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집을 나서며 생각했다.
‘오늘은 미세먼지가 심하니 꼭 KF94 마스크를 끼고 나가야겠다.’
미세먼지는 어느샌가 우리 삶을 꽤 바꾸어 놓았다.
집 안에서도 미세먼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환기조차 쉬이 허락되질 않았고 공기청정기는 필수 가전이 되었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면 달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미세먼지를 피해 헬스장의 러닝머신 위로 도피를 하고,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두꺼운 마스크를 끼고서라도 산책을 강행할 순 있겠지만 기분 좋고 상쾌한 산책은 기대하기 어렵다.
자전거나 축구, 테니스 같은 야외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서길 포기하는 것 이외에는 뚜렷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뜻하고 상쾌한 봄날은 멸종 위기에 놓인 야생동물처럼 쉽게 만날 수가 없다.
얼마 전 벚꽃이 가장 만개했던 주말에 수많은 사람들이 벚나무 아래로 향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역 벚꽃축제나 벚꽃놀이 명소로 향했는지에 대한 뉴스를 보고 있을 때 휴대폰의 알림이 무신경하게 울렸다.
‘미세먼지 최악, 절대 나가지 마세요.’
사람들이 벚꽃놀이를 위해 찾는 벚꽃놀이 명소인 ‘온천천 벚꽃터널’이 공교롭게도 우리 집 코앞에 있었는데, 정작 나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벚꽃을 싫어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꽃도 여유도 그리고 낭만도 좋아하는 나였지만, 500을 넘어버린 미세먼지 수치 때문에 그날 내 낭만은 허락되질 못했다. [상식적이지 못한 수치였다. WHO에서는 50을 넘으면 ‘나쁨’ 100을 넘으면 ‘매우나쁨’으로 분류한다.]
베란다에 갇혀 저 멀리 미세먼지의 횡포에도 낭만을 포기하지 않은 용기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한 치 앞만 보이는 뿌연 하늘과 그럼에도 보일 정도로 만개한 벚꽃이 만든 터널, 그 아래 가득히 모인 마스크를 쓴 사람들.
새하얀 도화지에 예쁜 분홍빛의 벚꽃을 정성스레 그린 후, 잿빛 시멘트를 부었달까?
낭만을 금지당한 나, 혹은 낭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이어가는 사람들.
어떤 것도 명쾌하지가 않았다.
많은 것들이 전과 달라졌다.
미세먼지가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
당연한 것이 더는 당연하지 않아졌다는 사실.
나는 그게 슬펐다.
애석하게도, 지하철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내 기관사로서의 일상도 바뀌긴 매한가지였다.
사실 우리 지하철이라는 곳은 미세먼지의 온상이다.
지하라는 공간, 철길 위 철바퀴에서 비롯되는 미세한 입자의 쇳가루들.
어찌 보면 미세먼지의 최전선이라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하철에 속한 기관사를 비롯한 우리 지하철인들은 미세먼지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특히 나는 일을 시작한 이후에 천식이라는 병을 얻은 만큼 그 관심이 남달랐다.
승강장이나 역사에 있는 ‘공기질 개선장치’를 열차 내부와 운전실 내부에도 설치해 주길 끊임없이 요구했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KF94 마스크를 끼고 휴대용 공기청정기를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은 그리 이상한 사실이 아니었다.
처음 휴대용 공기청정기를 살 때 그 효과에 대해 크게 신뢰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공기청정기에 내장된 미세먼지센서의 표시등이 ‘나쁨’에서 ‘보통’ 그리고 ‘좋음’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며, 진작 구매하지 않고 천식이라는 질병까지 얻게 될 과거의 내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것은 나누어야 하는 캐릭터였기에, 휴대용 공기청정기의 효과에 대해 동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기관사들이 모여있는 휴게실에서 얘기를 꺼냈는데, 하나둘씩 각자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공기청정기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갑작스럽게 휴대용 공기청정기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휴대용은 필터가 H13이냐 H11이냐, 제거 능력이라는 수치가 가지는 의미부터, L사 모델은 어떻고 C사 모델과 S사 모델에 이르기까지. [공기청정기를 광고하는 우리 사이에서 숨쉬기도 힘든 1급 방진 마스크를 어필하는 강철 심폐를 가진 기관사까지.]
이렇듯 우리 기관사들이 속한 지하철이라는 단체는 진작부터 미세먼지에 대한 관심이 분명할 수밖에 없었다.
철길 위에서 철바퀴를 가진 쇳덩어리 지하철이 브레이크를 잡을 때마다 어마어마한 금속 미세먼지들이 화산처럼 뿜어져 나왔기에, 지하철은 태생적으로 미세먼지에 취약했다.
지하철에게 미세먼지는 ‘선천병’이었다.
때문에 지하철에게는 미세먼지라는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변화하지 않을 정당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미세먼지라는 유전적이며 선천적인 질환, 철길에 철바퀴라는 태생적 한계, 지하라는 공간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문제들.
그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지하철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저 우리가 몰랐을 뿐이었다.
터널 물청소, 역사와 승강장 그리고 열차에까지 공기질 개선장치 설치, 미세먼지 제거용 벽화, 미세먼지 제거 식물, 스크린도어 설치, 미세먼지 전문 부서 신설, 이외에도 다양한 연구 개발 및 적용 등 미세먼지라는 선천적이고 태생적인 질환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해오고 있었다.
그 결과 아직 완벽한 ‘미세먼지 청정구역’이 되진 못했지만,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오히려 도심의 공기보다 훨씬 깨끗한 공기질을 가진 ‘상대적 미세먼지 청정구역’을 만들어냈다.
최악보다는 차악을.
차악이라면 이젠 정상을.
태생적인 한계를 가졌음에도, 외면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한 단계씩 변화해오고 있었다.
더뎠지만 분명한 극복이었다.
변화 혹은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그것들을 이루어지게 하는 원리가 있다면, 그건 어쩌면 작은 생각 같은 데서 시작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대론 안되겠다 미세먼지를 개선해야 되겠다 같은 작고 구체적인 생각에서.
정해진 선로만을 달리는, 변화할 수 없는 가장 고리타분한 존재라 여겼던 지하철.
하지만, 오히려 고리타분했던 건 내 쪽이었다.
이 촌스럽고 각진 지하철이 매일 꾸준하고 올곧게 달리는 이유를 이젠 알 것도 같았다.
나는 마이크를 잡았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어떤 작고 구체적인 생각들을 하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