이 위로가 될 뿐이다.
첫사랑은 언제나 마지막 사랑
- 타하르 벤 젤룬
*
어느 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네 옆모습을 보는데
너를 이루는 일만 개의 선들이
하나하나,
헤아릴 수 없는 그 선들이
이어지고 갈라지고 또다시 이어져
완전무결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었다.
*
Y에게.
필리핀 어학원에서 처음 마주쳤던 날을 기억하는지.
건기에서 우기로 넘어가던 때였지. 그래서 햇볕과 비가 한자리에 동시에 내리던 때였어.
수백 명이 모여있던 낯선 그곳, 널 처음 마주쳤던 그날의 날씨와 색깔들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로비, 객실, 강당, 카페, 수영장... 그곳 어디든 기어 다니던 작은 도마뱀들의 움직임들마저 꼭 며칠 전처럼 생생하지.
호텔 로비로 모여든 연수생들 틈에서 2인용 소파에 우연히 나란히 앉게 됐을 때. 어느 새벽 1층 카페테리아에서 마주쳐 배가 고파 잠이 오지 않는다며 클럽 샌드위치를 나눠먹었을 때. '동기생의 밤' 행사를 준비하느라 지프니에 올라탔을 때. 한 시간이나 덜컹거리며 도착했던 그곳 한식당에서 둘이서만 몰래 삼겹살을 사 먹었을 때. 연수생들끼리 놀러 갔던 어느 섬 바닷가에서 널 등에 업고 깊은 곳까지 헤엄쳐 갔을 때. 그날 저녁노을로 물든 언덕길을 단둘이 걸으며 그곳에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때. 모닥불의 붉은빛으로 물든 네 모습을 바라봤을 때...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들 중 내게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은 건 아무래도 그 시간들뿐이야.
그 모든 시간들로부터 인천공항 탑승대기실에서 나눴던 작별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말이지.
바보 같은 말이지만, 그 모든 순간들이 내겐 운명 같았어. 좋아하던 어느 작가가 지어둔 운명의 상징은 내게 인천공항 탑승대기실이 되어 있었지. 그래서 그곳에서의 마지막 작별마저도 운명이라고 믿었어. 십수 년의 세월이 지나도 결국 만나게 될 거라 믿었지.
너에게 편하게 다가갔던, 네 마음을 독차지하려 했던 많은 남자들처럼 보이기 싫었다. 그건 단순히 내가 겁쟁이였기 때문이겠지. 지금도 지독한 겁쟁이지만, 그날 우정의 악수를 마지막으로 인사했던 건 내가 겁쟁이라서가 아니었어. 스무 살의 한때를 나눴던 좋은 친구로 널 응원하는 편이 내가 믿는 운명에 힘을 더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그날 마지막까지 숨겼던 건, 타하르 벤 젤룬이란 낯선 사람이 남긴 한 구절, 몰래 바라보기만 하던 내가 남긴 네 모습이었다.
널 보낸 이듬해 겨울, 네가 아닌 첫사랑을 만났지만,
널 만난 그 여름 같았던 봄, 마지막 사랑이라 믿었던 첫사랑을 했다.
A로부터.
추신.
이 편지를 네가 읽어볼 일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저 맴돌던 마음을 적어냈을 뿐이야. 그 마음은 이런 거야.
정말 운명이란 게 있어서 그때의 운명이 아직도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때의 우리를 잠시 스치게 했다는 것만으로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 마음.
단지 그뿐이야.
우리는 자유로울 운명을 타고났고, 운명을 선택할 자유를 타고났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끝에 또 다른 선택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선택도 끝내 자유롭진 못한 듯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할 때면 그저 운명에 기댈 수만은 없게 되고, 더 강하게 구속해 줄 사랑을 원하기도 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 오래된 정답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정답을 떠올립니다.
당신이야말로 내 운명이라고.
매일 아침 나의 자유로운 의지로, 당신이라는 운명을 선택하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