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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훈 Oct 18. 2023

기관사의 가방, 대체 뭐가 들었을까?

어떠한 규정에서도 기관사가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모든 기관사들은 가방을 들고 다닌다.

제각기 다른 형태의 가방에 각자의 물품들을 넣어서.

어떤 형태의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지, 어떤 물품들을 챙겨 다니는지, 거기서 해당 기관사의 성향을 엿볼 수도 있다.

가방은 한마디로 기관사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기관사가 일을 할 때는 항상 가방이 따라다닌다. 마치 가방 없이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동시에 가방은 미스터리한 존재이기도 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투명한 가방을 들고 다녀서 내용물을 훤히 보여주는 기관사가 없기 때문인지, 기관사라는 존재 자체가 신기했기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기관사의 가방에 대해 궁금해했다.

같은 기관사끼리도 서로의 가방에 대해 내심 궁금해한다. 기관사끼리는 대략적인 추측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궁금증을 자아낼 때가 있다. [가끔 동료 기관사들이 내 큰 가방을 보고 안에 대체 무엇이 들었는지 묻기도 했으며, 그런 나 역시 독특한 가방을 멘 기관사를 보면 호기심이 일곤 했다.]


자 그럼 모두가 궁금해하며 미스터리 그 정중앙에 놓여있는 기관사의 가방.

이 자리에서 파헤쳐 보겠다.

낱낱이.




우선 공통적으로 들고 다니는 물품들을 나열해 보겠다.


1. 가방

그래 우선 가방이다.

기관사의 취향 혹은 성향, 개성에 따라 다양한 가방이 사용된다.

기본적으로는 뒤로 매는 백팩과, 손으로 들고 다니는 도트백이 사용된다.

무난한 형태의 가방을 들고 다니는 기관사들이 많지만, 독특한 가방을 이용하는 기관사들도 적지 않다.

운동화 끈 같은 것이 끼워져있는 운동화 모양으로 생긴 백팩을 멘 기관사, 체인 감긴 가방을 들고 다니는 기관사, 길쭉한 운동용 크로스백을 메고 다니는 기관사 등등.

또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가방을 들지 않고 차를 타는 기관사까지.

나만 보더라도 45L 짜리 군용 전투용 배낭을 메고 다니는데 다들 내 가방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해한다. 나는 꼭 챙기는 물품이 있어서 이 가방을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되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밑에서 공개하도록 하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힙색이나 명품 클러치 백을 든 기관사가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런 기관사가 있다면 단연코 우리들의 스타가 될 테니까.]


2. 열차 운전시각표

기관사들의 근무는 매우 불규칙하고 매일매일이 다르다.

우리 사업소의 경우만 보더라도 약 50여 개의 근무가 존재하고, 그 근무들도 평일, 토요일, 휴일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기관사들은 당일 근무에 대한 시각표를 받아서 근무에 임하며 그 시각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니 당연하고도 절대적으로 열차 운전시각표와 함께 움직여야만 한다.


3. 승무일지

간단히 말해서 기관사의 일기장 혹은 업무수첩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릴 때 쓰던 일기장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위쪽에 날짜와 오늘 근무를 적어놓고 가운데는 오늘 근무의 특이사항이나 주의할 점 등을 적어둔다.

속지를 다 쓰면 교체할 수 있는데, 2018년에 기관사가 되어 승무일지를 쓰기 시작한 이후로 셀 수 없이 속지를 다 쓰고 교체했지만, 처음 기관사로 근무하며 겪었던 일들을 적어놓은 약 3개월치의 승무일지는 절대 바꾸지 않는다. 거기 적힌 내용들은 전부 정확하게 기억할 정도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 깃든 주술적 힘으로 인해 나는 그 속지들을 버릴 수가 없다.


4. 고장처치책자

기관사들이 가장 무섭게 생각하는 것이 열차가 고장이나 여타 이유로 움직이지 않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무섭게 생각하는 것이 해당 고장에 대한 기관사의 조치가 순간적으로 기억나지 않아 패닉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대부분의 기관사들이 부적처럼 들고 다니는 물품이다.

각 고장이나 비상상황에 대한 판별법과 조치사항이 적혀있다.


5. 물통

무인도에 표류한다거나, 자연재해와 맞닥뜨린다거나 여타 모든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수 확보일 것이다.

한번 근무를 시작하면 약 2시간 30분 동안 차에서 내릴 수 없는, 유사 표류 상태에 놓이기 때문에 식수 확보는 중요하다.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는데 물이라도 자유롭게 마셔야 하지 않겠는가.]

약간 신기한 점은 기관사들의 물통 브랜드가 대체로 K사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K사는 커피믹스 브랜드인데, 커피믹스를 사면 텀블러를 사은품으로 주는 취미를 가진 곳이다.


6. 칫솔치약치실

옛말에 치아건강이 오복에 속한다고 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오복은 유교에서 등장하는 표현인데 치아는 이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신체와 관련된 오복이 따로 구전되어 오는데 그 오복에는 속한다고 한다. 공식 오복은 아니지만 비공식 오복에는 속한다는 말이다.

오복이 어찌 되었건 치아건강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기관사들은 칫솔, 치약, 치실, 가글 등을 챙겨 다닌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오래도록 맛있게 살고 싶은 나는 오늘도 비장하게 칫솔을 꺼낸다.




지금부터는 공통적이진 않지만 일부 기관사들이 들고 다니는 물품들을 말해보겠다.


1. 침낭, 베개

나는 가방을 예쁜 도트백에서 적당한 백팩으로 바꾸었다가 결국 지금의 45L 짜리 군용 백팩으로 바꾸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기관사는 공용 침구를 쓰는데, 이름을 밝힐 수 없는 K 기관사가 팬티만 입고 이불로 쏙 들어가 베개에 겨드랑이 털을 비비며 핸드폰을 보는 모습을 본 이후, 나는 공용 침구를 쓸 수 없었다. 공용 침구 알레르기가 생겼달까. [혹은 K 기관사 알레르기일지도 모른다.]


2. 휴대용 공기청정기

지하라는 공간과 철길 위의 철바퀴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 금속 먼지들. 지하철은 태생적으로 미세먼지에 취약했다.

특히 나는 일을 시작한 이후에 천식이라는 병을 진단받았으니, 내가 휴대용 공기청정기를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천식까지는 아니더라도 근무하고 나면 기관지가 불편하다는 기관사들이 다수 존재하고, 생각보다 많은 기관사들이 휴대용 공기청정기를 가지고 다닌다.


3. 지사제

기관사는 한번 근무하면 평균 2시간 30분 동안 차에서 내릴 수 없기 때문에 다들 급똥을 두려워한다. 해서 그런 사투를 겪은 기관사들은 거의 지사제를 챙겨 다닌다.

[지사제가 떨어졌다며 혹시 남는 거 없냐며 간절히 지사제를 구하러 다니던 동료 기관사의 모습이 기억에 있다.]


4. 외투

여름 한정으로 외투를 가방에 넣어 다닌다. 기관사가 있는 운전실의 냉방을 객실과 따로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하루 종일 에어컨 바로 아래에 있는 기관사는 그 바람을 막을 방도가 없다. 해서 외투를 가방에 챙긴다. 살아남기 위해.


5. 씹을 거리

배가 고프고 허기져서 간식을 먹는 기관사도 있겠지만, 씹을 거리를 챙겨 다니는 기관사의 경우 대부분 졸음방지용이다. 2시간 30분 동안 똑같이 생긴 지하터널을 달리며 혹시 졸음이 온다면 그걸 쫓기 위해 간식이나 씹을 거리를 가지고 다닌다.

껌, 사탕, 떡, 과일, 과자, 커피, 초콜릿, 견과류 등등 개인 취향에 일치하는 다양한 씹을 거리, 간식들이 등판한다. 퇴직한 선배 중에 한 명은 누룽지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하나 재밌는 점은, 가끔 특수하거나 급박한 상황에 의해 가방 없이 열차에 올라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어딘가 허전하고 불안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기관사의 가방은 어떤 심리적 역할을 한다.

기관사라는 일 자체가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보니 다들 심리적 압박을 받게 된다. 그로 인해 악몽을 꾸기도 하고, 알람을 미친 듯이 맞추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한다.

기관사로서 가장 두려운 순간이 있다면, 고장이나 비상상황에 열차가 움직이지 않는 순간과, 해당 고장이나 상황에 대한 기관사의 조치가 순간적으로 기억나지 않아 기관사인 내가 패닉에 빠지는 순간일 것이다.

그래서 부적처럼 들고 다니는 ‘고장처치책자’를 비롯한 다양한 내 물건들이 맥가이버칼마냥 모든 상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 그것이 기관사의 가방이 가지는 심리적 역할이다.


가방을 들지 않고 차를 타면 불안하다.

가방을 가지고 차를 타면 불안하지 않다.

기관사에게 있어서 가방이란 ‘준비’가 아닐까?

내가 가방을 가지고 잘 준비된 상태로 열차에 오르면, 고장이나 비상상황이 벌어져도 걱정이 없다.

내가 준비가 잘 되면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자면, 기관사의 가방은 열차 운전이라는 일에 대한 기관사의 자세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기관사로서의 가방은 잘 챙겨놓았다.

내 삶에 있어서의 가방은 어떨까.

어떤 모양의 가방이고, 안에는 무엇을 넣어야 하는 걸까.

개인적으로 여기에 정답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내가 원하는 형태와 모양의 가방을 메고, 내가 원하는 물품들을 채워 넣고.

그게 내 삶에 대한 나의 자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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