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따르기엔 과분했던
알맞게 취하지 못했던
털어 버리기엔 아쉬운
버려지는 편이 낫다며
흘러넘치게 따라버린
몸서리치게 마셔버린
씁쓸하지만은 않았던
밑잔처럼 남아버렸던
가장 서툴렀던,
*
집을 나서 들이쉬는 첫 공기가 새삼 차갑게 느껴질 때면, 이상하게도 설렘에 가까운 기억들이 떠오른다. 곧 겨울이 오려는 지, 당신의 기척이 바람을 따라 나타난다. 닳고 해진 기억의 틈 사이, 속절없이 날아간 손수건의 이미지가 다시 떠오른다.
우리는 무엇이 더 좋은지, 무엇이 더 옳은지 예견하려 애쓰며 시시콜콜 계절을 낭비했다. 계절은 돌고 돌아, 결국 돌아오니까,라고 변명했던 안일함으로. 그 말은 어쩌면, 떠나보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암묵적인 항복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계절은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는 하나의 단위였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돌아오는 그것을 관망하며, 나와 당신이 있던 어느 계절을 받아들인다. 예년보단 조금은 덜 춥길 바라면서, 내년엔 당신의 기척조차 조금씩 해져가길 바라면서.
그런 나의 소망은 산을 마주 보는 일에 가까웠다. 숲의 뿌리가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은 사랑했던 기억, 흐르지 않는 물은 그때 멈춰버린 시간, 골짜기에 붙잡힌 바람은 당신의 모습이었다. 그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모든 것을 맨손으로 퍼내야 하는 기약 없는 소망이었다.
사랑을 잊는다는 건 결국 그 세월이 영겁에 가깝다 해도 끊임없이 그곳을 찾아가야 하는 일인 셈이다. 하지만 마음은 따라주지 않는다. 더는 쓸모 없어진 기억들을 구태여 뒤적거려 얻어가기만 하는 일이 된다. 잊겠다는 다짐은, 계절은 다시 돌아오니까, 변명하며 다시 기억을 찾아내는 일이다.
유치하게도, 사랑은 언제나 미움을 동반했다. 누구보다 당신을 제일 사랑한다 말하며, 그렇게 짝사랑을 자처하면서도 채워질 수 없는 욕심에 미움을 얹곤 했다. 그러나 미워할 수 없었다. 고백하건대, 사랑에 빠진다는 건 아름답기만 했던 당신의 존재 앞에 고요히 항복하는 일이었다.
아직 스물 남짓이었던 당신. 넓게 펼쳐진 대로의 초입 같았던 당신. 왜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나, 답이 정해진 의문들은 잠 못 이룬 밤들을 켜켜이 포개었다. 매일 잦아드는 밤은 곤욕스러울 뿐이었다.
봄
가을이 맞닿은 지금, 그때 그 가을의 의문을 떠올린다.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불가능했음을 인정한다. 프레겔강의 다리 건너기를 할 때처럼 눈길과 손끝을 연달아 짚어내며, 사랑했던 계절을 떠올린다. 봄이었지만 봄이 아니었다. 그 어떤 푸른색의 것들도 당신의 입가에 닿아 빛을 잃었기에. 세상의 모든 생기가 당신의 눈가에 머물렀기에.
그 무렵 세상이 다르게 보였던 것은 당신 탓이었다. 당신을 사랑했던 탓에, 당신이 내 안에 가득했던 이별의 잔해들을 모두 털어내 버렸던 탓에, 나는 전에 없던 두려움을 앓곤 했다.
세상이 끝나버리면 어떡하지? 네가, 혹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지?
그 두려움조차 사랑했다. 내 손발이, 눈과 입가가, 생각과 마음이 가만히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으로 날뛰었다.
여름
우리의 여름은 격정으로 가득했다. 채 넉 달이 되지 않는 사이, 우리는 예고없이 쏟아지는 감정의 소나기를 매번 피하지 못했다. 그 무렵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면 이렇다.
새벽. 나는 먼저 눈이 떠진다. 옆에 잠든 네 모습을 바라보며 네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너는 간밤의 일들을 떠올리며 쉽게 잠에 들지 못한다.
아침. 나는 먼저 외출준비를 끝낸다. 멋대로 늦장 부리는 네 모습과 시계를 번갈아 쳐다본다.
너는 겨우 잦아든 잠에서 깨어 지난밤 나의 무심한 말을 떠올린다.
점심.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너를 보며 괜히 기운을 차려주려 한다.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너는 제멋대로였던 내 모습을 잊어보려 한다.
오후. 별 계획을 세워두지 않았기에 발길이 가는 대로 걷는다.
어딘가 달라진 내 모습을 너는 이해해보려 한다.
카페. 여전히 침묵하는 너에게 걱정스레 묻는다, "왜 그래?"
아무렇지 않게 묻는 내 말에, 너는 북받치는 설움을 애써 삼킨다.
벤치. 왠지 화가 나버린 네 모습을 보며 애써 웃으며 말한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투정을 부리면 내가 알아차리고 사과할 거라고 너는 믿는다.
거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한숨 쉬며 널 보낸다.
너는 돌아선다. 내가 뛰어와 붙잡을 거라 믿으며.
...
가을
거두어들임, 앗아감을 어원으로 하는 그 계절, 우리는 분투했다. 세상 그 무엇도 서로를 앗아갈 수 없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격정으로 가득했던 두 번의 여름을 무사히 지나 보냈기 때문이었다. 다툼과 화해, 불안과 위안을 반복하는 일에 우리는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꽃은 눈물의 성분을 견디지 못한다. 너와 나의 눈물은 창졸지간 떨어져 휘몰아치는 낙엽이 되었다. 누구도 돌보지 않았던 꽃은 시들었다. 나는 너로부터 내 화분을 앗아갔고, 너는 나로부터 네 화분을 거두었다.
헤어짐은 간결하지 못했지.
우리는 미명-사랑해야 하는 구실-을 찾으려 했다. 만남과 이별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이해의 폭은 너무도 좁았고 구속의 무게는 더없이 무거웠다. 보폭이 달라진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걸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멀어지기만 했다. 어느새 겨울을 풍경으로 하는 곳에 네 그림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갈림길 앞의 그 세 번째 선택에 관해서는, 그땐 깨닫지 못했다.
겨울
씨앗은 뿌리를 내리는 찰나의 순간 본연의 생명을 잃는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생명을 시작한다.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겨울이 오면 그 생각을 놓치지 않았다.
생명을 포기해야만 하는 씨앗의 심정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씨앗은 그에게 새겨진 숙명-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을 어떻게 온전히 받아들일까 의문했다. 더 나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본질을 받아들이는 씨앗. 그것은 더 나은 무언가가 된 이후에도 그 자신이 애초에 씨앗에 불과했음을, 죽음을 받아들였음을 알고 있을까. 나는 당신의 죽음-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겨울은 내게 전에 없던 추위로 다가왔다. 너와의 이별이 그랬고, 갑작스럽게 몰아친 온갖 실패와 좌절이 그랬다.
일 년 후
봄이었던, 여름이자 가을이었던 너는 또 겨울이 되었다. 겨울은 앗아가는 것이 없다고 했다. 정말로 그랬다. 하루하루의 계절들을 거쳐 당신이 남기고 간 기억들이 그곳, 내 마음속 눈밭 아래 폭 안겨 있었다. 그것들을 너는 진작 앗아갔어야 했다. 아니, 앗아가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니, 아니…
「땅에 스미는 봄비, 귓가를 울리는 매미, 늦깎이로 흩날리는 개쑥갓 풀씨까지 결국 겨울이 앗아가는 것은 없다. 소복이 쌓여온, 아직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들만 하얗게 녹지 않는다. 그럼에도 봄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하루하루 계절이 되어 돌아오는 당신을, 나는 아직 사랑하는 탓일 테다.」
그때의 기록으로 말미암아,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당신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당신은 내 마음에 몇 조각 파편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
첫 취업과 동시에 자취를 시작했던 스물일곱의 겨울이었다.
첫사랑의 아픔은 일고여덟의 계절을 지나며 희미해져 있었다. 취업과 자취의 로망을 한꺼번에 실현시켰던 터라 겨울 특유의 계절성 우울은 눈곱만큼도 없던 때였다. 당장 몇 달 뒤면 첫 출근이었고, 그때까지 한동안 여유를 즐길 생각에 들떠있었다. 더군다나 겨울은 크리스마스의 계절, 마냥 울기만 해선 안 되는 계절이지 않은가. 아직 그 무렵이면 털북숭이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꿈을 꾸기도 한다.
12월 9일 토요일
자취방으로부터 도보 10분. 작은 이자카야의 파트타임 홀서빙 면접을 봤다.
음, 알바는 많이 안 해봤네. 오늘부터 근무할 수 있겠어?
형님이라 해도 될 정도로 젊은 사장님과 그의 동생-작은사장님- 둘이서 운영하는 작은 술집이었다.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가게는 손님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여대 코앞이었던 탓에, 마침 주말이었던 탓에 가게는 온통 초년初年의 푸릇한 기운으로 들썩거렸다. 술집 아르바이트는 처음이었지만, 경험 아닌 경험을 살려 첫날부터 썩 일 잘하는 녀석 취급을 받았다.
내가 너 왜 보자마자 뽑았는 줄 알아? 딱 봐도 열심히 하겠다 싶어서.
그날 마감 후 사장이 한 말이었다.
12월 10일 일요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이었다. 아직 오픈준비를 하던 중에 출입종이 짤랑거렸다.
저, 면접 보러...
그러고 보니 전날 내 이력서와 함께 몇 장의 이력서가 함께 있었다. 그녀는 그 이력서의 주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우산이 없어 머리칼이며 어깨며 온몸에 눈발을 뒤집어쓰고 있던 그녀는 사장이 건넨 핸드타월로 주섬주섬 눈을 털어냈다. 사장이 이력서를 뒤적거리는 사이 그녀는 전날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음, D 씨... 알바는 많이 안 해보셨네요. 오늘부터 근무하실 수 있겠어요?
이상하게도 사장은 그녀에겐 존댓말을 썼다.
12월 11일 월요일
새벽 01:00
일요일이라 손님이 없겠지 예상했지만 한창때 여대생들의 주도酒道는 대단한 것이었다.
한두 시간 더 일할 수 있지?
근무시간이 끝난 때였고, 여전히 떠들썩한 만석滿石의 풍경처럼 사장은 기운이 밝아 있었다.
저는 어차피 기숙사 통금시간 지나서 괜찮아요!
그 코앞이던 여대 학생이었던 D는 전공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려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를 왜 뽑았냐고, 물어보나 마나 사장은 이렇게 답했을 터였다.
이쁘잖아.
12월 15일 금요일
그러고 보니 제 생일이네요.
인마,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하냐?
마감시간이 훌쩍 지난 새벽,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그냥 보낼 순 없다며 작은사장이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고 큰사장은 오히려 잘 됐다는 듯 신나 보였다.
그리고 그날의 술자리는 어느새 나와 그녀, 단 둘의 2차로 이어져 있었다.
05:00
그럼 영어 잘하시겠어요?
그 정도는 아니고요.
07:00
...
저도 취했어요. 주무시면 안 돼요!
스물일곱 번째 생일날, 아무 일도 없지 않았다.
*
D에게.
누군가 내게 아름다운 이별이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 한 번을 뺀 모든 이별들이 아름다웠다 답한다. 그리고 너는 내게 단 한 번 아름답지 못했던 이별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헤어지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후회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겨울은 너와 헤어진 가을이 조금 더 추워진 계절일 뿐이었고, 봄 햇살이 땅을 녹일 때가 되어서는 어느새 각자의 생활이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봄 언젠가 우리는, 딱 하루만큼의 재회를 서로에게 허락했지. 맛있는 걸 사달라는 갑작스러운 네 연락에 사소하지만 어떤 두근거림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미련임을 알고 있었지. 우리에게 남았던 두 번의 봄을, 다시 한번 나란히 마주해 보고 싶었던 건 너도 마찬가지였을 테니.
훗날, 몇 번의 봄을 맞이할 때면, 그날 널 태우고 갔던 호수공원을 떠올리곤 했다. 정말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며 네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었지. 특수효과라도 넣은 듯 산들바람에 휘날리는 벚꽃이 네 주변에 분홍으로 빛났었지. 그리고 그건 정말 마지막 선물이 되었지.
훗날 몇 번의 여름엔, 그 더위에 짓눌려 가쁜 숨을 내쉴 때면, 숨 가쁘게 다퉜던 격정을 떠올리곤 했다. 아침에 만나자마자 싸움판을 벌이고는, 해가 져선 서로 온몸이 뒤엉켜 있기도 했지.
훗날 몇 번의 가을은 서로를 떠나보냈던 그날의 온도로 마음까지 서늘하게 하곤 했다. 곧 추위가 우리 세상에 닥쳐올 거라고, 겨울을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미리 겨울옷을 봐두곤 했지.
훗날 몇 번의 겨울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너의 조각들을 떠올리며 계절을 견뎌냈다. 널 처음 만났던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 그날 저녁, 어색하게 한 침대에서 눈을 맞췄던 그날 아침, 롱코트 주머니 안으로 손 잡았던 그날 밤을 떠올리며 농담하곤 했지.
언젠가 내 휴대폰을 뒤적거리던 너는 내가 정신없이 써냈던 글들을 보게 됐지. 그때 글마다 필명을 붙여둔 걸 보고서는 흠칫 놀라기도 했지. 수백에 달하는,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던 남루한 원고들을 두고서 너는 물었지, 이게 다 뭐냐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발뺌하듯 부정했지. 민낯 같은 글들은 너에게조차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의 민낯 같은 글들은 지금껏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다 믿었는데, 사실 오랜 기억 속에 네가 있더라.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어서야 나는 너에 대한 나의 악의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너는 그저 네 안의 상처받은 소녀를 가만히 두지 못했던 미숙한 청춘일 뿐이었고, 나는 그 소녀를 힘껏 안아주지 못한 서투른 남자일 뿐이었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지. 첫사랑은 가장 서툴렀던 사랑이라고. 그렇다면, 내가 가장 서투르게 사랑했던 너는 내 첫사람임이 분명하다.
또 누군가 그렇게 말했지. 첫사랑은 언제나 마지막 사랑이라고. 우스운 말이지만, 어쨌든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사랑했으니 첫사랑과 비교해도 썩 괜찮지 않겠니.
문득 지금의 네 엄지손가락은 어떤지 안부를 묻고 싶구나. 어느 날의 편지처럼, 지금은 괴로움 없이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길 바란다. 그때 널 짝사랑했던 나만큼, 너도 너만의 짝사랑을 만끽하길 바란다.
A로부터
ps. 네게 전할 일 없는 이 편지 같은 글은 작년 겨울 그 술집이 있던 곳을 우연히 지나며 떠올라 써놨었다. 그때는 많은 날 글감이 되어줬던 네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언젠가의 초고初稿는 가을이라 해도 무색한 때였고, 오늘에 이른 탈고脫稿는 충분한 가을입니다.
기록해둔 옛 이야기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자못 그 감정을 함께 되새기는 일과 다름없음을 또 한 번 생각합니다. 계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은 특히나 그랬습니다. 이 이야기의 실타래는 한때의 겨울로부터 겨울까지 꼭 여덟 번의 계절을 빙 두르고 있었고,이제는 몇 푼 되지 않는 조각난 실타래들이 계절을 풍경으로 가끔 떠다닙니다.
그 가을이 남긴 이별의 조각은 이제 너무 가벼워 애써 떠올려야 하는 것이 되었지만, 나는 조각의 수집가. 마음 속 어딘가 잃어버린 유리조각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사랑은 그곳에 당신이 있기에 시작되었고, 대가 없는 선물처럼 다가온 그것은 때때로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사랑은 미움과 함께하는 것. 슬픔은 자유와 의지로 기꺼이 감내하는 것. 단순한 사랑을 예찬했던, 그때의 그 시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복층 다락방에 달아둔 조명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한산해진 사거리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 어느 노랫말을 따라 흥얼거리다 소주잔에 낮게 깔린 밑잔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밑잔은 첫사랑, 첫사랑은 밑잔.
그렇다면
두 번째 사랑도 첫사랑,
세 번째, 네 번째도 첫사랑인 건 아닐까.
이 작은 유리잔에 낮게 깔린 밑잔이, 요듬들어 당신을 떠올리게 하는 건?
그렇다면 당신도 내 첫사랑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억지일까요.
술독에 빠져들고 싶은 새벽, 억지쟁이는 맛없는 소주 한 잔 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