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사가 승객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일은 드물다.
가끔 만나는 경우가 있다면, 종점까지 운행 후 열차의 운행 방향을 바꾸는 회차를 할 때 라거나, 운행을 종료하고 차량기지로 입고할 때가 그 드문 경우이다.
원래는 내려야 하는데 내리지 못한 승객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열차 내부를 확인하다가 승객과 만나면 서로 멈칫하다 묻게 된다.
“못 내리셨어요?”
서로 민망한 상황이다.
그러면 우리는 승객을 가까운 역으로 인도해 준다.
그때 머쓱해하며 말을 건네는 승객도 있었고, 안내해 주는 내게 도리에 화를 내던 승객도 있었지만,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승객은 따로 있었다.
여느 때처럼 종점인 장산역에 도착해서 방송을 했다.
“열차 마지막 역인 장산역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모두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승객이 내리기 시작했고, 덕분에 내 열차는 2호선 모든 열차 중에 가장 가볍고 홀가분해졌다.
그런데 그때 한 승객이 요염한 걸음으로 제일 앞 칸에 탑승했다.
당황스러웠다. 내리라는 방송을 하자마자 타버리다니…
하지만 그 승객의 걸음에는 정말로 어떤 요염함이 있어서, 당황보다는 놀라움이 들게 했고 나로서도 그 사실이 내심 싫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침 제일 앞 칸이었기에 승객에게 다가가 내리길 부탁했다.
하지만 이 요염한 승객은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나는 승객을 내리게 할 작정으로 붙잡으려 했으나 어찌나 날랜지 내 손길 한 번을 허락지 않았다.
더 이상 열차를 지연시킬 수 없었던 나는 우선 회차[종착역에서 반대 방향으로 열차의 진행 방향을 바꾸는 일, 지하철은 앞뒤로 총2개의 운전실이 있다]를 시작했다.
회차를 하면서도 승객을 붙잡으려 했지만 붙잡을 수 없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자면 내가 닿을 수 없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관제에 보고했고, 운행 방향을 바꾸어 장산역 반대 승강장에 도착했을 때, 비장한 각오를 한 역무원과 공익요원이 큰 비닐과 빗자루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역무원과 공익요원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이었겠지만, 나는 사실 내 요염한 승객이 잡히지 않길 바랐다. 잡히지 않고 계속 내 열차에 타고 있어주길 바랐다.
내 작은 바람과는 반대로 그들은 너무 능력 있는 사람들이었다. 빗자루와 큰 봉투를 사용하는 법을 어디 정부기관에서 교육이라도 받은 건지, 단숨에 내 승객을 큰 봉투에 넣은 후 내리게 했다.
그렇게 그 요염한 승객은 역무원에게 안긴 채 가장 귀여운 형태로 끌려나갔다.
내 고양이 손님의 하차였다.
[사실 고양이 손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타자마자 내리라니… 그것도 보쌈을 당한 채로 말이다…]
사실 대부분의 승객들은 고양이 손님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미처 내리지 못했을 때] 불안함을 느낀다.
컴컴한 터널 속에 멈추어버린 지하철에서 혼자인 자신을 마주하고, 열차 내부에는 불이 켜져 있음에도 순간 낯설어진 공간에 두려움을 느낀다.
아마 자신이 내리지 못한 채 버려지거나 잊혀지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일 것이다.
급하게 누군가를 찾기 시작하고, 기관사를 마주하고 안도한다.
이처럼 일반적인 승객[인간]들은 두려워했지만 고양이 손님은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다른 승객들과 고양이 승객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나 역시 마찬가지 인간으로서, 우리가 너무 규칙이나 사회적 인식 같은 정해진 틀에서 살아가려 해서 그런 것 아닐까?
남들이 하는 대로 하려는, 거기서 멀어진다면 불안해하는, 심할 때는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이것이 어떠한 관성[물체가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 정지해 있는 물체는 정지 상태를 유지하려 하고 운동하고 있는 물체는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이라면,
이건 ‘사회적 관성’이 아닐까?
관성이라는 힘을 보았을 때, 그 힘을 이겨내야만 뛰던 사람이 멈출 수도 멈추었던 사람이 달릴 수도 있게 된다.
갇혀버려 불안했던 승객들과 달리, 우리 고양이 승객처럼 사회적 관성을 이겨낼 수 있을 때, 삶에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거 아닐까?
가령 꿈을 이룬다거나 하는 꽤 멋진 거 말이다.
아무나 이룰 수 없고, 사회적 관성을 이겨내고 멈추거나 달릴 수 있는 사람만이 목적지에 가닿을 수 있는.
내 고양이 손님은 ‘사회적 관성’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그저 즐거울 수 있었다.
아 그리고 내 고양이 손님이 전해준 바로는,
끌려나간 뒤에 친구 고양이들에게 가 썰을 풀었다고 한다.
“너네 지하철 타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